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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이제니,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이제니,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문학과 지성사, 2019, 모든 강조는 필자.

 읽는 데 정말 오래 걸렸다. 이건 시집 전체에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고 시 하나 하나에 대한 이기도 하다. 하나의 시 내에서도 여러 이미지와 메시지가 교차하는, 한 마디로 묵직한, 밀도 높은 시들이었다.

 이제니 시인이 시어들을 수집하고 전시하는 방식은 참 독특하다. 내가 가장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기표들 사이의 유사성에 의존해 기의를 창출시키는 기법이었다. 말소리가 서로 비슷한 단어들을 늘어놓음으로써, 마치 그 표면적인 비슷함 너머로 의미상의 진정한 연관성이 있는 것처럼 문장들을 꾸며내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무수하다. "열리고 열리는 여리고 어린 삶"(21, <빗나가고 빗나가는 빛나는 삶> 중에서)이라든지, "완고한 완만함으로 나아가는 흐름이 있다"(52, <나뭇가지처럼 나아가는 물결로>)라든지, "대답이 있을 때까지 거듭된다. / 대답을 잊을 때까지 거듭난다."(141, <발화연습문장--남방의 연습곡> 중에서)라든지. 이와 같은 서술 방식은 언어의 본질적인 특성 중 하나인 자의성--"언어에서, 소리와 의미의 관계가 사회적 약속에 의하여 임의적으로 이루어지는 특성"(표준국어대사전)--을 의도적으로 위반한다. 나는 이 위반이 다음의 세 가지 의도 중 하나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고 읽었다. 아마 우울감을 이겨내려 애쓰고 있는 지금의 내 정신상태가 투영된 해석이겠지만.

 1. 소외: 기존의 의미들이 나를 저버렸다. 또는 내가 기존의 의미들을 빌려 쓸 자격을 상실했다. 나는 이처럼 현존하는 기의의 세계로부터 소외되었으므로, 언어의 자의성으로 인해 기의의 세계와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기표의 세계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2. 망각: 현존하는 기의의 세계가 강요하는 법칙들을 준수하는 방식으로 의미에서 의미로 전진하는 방법을 나는 망각했다. 나는 이토록 망가졌지만, 그럼에도 울부짖어야 할 내용이 있고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이 날것의 욕망은 기표의 세계 외에 의지할 곳이 없다.

 3. 혁신: 나는 기존의 의미들을 사용할 자격도 유지하고 있고, 현존하는 기의의 세계가 강요하는 법칙들을 준수하는 방식으로 의미에서 의미로 전진하는 방법도 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존의 의미 체계를 통해서는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전적으로 혁신적인 '발화 연습'을 거쳐야만 하고, 이 연습의 도구는 곧 기표, 말소리 자체다.

 어느 입장을 취하든지 간에 전제는 같다. 이 시인에게는 각 낱말의 소위 정신적, 문화적 의미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녀에게 말은 잠재적 물질과 같다. 여러 단어를 함께 말할 때 물 흐르듯 말해지는지, 아니면 금속들이 부딪치듯 충돌하는지가 문젯거리다. 말과 말이 만나 창발되는 물성에, 시인이 아닌 사람들은 잘 주목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인의 눈에는 "무관한 단어들 속에서 사물의 이름과 존재의 환영이 자리를 뒤바꾼다."(51, <안개 속을 걸어가면 밤이 우리를 이끌었고> 중에서.)

 마지막으로 그저 주관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읽는 내내 몽롱했고, 자주 슬펐지만 끝에 가서는 꼭 희망과 닮은 무언가를 선물 받았다. 예를 들면 "다시 태어나지 않고도 다시 살아갈 수 있습니다"(57, <꿈과 현실의 경계로부터 물러났고> 중에서), "다가가면 사라지는 경사와 굴곡이 있습니다"(84, <풀을 떠나며> 중에서), "한 번도 살지 않았으니 이제부터 살아도 좋지 않을까요."(101, <꿈과 꼬리> 중에서)와 같은 말들을. 희망을 에둘러 말하는 방식이 무수하다는 이 시집의 제안으로부터, 희망 자체 또한 무수하다는 결론을 도출해도 괜찮을까? 타당하지 않은 논증임을 알지만, 문학의 세계는 비논리를 어려움 없이 끌어안는다. 저곳에서 불가능은 없다. 내가 언젠가 자기애를 되찾아서, 저곳을 이곳이라 부를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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