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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문트 후설, ⟪프롤레고메나⟫ 서론, 1장 요약 Prolegomena to Pure Logic Edmund Husserl, Trans. by J. N. Findlay, Logical Investigations Volume 1, Routledge, 2001, pp. 9-161, 모든 강조는 필자의 것, 모든 이탤릭체는 원문. 정적 현상학에서는 메타바시스가, ⟪기하학의 기원⟫으로 대표되는 발생적 현상학에서는 근원적 명증을 재활성화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이 문제시된다. 문제 제기의 대상이 메타바시스든, 상실의 위기이든지 간에 학문이 스스로의 진정한 목적, 가치, 규범을 잘못 알고 있다는 주장의 뼈대는 그대로다. 다만 그 무지의 양상이 착각이냐, 망각이냐의 문제다. 발생적 현상학은 지식의 참됨과 타당성의 가능조건을 따짐에 있어 역사(적 아프리오리)의 차원을 ..
20240420 유학의 생 멋들어진 일기를 쓰고 싶지만 멋없는 일상을 살기 때문에 별 수 없다. 오후가 오기 전에 일어난다는,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상식일 루틴을 확립하는 데 실패했다. 늦잠을 자는 대신 밤 늦게까지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렇다고 해서 새벽까지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있지는 않다. 아침형 인간은 아니어도 인간이기는 해서 밤이 되면 피곤하다. 햇살이 슬슬 약해질 때 일어나 점심을 해먹고, 다섯 시쯤 도서관에 도착해 자정까지 스트레이트로 공부를 한 뒤 야식을 테이크어웨이 하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오늘까지만 해도 '유학'의 '유'가 흐를 류 자(流)인줄 알았는데 검색해보니 머무를 류 자(留)였다. 유학생의 삶은 방랑시인의 삶과는 거리가 매우 멀며 지박령의 삶에 가깝다. 오실 분 참고하세요!
3 어떤 독서는 육체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지적인 이해를 넘어 신체적인 전율을 가져다주는 책들이 있다. 부자조차 마르크스를 읽는다면 두 볼이 상기되고, 천사조차 니체를 읽는다면 허공에라도 주먹질을 하고 싶어질 것이다. 또는 가만히 글을 쓰고 있는 것뿐인데 마치 춤을 추고 있는 것만 같이 느껴지는 시간들이 있다. 철학적 행위는 가장 정적인 순간에 최대한의 역동성을 가능하게 만든다. 고요한 카페가 새로운 매니페스토, 혹은 복음서가 야유와 함께 울려퍼지는 광장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카페가 조용하면 조용할수록 찬성과 반대의 목소리는 보다 우렁차게 대립한다. 스물두 살 무렵의 어느 일요일 오후, ⟪독일 이데올로기⟫를 읽던 와중 성경 읽기 모임을 하기 위해 카페에 들어온 신자 무리와 눈을 마주친 적이 있다. 나는 공..
미완 - 부쉬 드 노엘(2021.2) 부쉬 드 노엘 "이와 관련해서, 추측하건대, 우리들 중 대부분은 우리에게 무엇이 쾌감과 고통을 가져다주는지 퍽 감을 못 잡는 것 같다. 당신은 정말 크리스마스를 즐기는가?" (Eric Schwitzgebel, The Unreliability of Naive Introspection, The Philosophical Review, Vol. 117, No. 2, 2008, p. 250) 사랑은 과자 같은 것이다. 바삭하거나 달콤하다. 그리고 없이 살 수 있다, 라고 썼다. 그리고는 가슴을 네 번 쓸어내렸다. 연구실에서 지선은 문득 자신이 살아가는 방법을 까먹어버렸다고 털어놨다. 천천히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저 한순간에 바보가 된 것마냥, 갑자기 까먹어버렸다고. 그녀는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최근 보라색으로 ..
20240307 Ce n'est pas des sushis 모든 일은 아니어도 많은 일이 잘 풀려간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이 일치한다는 감각을 매일 느낄 수 있어 감사하다. 행복을 자랑하는 일은 쑥스럽지만, 나누면 두 배가 된다는 생각으로 끼적인다. 2월 중순에 본 프랑스어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평균보다 30점 높았음을 생각하면 유럽 친구들 사이에서 꽤나 잘 본 셈이다. 무엇보다 공부를 충분히 해두고 나니 강의를 따라가기가 수월해져서, 프랑스어 수업 시간이 너무 재미있다. 그래도 역시 재미의 핵심은 리디아 그리고 훌리안과 소곤소곤 수다 떠는 데 있다. 오늘은 'Je vais acheter du pain'을 고통 사러 간다고 번역하면서 낄낄거렸다. 리디아와는 깨어 있는 거의 모든 시간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메시지의 대부분이 헛소리와 드립인데, 덕분에..
2024년 2월의 독서 1. Van Hooft, Stan. (2006). Understanding Virtue Ethics, Routledge. 덕 윤리를 의무론과 스무 가지 정도 되는 기준에 의거해 대비시키는 1장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를 요약한 2장을 읽었다. 학부생도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쓰여있고 내용도 실하다. 다만 인용이 그다지 철저하지 못해 아쉬웠다. 2. Crisp R. & Slote M. (Ed). (1997). Virtue Ethics, Oxford University Press. 보석 같은 논문들만 들어간 책이다. Anscombe과 Stocker의 글을 골라 읽었다. 인트로덕션에는 얼마 전 읽은 ⟪선의 군림⟫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칸트적 자유의지관은 외부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
20240215 희망 반 절망 반 프랑스어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공부해야 할 범위가 넓다 보니 어차피 모든 것을 마스터하고 시험장에 들어갈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오히려 마음이 여유롭다. 시험을 앞두고 긴장하거나 결과를 걱정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다. 잘 보면 잘 보는 대로, 못 보면 못 보는 대로 괜찮을 것 같다. 어떻게 되든 공부하는 동안 즐거웠으니 그것으로 됐다. 외국어를 공부하는 행위는 내 자의가 끼어들 수 없는, 나에게 순수하게 외부적인 권위를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머독이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확실히 철학 공부와 다르게 외국어 공부는 창의성보다는 끈기를 요구한다. 법칙이 보이지 않더라도, 예외가 난무하더라도 인내심과 호기심을 잃지 않고 문법이든 어휘든 끈덕지게 암기해내는 것이 관건이다. 처음엔 끝이 없어 보여도 외우고..
2 다섯 시면 해가 져버리는 데다 해가 떠있어도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날씨를 보상하기 위해 도시 전체가 조명을 휘감았다. 다른 도시에 가도 마찬가지다. 주황색 불빛 아래를 걸어 식당과 마트, 무엇보다 세탁방에 도착한다. 열흘에 한 번 세탁방 안에 가만히 앉아있는 일이 주는 위안은 크다. 세탁방 안에서 당신은 스스로를 정당화할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당신의 목적은 세탁뿐이고, 그 일은 군말없이 물을 뿜고 세제를 삼키는 기계들이 대신하고 있다.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순간 당신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세탁--을 반드시 완수하게 된다. 실수가 끼어들 틈도 거의 없다. 필연적인 성공을 느긋하게 기다리는 당신은 책을 읽어도 좋고,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셔도 좋으며 어떤 이유에서인지 세탁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