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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특별히 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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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실 1장(2018.11) 1. 한가해진 안나는 한가해서 더욱 예민했다. 한가함에도 불구하고 예민한 것이 아니었다. 한가한 때에만 가능한 예민함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를테면 안나는 단골 카페에서 일요일 오후마다 지켜지는 사소한 규칙에 지나친 신경을 쏟았다. 그녀는 3시 10분과 3시 15분 사이에 반드시 양복을 입은 남자 네 명이 카페에 들어오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다리를 잘 꼬는 안나에 비해 그들은 늘 정자세를 유지했다.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으니 옷에도 구김이 없었다. 무더운 날에도 양복차림들을 고수했는데, 등 부분은 마치 갓 다림질되어 매장에 걸린 옷처럼 빳빳했다. 그들이 의자에 앉으면 양복바지의 밑단 네 쌍이 아주 얌전히 말려 올라가 왼쪽과 오른쪽의 발목을 정확히 동일한 크기만큼 드러냈다. 그렇게 드러난 살조차 꼼꼼..
화실 0장(2018.11) 유치하지만 진지했던 스물 네 살 가을의 추억.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완성했던 장편소설. 총 15장까지 있었고, 안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했다는 기억이다. 0. 혼자 공책을 펴는 시간, 그때만큼은 테이블 위의 스탠드 불이 태양보다도 강력하다. 창문에 커튼이 쳐져 자연으로부터의 빛이 차단된 방 안에서, 안나는 얼마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프랑스어를 두 어절쯤 적어보았다. 그 사이 전구의 둥근 몸뚱어리가 눈꺼풀을 향해 인공의 열기를 쏘는 것이 느껴졌다. Je suis 알파벳들은 적히자마자 안나의 머릿속에서 제 음가를 연주했다. 그녀는 그 발음을 생각하면서 문득, 이 말들이 혹시 ‘Jesus’의 오타는 아닐까 하는 농담 같은 진담, 혹은 진담 같은 농담을 꾸며보다가 그만 두었다. 안나의 프..
사랑하지 못하는 자들의 사랑(2020.6) 이하영, ⟪사랑하지 못하는 자들의 사랑⟫, 봄들, 2020 쇼팽의 음악, 그중에서도 야상곡, 특히 No.13을 사랑한다면. I. 본문 발췌 "그녀의 슬픔에 나는 솔직히 안도했다. 엄마가 내게 마음을 쓰고 있긴 했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녀도 나와 비슷한 생각, 자기 때문에 상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는 게 의미심장했다. 우리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보다 강한 죄의식으로 묶여있는 듯했다." 본문, 중에서 "소리는 멀리 있는 음들 사이를 널뛰지 않고, 고음에서 차츰 미끄러져 내려가며 주위를 맴돌았다. 그 오른손의 미끄러짐을 왼손의 셋잇단 음표들이 위태롭게 떠받쳤다. 비슷한 멜로디가 되풀이되면서 내 머릿속에서 흐릿하기만 했던, 이 녹턴에 대한 인상이 또렷한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나는 시력을 잃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