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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중, <은둔기계> 김홍중, ⟪은둔기계⟫, 문학동네, 2020 이후로 오랜만에 정말 좋은 단상집을 읽었다. 언젠가 다시 한 번, 가방 깊은 곳에 두었다가 은둔지에서 꺼내 읽고 싶은 책이고, 또 다른 은둔-기계인 친구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남들의 우상에 현혹돼 은둔을 생명력의 부재로 의심하게 되는 날, 스스로를 꾸짖기 위해 재차 펼쳐봐야 할 책이기도 하다. 야구와 축구, 여행, (나에게 사실 굉장히 소중한) 영화 그리고 인류세 등 특정한 주제에 대한 단상들도 무척 좋았지만 이 책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이 담겨있다고 생각한 '은둔', '파상력', '자기-비움', '페이션시', '헐벗음' 장을 중심으로 독후감을 남기고자 한다. 김홍중(2020)이 개념화하는 '은둔'은 사실 완전한 고립상태를 가리키지 않는다. '은둔'은 또 다른..
20210305 철학함에 대해 철학이 나를 구원해줄 것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사상이, 이념이, 개념이, 그리고 개념들이 조사들 사이로 수려하고 우아하게 앉아 있는 문장들이 나를 구원해줄 것이라고. 그랬기 때문에 복수전공을 했고 대학원까지 왔다. 그러나 막상 제대로된 공부를 시작하고 나니 더 이상 철학이 생명의 밧줄을 내려주리라고는 믿지 않게 됐다. 나를 구원해주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 철학함에 가깝다. 대책없이 난해한 책을 만나 당황하는 표정을 짓기. 당황한 마음을 뒤로 하고 입문서를 사서 잉크가 다 마르도록 형광펜을 긋기. 지루하기 그지없게, 반복적으로 요약하고 또 요약하기. 그리고 다음 날 또 다시 대책없이 난해한 책을 만나… 눈을 게슴츠레 뜨면 하얀 바닥 검은 벽의 미로처럼 형상화되는 활자들과 씨름하는 행위 자체가 나를 구원한..
스티븐 홀게이트, <헤겔의 ⟪정신현상학⟫ 입문> 요약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백수린, <다정한 매일매일> 백수린, , 작가정신, 2020 당분간은 수필이나 산문집을 읽어보려 하고 있다. 백수린 작가의 산문집을 특별히 고른 이유는 그녀가 쓴 거의 모든 글에서 따스한 마음씨가 묻어나온다고 느껴왔기 때문이다. 사람의 약함을, 정확히 말하면 연약함을 이해하고 있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내면들의 어둠을 꼼꼼하게 묘사하면서도 비난하지 않고, 일상의 고통을 당연한 것이 아닌 고투와도 같은 것으로서 충분히 인정해준다. 이 산문집은 여러 편의 소설, 시, 동화 등을 각각 특정한 종류의 베이커리와 엮어내 쓴 글을 모은 것이다. 백수린 작가 특유의 간결하고 친절한 문체로 넓은 문학의 토양이 안내되어있다. 왠지 모르게 나는 한국문학으로부터 감탄하는 마음이나 의분을 느꼈으면 느꼈지 ‘위로’를 받는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 산..
일상이라는 빛, 혹은 덫 --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11권과 그에 대한 폴 리쾨르의 해석을 둘러싼 단상 일상이라는 빛, 혹은 덫 -아우구스티누스의 11권과 그에 대한 폴 리쾨르의 해석을 둘러싼 단상 1. 일상이라는 빛 시간에 대한 지식을 쫓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쫓는 이치고 걸음이 느리다. 그는 머뭇거리는가 하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하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 기존에 놓여있던 표지판들은 죄다 잘못된 길을 가리키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 어려운 여정에서 그가 의지하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시간에 대한 일상적인 체험과 그것을 타인에게 표현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언어다. 시간에 대한 개념적인 사유가 그를 회의주의의 절벽으로 밀어내려 할 때, 그를 탐구의 길 위에 머무르도록 붙잡아주는 것은 일상의 견고함, 즉 진실함에 대한 확신이다. 개념으로서의 시간은 “비존재를 지향한다는 ..
20200119 젊음 딱 1년 전에 쓴 일기인데 지금이랑 생각하는 바에 별반 차이가 없다. “젊음은 불리하고도 유리한 벽이라고 생각한다. 그 벽은 꽤나 자주 내가 원숙해지는 것을 막아섰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들의 막다른 길로 나를 몰아넣었다. 하지만 그 똑같은 벽 뒤로 나는 숨기도 했다. 앞날이 어둡다고 느껴져 도전을 꺼릴 때면, 또는 저 너머의 세상에는 내 빈틈만을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우글거린다는 편집증에 시달릴 때면, 그래도 나는 아직 젊으니까, 이 생각을 곱씹었다. 아직 시작하지 않아도 늦지 않고, 괜히 시작했다가 망해도 회복할 시간은 충분하고, 언제든 뭔가를 새로 시작할 수 있으니까, 라는 식으로 날 위로했던 것이다. 아직 시작하지 않아도 늦지 않다, 이 명제의 손아귀가 특히 내 마음을 감싸쥐어줬고, 그 폐쇄됨을 향..
이제니,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이제니, , 문학과 지성사, 2019, 모든 강조는 필자. 읽는 데 정말 오래 걸렸다. 이건 시집 전체에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고 시 하나 하나에 대한 말이기도 하다. 하나의 시 내에서도 여러 이미지와 메시지가 교차하는, 한 마디로 묵직한, 밀도 높은 시들이었다. 이제니 시인이 시어들을 수집하고 전시하는 방식은 참 독특하다. 내가 가장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기표들 사이의 유사성에 의존해 기의를 창출시키는 기법이었다. 말소리가 서로 비슷한 단어들을 늘어놓음으로써, 마치 그 표면적인 비슷함 너머로 의미상의 진정한 연관성이 있는 것처럼 문장들을 꾸며내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무수하다. "열리고 열리는 여리고 어린 삶"(21, 중에서)이라든지, "완고한 완만함으로 나아가는 흐름이 있다"(52, )라든지,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1> 요약(2021.1 1차 수정)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 아카넷, 2012 머리말 [A] 인간은 자연본성에 따라 신, 자유, 불멸하는 영혼 등에 대한 형이상학적 인식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물음에 대해 성공적으로 답변해내는 것은 그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어서, 이로부터 운명적인 "괴롭힘"을 당해왔다.(AVII) 종래의 형이상학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검토하지 않은 교조주의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교조주의는 회의주의 또는 경험주의를 거쳐서도 견고하게 자리를 지키다 칸트의 당대에는 무차별주의--형이상학적 인식에 대한 일종의 무관심--가 퍼지게 되었다. 칸트는 자기 시대의 무차별주의를 "경솔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사이비 지식에 자신을 내맡기지는 않으려는 시대의 성숙한 판단력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