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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백수린, <다정한 매일매일>

백수린, <다정한 매일매일>, 작가정신, 2020

당분간은 수필이나 산문집을 읽어보려 하고 있다. 백수린 작가의 산문집을 특별히 고른 이유는 그녀가 쓴 거의 모든 글에서 따스한 마음씨가 묻어나온다고 느껴왔기 때문이다. 사람의 약함을, 정확히 말하면 연약함을 이해하고 있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내면들의 어둠을 꼼꼼하게 묘사하면서도 비난하지 않고, 일상의 고통을 당연한 것이 아닌 고투와도 같은 것으로서 충분히 인정해준다.
이 산문집은 여러 편의 소설, 시, 동화 등을 각각 특정한 종류의 베이커리와 엮어내 쓴 글을 모은 것이다. 백수린 작가 특유의 간결하고 친절한 문체로 넓은 문학의 토양이 안내되어있다. 왠지 모르게 나는 한국문학으로부터 감탄하는 마음이나 의분을 느꼈으면 느꼈지 ‘위로’를 받는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 산문집을 대하면서는 조금 달랐다. 이를테면 다음의 인용문들이, '내가 나'라는 고정불변적 사실에 대한, 그러므로 영구한 듯이 느껴지는 수치심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나에게 자기연민의 가능성을 제안하는 것만 같아서.

"루시의 어린 딸이 엄마에게 말한 것처럼 삶은 소설과 달리 다시 쓸 수 없고, 그래서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거나 받기도 한다. 하지만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은 그럼에도 "눈먼 박쥐처럼 그렇게 계속 나아"가야 하는 것이 삶이라고, 다양한 색으로 물드는 해 질 녘의 하늘처럼 불완전하지만 "아름다운 변신을" 거듭하는 것이 삶이라고 알려준다. 모든 생이 감동을 준다는 루시 바턴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인간이 끝끝내 그토록 서툰 존재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122)
"우리는 어떤 이유에서 사내가 여자를 살해했는지, 세계를 부조리하다고 느끼는지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사내는 피해 여성의 옷을, 뜻하지 않은 사고에 대한 기억과 죄책감처럼 몸에 두르고 살아간다. 사람들에게 조롱거리와 역겨움의 대상이 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죄를 저지른 자리를 영원토록 맴돈다. 마치 과오를 잊지 않으려는 듯. 어쩐지 요즘은, 오독일지라도, 그런 사내의 태도 안에서 숭고함을 애써 발견하고 싶은, 그런 날들이다."(152)
"죽는 것과 사는 것, 무언가를 쌓기 위해 시간을 견디고 오래도록 한자리를 지키는 것과 축적한 것들을 두고 훌쩍 떠나는 것. 타인의 인생에 대해 옳고 그름을 함부로 말할 자격을 지닌 사람은 누굴까?"(171)
"마음의 눈은 어째서 이토록 형편없는 근시인 것인지. 우리는 어떤 일이 눈앞에 직접 닥쳤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에 촘촘하게 얽혀 있는 수많은 다른 선들을 볼 수 있다. 어떤 일이든 쉽게 금을 긋고 선과 악, 옳고 그름 중 하나를 택하라고 소리 높여 말하는 이들은 대부분 멀찍이 떨어진 강의 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216)
"사람들은 쉽게 타인의 인생을 실패나 성공으로 요약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좋은 문학 작품은 언제나, 어떤 인생에 대해서도 실패나 성공으로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 당신이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채 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기만 한다면. 우리가 서로에게 요청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뿐이다."(222, 강조는 필자)
"사는 것이 힘들고 생각대로 되는 일이 없는 어느 날, 온기가 남은 오븐 곁에 둘러앉아 누군가와 단팥빵을 나누어 먹는 상상을 해본다. 긴 시간 정성껏 졸여 만든 달콤하고 따뜻한 앙금이 들어 있는 단팥빵을. 그것은 틀림없이 행복한 장면이겠지만 그런 순간에도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고독할 것이라는 걸 나는 이제는 안다. 사람들은 누구나 타인에게 쉽게 발설할 수 없는 상처와 자기모순,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욕망과 충동을 감당하며 사는 존재들이니까."(227)


어쩌다 독후감이 아닌 필사문이 돼버렸는지 모르겠지만. 위 문장들을 곱씹다 보면 많은 날을 이불 속에 틀어박혀 가족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는 나도 언젠가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만 같이 느껴진다. 혼자서 일어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영감과 에너지를 전할 수 있게 될 것만 같이 믿어진다. 한국문학의 세계를 알게 된 지도 5년이 다 되어간다. 그 동안 멋진 작가들을 많이 만났다. 배수아 작가의 독창성, 김사과 작가의 추진력, 한유주 작가의 중독적 어투, 우다영 작가의 깔끔함, 그리고 백수린 작가의 자비로운 시선을 닮고 싶다. 백수린 작가처럼 타인의 마음을 자비롭게 헤아려주는 데 탁월한 힘을 지닌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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