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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idelberg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한 첫날, 철학자의 길을 걸으면서 오래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지는 태양과 구름, 적갈색 흙, 나뭇잎과 나무 그림자, 특히 보름달이 이 세상에 그리고 내 삶 속에 처음부터 언제고 존재해왔다는 것을. 보름달은 내것이 아니어도 아름답다. 이 세상에는 내것이 아니어도 아름다운 것이 정말 많다. 내가 더 이상 살지 않는 도시. 단지 여행자로서 스쳐지나온 도시. 나를 스쳐지나간 되돌릴 수 없는 시간. 나와 함께할 수 없는 사람. 나와 함께하지 않는 사람. 이들, 아니 그들은 당장의 내 세계 안에 없고 내게 지각되지조차 않는다. 지각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것, 그것을 철학자들은 (아마 관념론자인 버클리를 제하고) 실재라고 부른다. 실재에 대한 사랑은 나만의 소유물에 대한 사랑..
20260929 부적과도 같은 지폐들 연구 방문을 온 새로운 도시에 잘 정착했다. 짐을 다 푼 것은 물론이고 어디서 장을 봐야 하는지 알고, 쓰레기 버리는 장소를 익혔고, 좋은 카페와 극장을 찾았다는 뜻이다. 이래저래 모든 것이 바뀌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불안과 권태가 한 시, 한 자리에 닥쳐올 수도 있구나 싶다. 심심쓸쓸한 마음에 사진을 많이 찍고 있고, 아침부터 밤까지 주섬주섬 뭘 엄청 먹는다. 그래도 운동을 다녀오거나 하루종일 도서관을 지킨 날에는 하루 끝에 은은한 기쁨이 기다리고 있다. 학회를 위해 하이델베르크에 갔다 왔다. 연구자로서의 생활에 상당한 자부심과 즐거움을 느낀다. 압박, 설거지, 세탁물, 보통은 입 한 번 벙긋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이십사 시간이 주는 외로움의 초시간적 무게에 맞서 이 정체성은 내게 영원한 위로..
프란츠 브렌타노, ⟪선악에 대한 지식의 기원⟫ Franz Brentano, trans. by Roderick M. Chisholm & Elizabeth H. Schneewind, The Origin of our Knowledge of Right and Wrong, Routledge, 2009 (first published in 1889). 이 글에서 브렌타노는 무엇이 그 자체로 어떤 법과 도덕을 다른 법과 도덕보다 옳은 것으로 만들어주는지 묻는다. 즉 “법과 도덕의 자연적 인가natural sanction”를 현상학적으로 탐구하는 글이다. 사실적이거나 논리적으로 옳은 판단과 윤리적으로 옳은 판단 사이의 유비에서 출발해, 본성적으로intrinsically 선하거나 악한 무엇이 있다는 도덕 실재론moral realism이 펼쳐진다. 브렌타노의 윤리학은 ..
막스 셸러, ⟪자기인식의 우상⟫ 요약 Max Scheler, trans. David R. Lachterman, "The Idols of Self-Knowledge" In: Selected Philosophical Essays,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73, pp. 3-97. (Die Idole der Selbsterkenntnis, 1912) 프랜시스 베이컨은 외부세계에 대한 앎을 방해하는 인간의 자연적인/자연스러운 경향성을 우상으로 규정한 바 있다. 이 글에서 막스 셸러는 우상의 식별이라는 동일한 작업을 반대로 [내면세계]에 대한 앎과 관련해 수행한다. 셸러에 따르면 인간의 내부를 탐구함에 있어 [제1우상은] 바로 외적 지각과 달리 내적 지각은 기만하지/속이지deceive 않는다는 믿음이다. 달리 말해 ..
피터 게이, ⟪바이마르 문화⟫ 피터 게이, 조한욱 역, ⟪바이마르 문화⟫, 교유서가, 2022."내가 '전체성의 갈망'이라고 부른 감정과 반응의 강박관념은 다시 살펴보면 거대한 두려움, 현대성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태어난 거대한 퇴행으로 보인다. 퇴니스, 호프만슈탈 등의 인물들이 조작했던 민족, 영도자, 유기체, 국가, 결정, 공동사회 등의 추상물은 뿌리와 공동체에 대한 절박한 필요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격렬하면서도 때로는 사악하게 이성을 부정하는 것이었는데 거기에는 직접적인 행동이나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대한 복종의 촉구가 뒤따랐다. 전체성의 갈망은 증오로 뒤덮여 있었다. 그 주요 대표자들의 정치 세계는 적들로 가득차있는 편집증의 세계였고, 때로는 이들 개인의 세계도 그러했다. 그들에게 적들이란 인간성을 말살하는 기계, 자본주의적 물..
12: 먼저 코끼리 코를 돈 자만이 똑바로 걸어갈 수 있다 이인범 감독의 단편 에서는 과격한 말을 주고받으며 헤어지기 직전까지 간 두 연인, 정수와 상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날 밤 한 침대에서 잠 들기를 선택하기까지의 하루를 그린다. 그런데 이 하루는 단순히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둘에게 낯선 이들, 주연이란 이름의 여자 그리고 두 명의 천사와 공유되고 있다. 낯선 이들은 인간됨과 천사됨이라는 존재론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는데—심지어는 천사들이 인간 주연에게 일의 성공 비법을 묻는다—그것은 어떤 진심을 전달해 믿게 만들고 믿음에 따라 행동하게 만드는 일처럼 보인다. 이들의 대화에서 흥미로운 의견차가 있다. 바로 베테랑 천사는 진심의 전달자로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나약한 존재'라 고백하는 반면, 아직 어린 천사는 왜 천사의 업무가 약..
20260915 육회, 논산 딸기, 소곱창 대륙을 덮친 폭염이 가신 뒤의 사진들. 이사일지. 여름에는 남 몰래 감정 일체를 제거하고자 했고 실제로도 무엇이든 깊이 느끼는 일로부터 멀어져있었던 것 같다. 극장에 가서 무표정으로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를 한 달 안에 다섯 개인가 봤고 머리를 잘랐다. 그러는 사이 놀라울 정도로 아픔에 둔해지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며칠 갑자기 계속 울었다. 분명히 사진을 지우려고 7월부터 틈틈이 갤러리를 뒤지는데 즐겨찾기에 새로 추가하는 사진만 늘어난다. 도박이나 다름없는 인형 뽑기, 해수욕, 오이도 네온사인, 모닥불에 구운 쫀드기 사진, 아니면 그저 평범한 지하철 역사나 버스 정류장에서 찍은 사진조차…… 거의 아무것도 삭제하지 못하는 이 마음은 애도하는 마음일까, 미련일까, 무엇일까, 억눌러야 하나, 폭발..
발표: 죄책(감)의 현상학(2026.11.6 예정) 블로그에 방문해주시는 선생님들께,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수지 퍼라렐로 교수가 현재 주관하고 있는 캘리포니아 현상학 그룹(California Phenomenology Circle)에서 ‘후설과 발덴펠스의 관점에서 조명한 병리적 죄책 현상Phenomenology of Pathological Guilt with Husserl and Waldenfels’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진행하게 돼 홍보합니다. 죄책(감)의 현상은 흔히 분리되어온 심리적인 것, 윤리적인 것, 그리고 실존적인 것의 권역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입니다. 죄책(감)의 병리화, 즉 행위에 비례하지 않는 과도한 자기비난 및 그것이 일상에 급성적으로 침투하는 체험은 저 교차가 단순히 부차적인 우연이 아니라 인간성의 본질적 지평임을 드러냅니다. 이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