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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요약 및 논평 미셸 푸코, 이상길 옮김, ⟪헤테로토피아⟫, 문학과지성사, 2014 공간에 대한 푸코의 짤막한 사유들을 조각조각 모아놓은 책이다. 작년 9월 나는 절망에 빠져있었고, 절실한 마음으로 서촌에 나가 보안서점에서 구매했는데 이래저래 정신이 없어서 이제 와서야 펼쳐봤다. (한참 니체를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이 가장 적절한 시기라고 느낀 탓도 있다.) 이 책에는 '헤테로토피아', '유토피아적인 몸', 그리고 '헤테로토피아'의 정제된 판본 격인 '다른 공간들' 등이 실려있다. '유토피아적인 몸'은 우리의 몸은 그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인 장소이며, 그곳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모든 유토피아적인 공상이 시작되었다는 선언에서 시작하지만 결국은 몸이 세상의 중심으로서 그 자체가 유토피아라는 안티테제, 그러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프리드리히 니체, 박찬국 옮김, ⟪선악의 저편(Jenseits von Gut und Böse)⟫, 아카넷, 2018 파죽지세의 작가, 성실한 역자, 깔끔한 내지 디자인의 삼박자가 고루 갖춰진 완벽한 철학서. ⟪비극의 탄생⟫의 창의적이지만 장황한 성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감동적이지만 암호와 같은 성질, ⟪우상의 황혼⟫의 가독성 좋지만 산만한 성질, ⟪이 사람을 보라⟫의 재미있지만 난잡한 성질이 ⟪선악의 저편⟫에는 없다. ⟪선악의 저편⟫은 내가 읽어본 니체의 저작 가운데서 가장 명료한 논지와 서술을 갖춘 책이다. 그의 핵심적인 사상들이 직설적인 언어로 표현되어있기 때문에, 비록 1886년이라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저술되었기는 하지만 니체 이전의 철학사에 익숙하기만 하다면 니체 입문서로 제격인..
Oh my love,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2018.4) ⟪화실⟫이란 장편소설을 쓰기 전--제 1회 박상륭 문학상에 호기롭게 응모했다가 심사평도 받지 못하고 탈락했지만, 언젠가 다시 제대로 써내서 세상에 내보일 것이다--그 이야기를 아주 막연하게만 예감하면서 자유롭게 써내려갔던 소품이다. 낙성대역의 바에서 처음으로 마셔봤던 위스키 맛을 열심히 기억하고 있다가, 대학동 고시촌의 어느 카페에서 늦은 저녁시간에 끄적였었다. 영감의 원천이 됐던 노래를 첨부한다. 과거의 내 딱딱한 문체와 유치한 표현들은 지금 봐서는 견딜 수 없다. 그래도 그때 나름의 정취가 담겨있으니 최대한 내버려두었다. www.youtube.com/watch?v=u3QZVdqUidw 밤을 꼬박 새우고도 아직 사라지지 않은 취기를 내 안에서 쫓아내려 몸부림쳤다. 몸부림이라고 해봤자 날 집으로 돌아가게..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한 비판적 단상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에스프레소 콘파냐를 마시는 3가지 방법(2020.5) - 내가 본 몇 편 안 되는 홍콩 영화들에 대한 동경을 담은 소설. 내가 사랑했던 남자들은 나와 빠르게 헤어졌다는 점 외에도 하나의 공통점을 더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작은 방에서 혼자 살아온 지가 오래인 사람들이었다. 그 안에서는 이상하게도 두 극단으로 나뉘었다. 한 쪽은 매일 두 끼 이상을 무조건 집에서 요리를 해먹어 지나치게 성실하다는 느낌마저 들었고, 다른 쪽은 가스레인지를 켜본 적도 없을 정도로 전혀 요리를 하지 않았다. 한 쪽은 또 집을 알뜰살뜰 꾸몄으며 스스로 고른 가구를 들여 그 그림자까지 청소했다. 소품점의 유리창 너머로 예쁜 램프가 보이면 만 원 정도는 지불할 용의가 있는 이들이었다는 뜻이다(그렇게 나는 선인장 모양, 빵 모양, 달 모양 램프 아래서 책을 읽다 낮잠을 자곤 했다)...
체리에 대한 사변(2021.3) 영채의 부모님은 자신의 열 살배기 딸이 ‘체리는 왜 맛있는가’를 며칠씩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녀가 이 사회에 완벽히 무해하고 무용한 사람으로 자라나리라고 예감했다. 그 예감은 결국 들어맞았는데, 두 사람은 그에 안도해야 할지 아니면 안타까워해야 할지에 대해 끝내 합의하지 못했다. 영채의 엄마는 딸이 자신의 주변에 미치는 미미하기 짝이 없는 영향력을 슬픔의 이유로 받아들였다. 한편 영채의 아빠는 같은 것을 평온에 대한 약속, 일종의 보험 같은 것으로 삼고자 노력했다. 그런가 하면 각자의 입장 자체가 약화돼서, 영채의 아빠가 먼저 우리 딸, 이러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살다 죽는 거 아니냐고 안절부절 못해 하기도 했고, 그에 따라 미스 노바디도 나쁘지 않아요 여보, 라고 영채의 엄마가 그를 위..
배수아,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배수아,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난다, 2015. 배수아의 장편소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페이지가 '알타이의 목동처럼'이란 표현을 포함한다는 이유만으로 이 책을 구매했을 때, 나는 내가 이전엔 단 한 번도 여행기를 사서 읽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는 전형적인 여행기가 아닌 것으로 치자.) 직접 여행을 가기 전 실용적인 정보가 담긴 가이드북은 몇 권 구매했었지만, 일반적으로 타인이 여행에 가서 무엇을 느끼는지에 대해 별다른 관심 없이 살아왔던 것 같다. 다만 이번에는 그 타인이 내가 동경하는 작가였을 뿐이다. 그 동경을 계기로 스스로에게 묻게 됐다. 좋은 여행기의 기준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매우 애매하고 역설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믿는다. 좋은 여행기는 독자..
한국성소수자연구회 지음, <무지개는 더 많은 빛깔을 원한다> 한국성소수자연구회 지음, ⟪무지개는 더 많은 빛깔을 원한다⟫, 창작과 비평, 2019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모든 고해성사가 그러하듯 글이 조금 장황해질 것 같다. 나는 시스젠더 이성애자로서 평생을 살아왔다. 내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에 대한 단 한 번의 의심도 없이 어린시절과 사춘기를 통과했다. 꾸밈노동에 대해서도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모두가 맨얼굴로 활보하는 기숙사 학교에서 아이라인을 그리고 등교하곤 했고, 한 번도 화장 경험이 없는 여자아이들 중 화장을 원하는 아이들에게 각종 도구의 종류와 사용법을 '설파'하는 데서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여성에게 요구되는 전형적인 성별 표현의 규범을 외부에서 부과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스스로의 내면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원하고 승인한 것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