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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일상이라는 빛, 혹은 덫 --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11권과 그에 대한 폴 리쾨르의 해석을 둘러싼 단상

일상이라는 빛, 혹은 덫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11권과 그에 대한 폴 리쾨르의 해석을 둘러싼 단상

 

1. 일상이라는 빛 

 시간에 대한 지식을 쫓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쫓는 이치고 걸음이 느리다. 그는 머뭇거리는가 하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하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 기존에 놓여있던 표지판들은 죄다 잘못된 길을 가리키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 어려운 여정에서 그가 의지하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시간에 대한 일상적인 체험과 그것을 타인에게 표현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언어다. 시간에 대한 개념적인 사유가 그를 회의주의의 절벽으로 밀어내려 할 때, 그를 탐구의 길 위에 머무르도록 붙잡아주는 것은 일상의 견고함, 즉 진실함에 대한 확신이다. 개념으로서의 시간은 “비존재를 지향한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면” 성립하지 않는다.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현재는 “그것이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가 존재하지 않게 되리라는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11,14,17). 탐구 대상의 비존재라는 막다른 길에 이르러서도 아우구스티누스가 탐구를 포기하지 않는 까닭은 그가 시간을 일상적으로 체험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과거나 미래를 두고 긴 시간이니 짧은 시간이니 하는 말을 합니다(11,15,18, 강조는 필자).”

 폴 리쾨르는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가 “언어의 일상적 용법에 대한 조심스런 신뢰(시간과 이야기 1권, 33)”를 보이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 신뢰를 바탕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이 영혼 속에 존재한다는 명제를 천명하고 그에 따라 시간의 개념을 재정립함으로써 시간의 존재 및 측정에 대한 아포리아를 해결한다. 이 과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존재하지 않거나 간격이 없는 것은 잴 수 없다.  

 2. 지나간 시간(또는 다가올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현재는 간격이 없다.  

 3. 그러나 우리는 일상적으로 시간을 잰다.  

 4. 그렇다면 우리는 지나간 시간이 아닌 지나가는 시간을 잰다.  

 5. 지나가는 시간은 종점을 가지지 않는데, 종점을 가지지 않으면 잴 수 없다.  

 6. 지나가는 시간이 종점에 이르면 또는 종점을 지나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지나가는 시간이 측정되려면 지나간 시간이 되어야 하는데, 지나간 시간이 되면 존재하지 않는다. 또 다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잴 수 없다. 

 7. 우리는 (정신과 독립된 것으로서의) 시간 자체를 재는 게 아니다. 지나간 시간(또는 다가올 시간)도, 지나가는 시간도 잴 수 없기 때문이다. 

 8.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사된 감각을 믿는 이상” 우리는 여전히 무언가를 재고 있다.(11,27,35) 

 9. 그렇다면 그 무언가는 “기억 속에 있는 무엇, 거기 인각되어 남아 있는 무엇”일 수밖에 없다(11,27,35). 남는 가능한 선택지가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은 시간적 자질을 가지는 정신적 표상/인상이다. 

 10. 인상이 없는 경우, 예컨대 침묵의 경우에는 그 자리에 “사유를 펼침으로써 [...] 일종의 운동의 차원을 구상”하여 간격(연장, 폭, 지속)을 형성해 그것을 잰다.

 이상의 논증에서 일상적 체험에 대한 신뢰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3번과 8번의 단계에서이다. 논증 단계 3번을 거쳐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의 ‘무엇임’으로부터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로, 8번을 거쳐 시간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로부터 그것이 ‘어디에’ 존재하는지로 시선을 전환한다. 첫 번째 전환은 시간에 대한 개념적인 사유가 낳는 모순들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가 탐구를 포기하지 않도록 해주며, 처음으로 시간을 시간 자체가 아닌 시간적 자질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연다. 두 번째 전환은 그 시간적 자질이 영혼에 의해 비로소 부여되는 것임이 밝혀지는 계기가 됨으로써 현상학적 시간론의 계보를 시작시킨다. (현상학적 시간론은 시간을 의식과 독립적인 대상 자체로 다루지 않으며, 시간이 의식과의 지향적 관계를 나아가 의식작용의 능동성을 빌어서만 비로소 의미화되고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시간론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스스로의 힘만으로 이러한 결론에 다다르는 것은 아니다. 그는 둘째로, 어떤 것이 진리라면 그것이 진리임을 비춰주는 조명인 하나님에게 의지한다. 하나님은 앎의 참됨, 인식의 타당성을 보증해주는 최고심급의 판단자다. 인식자가 어떤 것이 참임을 수긍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수긍하라고 명령한 데 순종하는 행위다(11,24,31). 아우구스티누스는 11,14,17에서 시작되어 11,28,38에서 끝나는--이는 앞뒤의 신학적 사색을 배제한 것으로 논의의 시작과 끝을 설정하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그의 시간론에서 참된 앎을 찾고자 여러 차례 하나님을 찾는다. 예컨대 11,16,21에서 느닷없이 “주님”을 외치고, 11,18,23에서 그에게 자신으로 하여금 탐구에 더욱 집중하게 해달라고 부탁하며, 11,23,30에서는 시간을 운동 대신 확장distentio으로 정의하면서 조심스럽게 신의 동의를 구한다.

 더욱 주목할 만한 대목들은 11,17,22와 11,22,28 그리고 11,25,32로, 여기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짤막하게 탄원하는 일을 넘어서 오직 하나님에게 인식론적 도움을 빌기 위해 탐구를 잠시 중단시키기까지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세 대목은 모두 시간론의 전개에 있어, 개념으로서의 시간이 탐구를 포기하게 만드는 데 맞서 일상적 시간체험에 대한 신뢰를 쇄신하고, 아포리아의 충격으로 인해 중단되었던 탐구를 이어나가게 해주는 기능을 수행한다.

 세 대목을 하나씩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11,17,22는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고, 현재는 연장이 없어 측정이 불가능한 것처럼 사유되는 11,15,20(위 논증 단계 2번의 예고)의 충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시간이 존재한다고 “아이 적에 배웠고 그렇게 아이들을 가르쳤”던 경험을 되새기는 대목이다. 이 경험을 신뢰하게 해달라는 부탁, 나아가 이 경험이 전제하는 시간의 존재(및 측정 가능성)이 참임을 보증해달라는 부탁이 곧 아우구스티누스가 요구하는 하나님의 보호이자 다스림이다. 

 11,22,28 역시 위 논증 단계 1, 2번에서 마주하는 아포리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시간과 시간을, 세월과 세월을 얘기”하며 그 체험이 성립하기 위한 전제로서 시간이 엄연히 존재함—비존재를 함축하는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아직은 밝혀지지 않은 방식으로—을 재확인하는 대목이다. 시간의 탐구 가치 또한 여기서 재확인된다. 하나님은 시간이라는 탐구 “주제의 설정”이 “새삼스럽”긴 해도 무가치하지는 않음을, 나아가 성과를 낼 수 있는 지적 노력임을 보장해주는 주체로서 등장한다. 시간의 탐구 가치에 대한 이러한 확신 덕에 그는 주저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철학자들의 시간론을 참조하는 우회로를 택해보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11,25,32는 다른 철학자들의 시간론이 확언한 바와 달리 물체의 운동은 시간이 아님을 깨달은 직후 이어지는 탄원이다. 11,25,32는 무지와 앎을 동시에 고백하면서 시작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무지, 즉 “아직도 시간이 무엇인지 [...] 모르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은 다른 철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시간에 대한 기존의 개념적 사유들을 신뢰할 수 없음을 드러내준다. 반면 앎은 그런 불신마저 “시간 속에서” 이뤄진다는 데 대한 거의 본능적인 앎이다. 이렇게 개념으로서 사유된 시간에 대한 불신과 일상적 체험 속에서의 시간에 대한 신뢰가 교차한다. (여기서 일상적 체험은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자 철학적 사색이라는 형태를 띤다. 그러나—추후 상술하겠으나—철학자에게는 철학적 사색이 곧 일상적 행위임을 유의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철학자의 입장에 서는 경우 과연 철학적 사색 및 그것의 기둥을 이루는 개념적 사유와 일상적 체험을 구분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대두된다. 이에 대해서는 사유의 차원을 나누어, 개념적 사유 역시 인간의 일상 가운데서 이뤄지는 행위이므로 행위의 차원에서는 일상적 체험으로서 발생한다는 것이 자명하겠지만, 그것의 내용의 차원에서는 일상적 체험을 고려하느냐 고려하지 않느냐의 차이가 있으리라고 정리하여 답할 수 있겠다.)

 무지와 앎의 동시적인 고백 이후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터에 어떻게 이런 점들을 제가 압니까? 혹시라도 제가 알고는 있는데 아는 바를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것입니까?(강조는 필자)”라고 묻는다. 이 물음에서 “아는 바”란 체험을 통해 획득되는 일상적 지식으로, 『존재와 시간』 속 하이데거의 관점으로 보자면 손-안의-존재Zuhandensein에 대한 암묵적 이해에 해당하는 반면 그것을 표현할 수 없는 “말”이란 개념적 사유를 통해 획득되는 철학적 지식으로 눈-앞의-존재Vorhandensein에 대한 명시적 이해에 해당한다. 일상과 철학 사이의 간극이 한 문장 속에서 이토록 오묘하게 드러나는 셈이다.

 그러나 바로 다음 문장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마치 일상적 지식의 존재마저 부정하는 것처럼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는 저!”라고 울부짖는다. 이때는 일상과 철학이 결합되어, 철학적 지식의 부재는 전적인 무지와 동일시된다. 이유는 간명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일상이 곧 철학자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조명(“저의 하나님, 당신께서 제 어두움을 밝혀주실 것입니다.”)을 거쳐서만 이 철학자는 다시금 “제가 시간을 재고 있노라고 저의 영혼이 진실로 고백(11,26,33)”하는 지점, 즉 진리의 위치를 가리키는 지도의 파편이자 철학자가 아닌 사람들과도 공유되는 일상적 지식을 회복하는 지점으로 돌아온다.

 이때 하나님의 빛이 드리워지는 진리의 터Licht는 일상이지, 개념적 사유의 영역이 아니다. (‘Licht’는 독일어로 숲 한가운데 나무가 없는 빈 터, 그리하여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에서 비은폐성Unverborgenheit으로서의 진리가 열리는 형이상학적-미학적 공간을 뜻하는 동시에 빛을 뜻한다.) 개념적 사유가, 즉 철학이 재차 진리담지자로서의 명예를 회복하려면 일상과 조화되지 않는 기존의 담론을 버리고 일상과 조화되는 새 담론을 전개해야 한다. 리쾨르는 철학의 이와 같은 명예 회복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 같다. 개념이라는 주어에 대해 ‘정제하다’라는 술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시간과 이야기 1권, 35). 그에게 개념이란 개념에 상응하는 실제 사태의 자연본성에 따라 결정되는 무언가가 아니라 철학자의 머리-손으로 정제되는 대상이다. 개념이라는 아주 단단해 보이는 보석을 실은 언제든 다시 깎을 수 있다는 데 철학의 연약함과 역동성이, 미심쩍음과 자유로움이 함께 자리한다. 주지하다시피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 정제의 기준 또는 연장은 일상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그의 머리-손에 붙들어준 것이기 때문이다. 

 11,25,32를 거쳐서야 아우구스티누스는 비로소 “시간이란 어떤 확장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며 구체적으로는 “영혼 자체의 확장(11,26,33, 강조는 필자)”임을 처음 명시하게 된다. (물론 11,18,23에서 일찍이 과거를 기억된 표상이 현전하면서 내보이는 시간적 자질로서, 미래를 인과에 따라 예상되는 표상이 현전하면서 내보이는 시간적 자질로서 소개하며, 이 표상들은 영혼 속에 존재하므로 영혼의 확장으로서의 시간 개념은 이미 발견돼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무런 진전 없이 제자리로 돌아오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영혼과 독립적인 것으로서의 시간 자체를 취급하는 여타 시간론들을 경유함으로써 확장으로서의 시간을, 리쾨르의 강조를 따르자면 이완으로서의 시간 개념을 더불어 확립했기 때문이다. 이후로는 리쾨르가 “이어지는 11서의 내용(26,33~28,37)은 [...] 세 겹의 현재에 대한 논제와 [...] 이완에 대한 논제를 확실하게 연결(시간과 이야기 1권, 51)”한다고 해설한 내용이 이어진다.) 이후로 그의 논증은 결론으로, 최초에 목표했던 목적지로 단박에 내닫는다. 영혼이 확장되는 방식을 철학적으로 해명하고 그에 상응하는 실제 사태를 기술해주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일상적 시간체험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에 있어 단순히 유용한 근거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상적 시간체험은 탐구의 초기 단계에서는 시간에 대한 탐구의 탐구 가치 및 성공 가능성을 보증해주고, 탐구의 과정에서는 탐구를 중단시킬 만한 개념적 장애물들을 넘어서게 하며, 끝내는 탐구가 그에 조화되어야 할 이상, 탐구로써 설명해야 할 목표로서 기능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일상이라는 변수가 철학적 탐구 일반(또는 철학적 사색, 개념적 사유)을 이분(二分)함을 통찰할 수 있다. 하나는 탐구 과정에서 일상적 체험의 내용을 도외시한 채 논리만을 독주시키는 개념적 사유고, 다른 하나는 일상적 체험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그것과의 조화를 참된 앎, 타당한 인식의 기준으로 삼는 개념적 사유다. (이러한 이분법은 이후에 근대철학자인 데이빗 흄에게서도 발견된다. 인과필연성, 자아의 통일성, 외부세계의 존재에 대한 흄의 회의주의는 전자의 개념적 사유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회의를 자연Nature과 상상력을 통해 극복하는 흄의 자연주의 프로젝트는 후자의 개념적 사유에 해당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후자는 기존의 철학적 담론을 선입견으로 가지지 않는 채 그에 대해 판단을 중지하는 대신, 이와 같은 무전제성을 전제로 인식자에게 1인칭으로 체험되는 사태 자체를 직관할 것을 요구하는 현상학의 이상에 부합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비록 후설이 현상학을 창시하기 훨씬 이전에 활동한 철학자이기는 하지만, 같은 이상을 따랐다는 점에서 그가 후설의 담론적 지향을 예고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두 철학자에게 있어 일상적 체험은 탐구의 빛 가운데 하나다. (후설의 경우, 일상을 탐구의 빛으로 삼은 예로 생활세계를 통한 비-데카르트적 환원을 초월론적 주관에 대한 앎에 이르기 위한 환원의 방법으로 제시했던 것을 들 수 있다.)

 

2. 일상이라는 덫 

 일상과 철학은 이처럼 일상적 체험과의 조화를 꾀하는 철학적 탐구가 여는 시야 안에서 결합하는 데 성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결합의 관점은 철학적 탐구에서 일상적 체험이 수행하는 역할을 탐구의 진행과정에서의 유용성과 성과에의 기여도 등에 비추어 이상화한다. 그러나 우리가 탐구의 진행과정과 성과뿐만 아니라 초기단계에도 유의한다면, 철학적 탐구에 있어서 일상적 체험이 지니는 가치는 재평가될 여지가 있다. 막연한 불안감을 동반하는 이 가능성은 다음과 같이 언명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탐구의 초기단계에서 개념으로서의 시간이 야기한 아포리아들이, 실은 일상언어로서의 ‘시간’이 낳는 왜곡 때문에 야기된 것이라면? 다시 말해 일상적 체험이 시간 탐구를 이끌어주는 빛이 아니라 애초에 탐구를 어렵게 만들었던 덫이었다면?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일상적 체험의 도움을 빌어 아포리아들을 돌파한 것은 마치, 소위 병을 얻은 곳에서 약을 타온 것과 같은 지적으로 애처로운 움직임이었다면? 이 의문은 다음과 같이 요약적으로 제기될 수 있다. 

 1. 리쾨르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을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명사(‘praeteritum’, ‘praesens’, ‘futurum’)로 표현하다가, 11,17,22를 거쳐 ‘과거의’와 ‘현재의’, ‘미래의’라는 형용사로(‘praeterita’, ‘praesentia’, ‘futura’) 표현하기 시작한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존재하지 않거나 비존재로 흘러버리는 것으로서만 존재하지만,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 ‘미래의’ 것은 “어느 비밀한 처소(11,17,22)”에 존재함으로써 시간의 측정을 가능케 한다. 나아가 이 존재는 시간이 시간적 자질이 됨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시간적 자질이 시간적 사건이나 시간적 존재자에 속하는 것, 그것들의 자질로서만 존재할 수 있음은 자명하다. 시간적 사건이나 시간적 존재자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지만, 시간적 자질은 그것들에 의존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명시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존재론적으로 독립된 실체와 존재론적으로 의존적인 비실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적 구분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편의상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스스로 자신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소화했다고 고백했기도 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명사를 존재론적으로 독립된 실체를 가리키기 위해 쓰는 한편, 형용사는 존재론적으로 의존적인 비실체를 가리키기 위해 썼다고 볼 수 있다. 

 시간을 존재론적으로 독립된 실체가 아닌 존재론적으로 의존적인 비실체로 이해함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론을 전개함에 있어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개념으로서의 시간이, 즉 시간을 영혼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시간 자체로 생각함이 야기하는 비존재 또는 비(非)-지속의 문제를 극복하고, 그 존재 및 지속을 확신할 수 있는 표상이 가지는 자질로서 시간의 개념을 재정립할 길을 열기 때문이다. 이 길은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인 체험 덕분에 겨우 열린 것이다. 

 2. 그런데 이 힘겨움의 인상이 무색하게,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의 존재가 그 시간에 발생하는 사건 또는 그 시간에 존재하는 존재자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함을 탐구의 초기단계부터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시간이 시간 자체, 즉 일종의 실체가 아니라 사건 또는 존재자에 의존하는 비실체임을 처음부터, 아포리아에 빠지기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는 “만일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는다면 과거 시간은 존재하지 않을 테고, 아무것도 닥쳐오지 않는다면 미래 시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현재 시간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란 그의 말로부터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그는 심지어 “이것만은 제가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하겠(11,14,17)”다고 장담하기까지 한다. 

 3. 그렇다면 대체 왜 아우구스티누스는 마치 무지로부터 새로운 앎으로 이행하는 양 위의 재정립을 수행했어야 했으며, 끊임없이 시간의 무엇임을 둘러싼 혼란에 시달렸는가? 바로 일상언어로서의 ‘시간’, ‘시간’이라는 표현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 체험이 자꾸만 시간을 마치 실체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만일 이러한 오해가 없었더라면 시간에 대한 탐구는 처음부터 시간적 자질에 대한 탐구가 되었을 것이며, 실체로서의 시간이 낳는 아포리아들 역시 야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일상적 체험에 의지해 아포리아들로부터 벗어나기 이전에 일상적 체험이 일찍이 그 아포리아들을 형성해놓은 셈이다. 

 위의 주장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자면, 시간에 대한 ‘무지의 지’를 고백해온 한편 시간의 존재론적 의존성에 대한 ‘지의 무지’ 역시 드러내고 있었다는 점이다.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는 저!”라는 외침은 아우구스티누스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무엇을 아는지도 모르는 저!”와 병행되고 있었다. 위의 주장을 충분히 뒷받침하기 위해 시간에 대한 탐구를 도입하는 11,14,17부터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 11,14,17에서 시간의 존재는 그 시간에 발생하는 사건 또는 그 시간에 존재하는 존재자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하는 것으로 단언된다. (물론 시간이 존재론적으로 우선적인지, 시간적 사건이나 존재자가 존재론적으로 우선적인지는 따로 재고해야 할 주제이다. 시간성으로 말미암아 존재가 비로소 가능하다는 입장, 다시 말해 사건 및 존재자의 존재는 그 존재자가 속한 시간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한다는 입장 또한 시간의 존재는 시간적 존재자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한다는 입장만큼이나 진리 여부를 두고 경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아우구스티누스의 존재론적 입장은 그가 스스로 확신하는 만큼 자명하지 않다.) 이를 당장의 편의상 명제1이라 부르자. (앞서 언급했다시피, 여기서 이미 시간을 시간 자체가 아닌, 시간 자체와 구별되는 사건이나 존재자가 가지는 시간적 자질로서 취급해야 할 필요성이 예고된다. 시간이 만일 시간 자체로, 즉 일종의 실체로 취급되려면, 그것은 다른 존재자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하지 않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명제1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입각해 표현한다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을 실체로 생각하고 있지 않음을 밝혀준다. 범주론에 따르면 “기체subject 속에 없는 것이 모든 실체에 공통적인 특성(Categories 4장 3a7)”이다. 반면 기체 속에 있는 비실체는 “그것이 그 속에 있는 어떤 것과 분리돼서 존재할 수 없(Categories 2장 1a20)”다. 그런데 명제1에 따라 시간은 시간적 사건 또는 존재자와 분리돼서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적 실체가 아니며, 실체가 아닌 것들 중에서도 실체 속에 존재하는 것에 해당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이 아리스토텔레스적 실체가 아닌 또 다른 근거는 시간이 영원과 반대된다는 데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실체들의 또 다른 특성은 그들에 대해 무엇도 반대되지contrary 않는다는 점이다(Categories 5장 3b24).” 그러나 시간은 영원이라는 반대자를 가진다.)

 명제1 직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현재가 만일 항상 현재로 있고 과거로 옮겨가지 않는다면, 더 이상 시간이 아니고 영원일 것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리쾨르가 “시간의 존재와 비존재의 논리적 모순(시간과 이야기 1권, 32)”이라고 명명한 모순의 둥지이자 아우구스티누스가 내던져지게 된 상황인 동시에, 그 내던져짐에 역설적이게도 스스로 탐구의 시작점으로 선택한 지점이다. 이 말을 편의상 명제2라고 부르자.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신뢰하는 독자라면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것이다. 시간의 존재가 탐구에 있어 중대한 문젯거리라면 첫째, 어째서 명제1이 아닌 명제2가 탐구의 시작점으로 선택됐는가? 어떤 것의 존재에 대해 탐구함에 있어 그것의 존재론적 근원에 대한 고려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이 동의할 만한 것이라면 말이다. 설령 이 우선성의 원칙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째서 탐구의 과정에서 또는 결론에서조차 시간적 사건 또는 존재자가 시간의 존재론적 근원이라는 점, 다시 말해 시간이 제 속에 존재하는 실체라는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가? 시간에 대한 탐구란 마치 망망대해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아서, 떠다니는 나뭇조각 하나에라도 매달리지 않으면 철학적 익사를 면할 수 없는 것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의 비실체성을 앞서 단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나뭇조각 삼아 수면 위로 떠오르기를 거부한다—정확히는 그렇게 하기를 망각한다. 

 고려가 불충분하다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명제2가 제시된 뒤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명제1의 시간적 사건 또는 존재자를 시간의 존재론적 근원으로서보다는 시간을 측정 가능하게 하는 의식작용들(즉 시간적 사건)이나 그에 상응하는 대상물(즉 시간적 존재자)로서만 취급한다. 심지어는 이따금씩 시간과 시간적 사건 또는 존재자의 외연이 동일시되기까지 한다. 이러한 혼동의 경향성은 리쾨르가 “각기 섬세한 다양성을 보이므로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덧붙인 “지금 울리고 있는 소리, 이제 막 울렸던 소리, 그리고 연이어 울리는 두 개의 소리에 대한 세 가지 유명한 예(시간과 이야기 1권, 52)”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11,26,33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저희는 더 짧은 시간으로 더 긴 시간을 재는 것입니까?”라는 물음으로부터 “사실 저희는 짧은 음절의 길이로 긴 음절의 길이를 재고서 곱절이라는 말을 합니다(강조는 필자)”라는 대답으로 아무런 위화감 없이 비약한다. 시간과, 시간이 그 속에 존재하는 실체인 시간적 존재자 사이가 존재론적으로 서로 다른 위계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가 고려되지 않는 것이다. 이어 “저희는 [...] 긴 음절이다, 짧은 것보다 두 배니까 [...] 라는 말을 합니다”라는 분석 직후에도 “그렇다고 이렇게 해서 시간의 정확한 양이 파악되지는 않습니다”라고 설명하며 이 “양”을 가지는 실체를 시간적 존재자가 아닌 시간으로 혼동하여 파악하고 있다. 앞선 명제1에 따르면 시간은 실체가 아님을, 따라서 양을 가질 수 없음을 아리스토텔레스를 익힌 아우구스티누스라면 인지하고 있으리라 충분히 기대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시간적 사건 또는 존재자의 위상에 대한 위의 부적절한—어찌 보면 오류이기까지 한—취급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론을 전개하기 위해 의지하는 일상언어가 야기하는 특수한 왜곡으로부터 기인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보다도 친숙하고 잘 알려진 것이” 없으며, “만약 아무도 저한테 묻지 않으면 저는 압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김으로써 그에게 탐구 대상이 되는 시간이 일상적 체험 가운데 우리에게 친숙하고 잘 알려진, 즉 일상언어로서의 ‘시간’에 의해 올바르게 지시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상언어로서의 ‘시간’은 그 몇몇의 용례들에서 시간적 자질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론적으로 근원적인 실체로서 잘못 취급된다. 실제로 존재론적 근원이 될 수 있는 것, 또는 실체인 것은 시간이 아니라 시간적 사건 또는 존재자인데도 불구하고 그렇다. 예컨대 아우구스티누스가 뒤이어 “[...] 과거와 미래가 어떻게 존재합니까?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데 말입니다(11,14,17, 강조는 필자)”라고 말할 때, 실제로 이미 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은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과거의 사건 또는 존재자나 미래의 사건 또는 존재자다. 이는 시간을 시간적 사건 또는 존재자가 지니는 시간적 자질로 취급하는 아우구스티누스-리쾨르의 분석의 정당한 귀결이다. 

 그러므로 만일 일상언어로서의 ‘시간’이 사태를 왜곡하지 않았더라면, 즉 실제로는 시간적 사건이나 존재자를 가리키는 맥락에 ‘시간’이 사용되게 허락하지 않았더라면 처음부터 시간을 마치 실체와 같은 시간 자체가 아닌 시간적 사건 또는 존재자로 올바르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앞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탐구를 시간의 ‘무엇임’에서 ‘어떻게 존재함’으로, 마지막으로는 ‘어디에 존재함’으로 시선을 전환함으로써 진전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때 일상언어의 왜곡이 없었더라면 첫 번째 단계인 시간의 ‘무엇임’에 대한 혼란 없이—즉 시간의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논리적 모순에 맞닥뜨림이 없이—논증을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경우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남는 과제란 시간을 제 속에 가지는 실체이자 일상언어로서의 ‘시간’이 실제로 가리키는 바인 시간적 사건 또는 존재자가 외부 세계의 사건 또는 존재자인지, 아니면 영혼 속의 사건 또는 존재자인지를 밝히는 것뿐이다. 이때 외부 세계의 사건 또는 존재자는 과거 또는 미래의 것이 될 경우 존재하지 않음을, 즉 지속할 수 없음을 혼란 없이 알 수 있으므로 시간적 자질을 가지는 실체가 될 수 없음이 드러날 것이다. (“미래가 아직 존재하지 않음을 누가 아니라 하겠는가? [...] 또 과거가 이미 존재하지 않음을 누가 부인하겠는가?(11,28,37)” 여기서 미래와 과거란 미래의 사건 또는 존재자 그리고 과거의 사건 또는 존재자를 뜻한다.) 이어 과거 또는 미래와 관련되어서도 지속해서 존재할 수 있는 영혼 속의 사건 또는 존재자가 그 실체임이 귀류법적인 사고를 통해 어렵지 않게 드러나리라 기대할 수 있다. 이는 시간의 존재에 대해 고민한다고 해서 꼭 그것의 존재론적 근원에 대해서까지 고민해야 하는가, 시간과 시간적 존재자 사이 존재론적 위계를 반드시 고려해야만 시간에 대한 탐구가 진행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 다시 말해 시간적 사건 또는 존재자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취급이 과연 정말 부적절하냐는 의문에 효과적으로 반박하게 해준다. 만일 시간의 존재론적 근원에 대한 고민과 그것이 내포하는 존재론적 위계질서에 대한 고려가 존재했다면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증은 리쾨르가 적절히 표현한 것처럼 “결론내릴 수 없는 되새김질(시간과 이야기 1권, 32)”이 아닌, 보다 직선적으로 결론에 내닫는 논증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두 논증이 같은 결론으로 향한다고 가정할 때, 둘 중에서 불필요한 전제—여기서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게 됨으로써만 존재한다’는 논리적 모순—를 도입시키지 않는 논증의 쪽이 더 좋은 논증이라는 데는 누구나 동의하기 쉬우리라 생각한다. 요컨대 시간의 존재론적 근원에 대한 고민, 그리고 그것이 함축하는 시간의 비실체성에 대한 고민이 있었더라면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증이 보다 개선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시간적 자질인 것으로 밝혀진 후에야 아우구스티누스는 일상언어로서의 ‘시간’이 낳는 왜곡을 암묵적으로 간파한다. “그렇다면 기나긴 미래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미래에 관한 기나긴 기대가 있을 뿐이다. 기다란 과거 시간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과거에 관한 기다란 기억이 있을 뿐이다(11,28,37)”와 같은 문장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가 봉착한 시간 탐구의 어려움은 ‘과거’, ‘현재’, ‘미래’와 같은 말들이 일상적 용례에서 실체로 오해된다는 사실, 즉 일상언어로서의 ‘시간’이 야기하는 왜곡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이 어려움은 역설적이게도 일상적 시간체험에 의지함으로써 ‘시간’이 가리키는 바가 실제로는 의식 작용이라는 사건이거나 그 작용의 대상이라는 존재자가 제 속에 가지는 특정한 자질임을 밝힘으로써 해소된다. 다시 말해 일상적 체험은 시간의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모순을 피해가게 해주는 돌파구인 동시에 그 모순의 원천적 제공자인 것이다. 이때 일상은 더 이상 철학의 빛이기만 하지 않고, 덫이기도 하다. 

 

3. 메타철학적 질문 

 아우구스티누스가 일상언어의 덫에 빠졌다는 이상의 지적은 그의 시간론의 의의를 깎아내리기 위한 비판이라기보다—만일 이 비판이 성립한다면 지나치게 가혹한 것이 될 것이다—철학 자체에 던지는 근본적 질문이다. 철학자 역시 철학자이기 이전에 생활을 가진 인간인 한 일상으로부터 철학을 시작할 수밖에 없고, 앞선 통찰을 받아들인다면 좋은 철학은 마침내 일상과 부합해야 한다. 그런데 일상이 철학의 덫이 될 수 있다면 그 경우 철학은 자신의 발목을 잡는 영역에 남아있어야만 진리의 빛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인가? 철학이 일상에서 출발해, 만일 일상이 사태를 왜곡할 경우 그것을 떠나,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오는 경로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은 시간이라는 특수한 철학적 분야를 둘러싼 질문들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메타철학적 질문까지 우리에게 던져준다. 이제 철학자의 과제는 일상적 체험 가운데 무엇이 철학적 탐구를 방해하고 무엇이 그에 기여하는지 가르는 일이다. 철학자는 철학적 탐구가 일상적인 직관을 오염시키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에조차, 혹시 그 오염이 철학이 아닌 동일한 일상적인 직관 자체로부터 기인하는 것은 아닌지를 매순간 경계하며 검토해야 한다. 

 

4. 참고문헌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성염 역주, 경세원, 2016. 

폴 리쾨르, 『시간과 이야기』, 김한식∙이경래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99. 

Aristotle, Categories and De Interpretatione, translated with notes by J.L. Ackrill, Oxford University Press, 19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