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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23~0625 Boston 20220623 원래는 22일 저녁에 도착할 예정이었지만, 비행기가 8시간 남짓 연착되는 바람에 새벽 4시 반이 넘어서야 보스턴에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위탁한 수하물이 D.C.를 아예 떠나지도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고,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려 했건만 빌린 에어비앤비의 문마저 열리지 않아서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아침 8시까지 꼬박 하룻밤을 새웠다. 9시에 바로 독일어 시험이 있었기 때문에도 스트레스가 컸지만, 중간에 엄마와 나 사이에 있었던 실랑이들이 유달리 아픈 기억으로 남았다. 철학 공부를 하더라도 교수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가, 그러면 지금이라도 진로를 바꾸라는 말을 듣고 그에 예민하게 응수하고 만 것이다. 그 대화가 어찌저찌 마무리된 뒤에는 위탁수하물의 행방과 에어비앤비 출입과 관련한 나의 ..
비 오는 날, 생의 조각들(2017.5) 2017년이면 내가 학부 4학년을 통과하고 있었을 때구나. 본격적으로 습작을 시작하면서 꿈을 키웠던 시절의 단편. '모리돈부리'라는 덮밥집에서 사케동을 먹으면서 구상했던 기억이 난다. 언어에 대한 감각, 이를테면 콤마를 어디에 찍는 것이 심미적일지에 대한 관점이 지금과 달라 신기하다. 미국에 머물고 있는 동안 올리는 게 적합해 보인다. 하늘은 남색이고 육지는 따분하다. 미국 중서부의 어느 대형슈퍼마켓에서 사람들은 이전부터 셀 수 없이 사온 물건을 또 쥐고 또 담고 하고 있었다. 일주일 전, 일년 전과 마찬가지로 햄과 감자칩과 사과 알이 사람들의 봉지 속에서 등을 동그랗게 만 채로 웅크렸다. 계산대 앞의 캐시어는 표정도 없이 똑같은 행위를 몇백 번째 반복했다. 마트 옆의 1층짜리 상가건물도 따분하기는 매한..
20220620 District of Columbia 2 무척 잘 먹고 있다. 외식을 자주 하지 않아서 거의 집에서만 챙겨먹는데도 살이 쪄서 돌아갈까 봐 걱정이다. 김치 대신 올리브를, 밥 대신 계란프라이를 주식으로 삼고, 내 몸통만한 레이즈 감자칩을 (지금도) 먹고 있다. 내 유학생활의 청사진이 그려지는 기분이다. 단기임대한 집에 식기세척기가 있어서 한국에서와 달리 설거지 걱정 없이 온갖 식기류를 꺼내 쓸 수 있는 것도 편하다. 한국에서는 믹스커피 따위를 마실 때, 뜨거운 물을 붓고 난 후 컵을 단순히 살살 흔들거나 포장지로 커피를 저었었는데, 여기서는 아무 생각 없이 티스푼으로 커피가루를 듬뿍 뜨고 휘젓기까지 할 수 있다. 설거지를 하는 일이 손목에 부담이 가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사소하지 않은 축복이다. 커피는 세이프웨이라는 식료품점에서 5달러짜리 인스턴..
20220616 District of Columbia 1 잔여시간 5:00. 워싱턴으로 가는 비행기 안이다. 사랑스러운 S가 지난 해 생일에 선물해주었던 분홍색 노트에 첫 글자들을 막 새겨 넣어보고 있다. 시간이 너무 잘 가서 무서울 정도다. 이륙 즈음의 멍하고 혼미한 감각을 유도제 삼아서 바로 잠에 들었고, 기가 막히게 점심 때에 맞춰 깨어났다. 제육쌈밥이 아닌 미국식 소고기 스튜를 고르면서, 내가 이 여행에 큰 기대를 걸고 있거나 적어도 달콤한 인상을 가지고 있음을 실감했다. 밥을 먹고 나서는 블랙커피를 연달아 두 잔 마셨다. 그런 다음 독일어 공부를 잠깐 하다가 프루스트를 꺼냈다. 사교계 신사 스완과, 지저분한 소문을 꼬리처럼 달고 사는 오데트가 불장난 같은 것을 시작했다. 악명에 비해 오데트는 꽤나 사랑스러웠으며, 반면 스완은 그에 대한 다른 인물들의 ..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김난주 옮김, ⟪인간실격⟫, 열린책들, 2021. "불행. 이 세상에는 불행한 온갖 사람이, 아니 불행한 사람들뿐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 사람들의 불행은 세상을 향해 당당히 항의할 수 있는 것이고, 또 도 그 사람들의 항의를 쉽게 이해하고 동정합니다. 그러나 나의 불행은 모두 나의 죄악에서 비롯된 것이니 누구에게 항의할 수도 없고, 또 우물쭈물 한마디라도 항의 비슷한 말을 하면 넙치는 물론이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느냐며 가당치 않아 하겠지요. 나는 속되게 말해 것인지, 반대로 마음이 너무 약한 것인지 나도 도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죄악 덩어리인 듯하니 한없이 불행해지기만 할 뿐 막을 구체적인 방안이 없습니다."(129) 얼마 전 대학원 사..
바다 망령의 숨(2022.4)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탈출에 관해서> 요약 및 비판 에마뉘엘 레비나스, 김동규 옮김, ⟪탈출에 관해서⟫, 지식을만드는지식, 2011, 모든 강조는 필자. 이 책에서 레비나스는 존재의 외부를 사유하는 데 무능했던 서양철학을 비판하면서 존재로부터의 '탈출(évasion)'이란 개념의 가능성을 탐사한다. 존재의 외부를 가리키는 탈출 개념의 근거로 그는 '말레즈(malaise, 불안감)'가 자아를 존재로부터의 탈출로 초대하는 현상을 분석한다. 레비나스에게 말레즈란, 자아로 하여금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하게 만들지만 무엇이 그러한 벗어남을 가능하게 해줄지에 대한 앎이 없는 그런 감정이다. 우리가 아무리 (어떤 목표에 봉사하는지 잘 아는 이런저런 대상들을 통해) 욕구를 충족해도, 인간의 조건으로서의 근원적인 말레즈--는 데 대한 절대적인 불만--는 해소되지 않는다..
하인리히 뵐, <천사는 침묵했다> 발췌 하인리히 뵐, 임홍배 옮김 ⟪천사는 침묵했다⟫, 창비, 2019. 전쟁 직후 독일의 폐허를 응시하는 책. 주옥 같은 구절들이 많은데, 손목이 슬슬 아파서 두 부분만 옮긴다. 차례대로 사랑을 집어삼키는 피로를 다루는 93쪽, 1948년의 독일의 본질을 꿰뚫어버리는 듯한 144-5쪽. "나와 함께 있어줘." 이렇게 말하고서 그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키스를 하자 그녀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가 그녀를 놓아주자 그녀가 말했다. "아냐, 이러지 마. 날 놓아줘. 너무 피곤해서 죽을 지경인데,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고. 배도 고파, 너무너무 배고파."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 그가 말했다. "당신도 날 사랑해?" "그런 것 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