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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지 못하는 자들의 사랑(2020.6) 이하영, ⟪사랑하지 못하는 자들의 사랑⟫, 봄들, 2020 쇼팽의 음악, 그중에서도 야상곡, 특히 No.13을 사랑한다면. I. 본문 발췌 "그녀의 슬픔에 나는 솔직히 안도했다. 엄마가 내게 마음을 쓰고 있긴 했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녀도 나와 비슷한 생각, 자기 때문에 상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는 게 의미심장했다. 우리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보다 강한 죄의식으로 묶여있는 듯했다." 본문, 중에서 "소리는 멀리 있는 음들 사이를 널뛰지 않고, 고음에서 차츰 미끄러져 내려가며 주위를 맴돌았다. 그 오른손의 미끄러짐을 왼손의 셋잇단 음표들이 위태롭게 떠받쳤다. 비슷한 멜로디가 되풀이되면서 내 머릿속에서 흐릿하기만 했던, 이 녹턴에 대한 인상이 또렷한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나는 시력을 잃어..
20210411 호캉스 친언니와 함께 호캉스를 다녀왔다. 오랜만에 활자중독 상태로부터 벗어나 로비의 예쁜 꽃도 보고, 커피와 음식, 논알콜 칵테일을 즐기는 등 오롯이 감각적인 시간을 보냈다. 커피는 '로즈 프롬 비엔나'라는 이름의 장미 크림이 올라간 아인슈패너를, 저녁은 탕수육과 설탕 입힌 바나나가 인상 깊었던 중식 코스 요리, 밤에는 밤 맛이 나는 깔루아 밀크 비슷한 것을 마셨다. 언니와 나 모두 술을 못 마셔서 논알콜로 부탁드렸는데, 즉흥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요구를 눈앞에서 바로 들어주셔서 바텐더 님의 노련함에 감탄했다. 게다가 바쁘신 와중에 서비스로 마지막 사진에 나온 파인애플 베이스의 칵테일을 하나 더 만들어주셨다. 죄송하고 머쓱한 만큼 너무나 감사했다. 실은 너무 바빠 보이셔서, 원래 손을 저렇게나 빨리 움직여야 ..
20210410 내게 쓰는 일의 의미? 상담 선생님께서 글 쓰는 일이 두려울 때면 어째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이 나에게 소중한지 곱씹어보라고 하셨다. 그러고 보니 나는 늘 단지 본능적이고, 따라서 기계적으로 '소설이 좋아, 쓰는 게 좋아'라고만 되풀이했을 뿐, 이 기호를 정초하거나 근거 짓기 위해 고민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런 고민이 없었기 때문에 소설을 생각하면 심지가 굳어지기는커녕 비관주의가 앞서고, 열정이 차오르기보다 가슴이 아프기만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부터라도 내가 왜 쓰는지, 왜 써야만 하는지, 손목이 영구적으로 손상될 것을 걱정하고, 불특정 다수 앞에서 이름을 내거는 공인이 된다는 것을 감수하고, 무한한 독해 가능성을 품을 내 글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무감 가운데서조차 어째서 쓸 것..
이탈로 칼비노, <반쪼가리 자작> 이탈로 칼비노, 이현경 옮김, ⟪반쪼가리 자작⟫, 민음사, 2014 (표지 디자인이 완벽하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의 원숙함은 아직 엿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칼비노의 젊음 그리고 좌파 지식인으로서의 정치적 고뇌와 연결지어 생각할 경우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수작이다. ⟪반쪼가리 자작⟫은 시작부터 풍자로 가득한 어른용 동화다. 사춘기의 문턱에 다가선 어느 소년의 시선에서 그가 속해있는 테랄바 가문의 자작의 굴곡진--문자 그대로 반토막난--생을 담고 있다. 메다르도 자작은 전쟁에 대한 별다른 두려움도 없이 호기롭게 십자군들의 전장에 나갔다가 정면으로 대포를 맞고는 몸의 반쪽을 잃는다. 반쪼가리가 된 자작은 공교롭게도 마치 하이드처럼 인간의 악만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의 본성을 따라 자작은..
페터 한트케, <어느 작가의 오후> 페터 한트케, 홍성광 옮김, ⟪어느 작가의 오후⟫, 열린 책들, 2010 '작가'라는 직업에 로망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가진 로망은, 모든 로망이 그렇듯 키치하지만 다음과 같다. 작가는 여유롭게 늦잠을 잔 뒤, 옥색의 커튼 사이로 서서히 드세지기를 준비하는 햇빛을 느끼며 하루의 첫 숨을 고른다. 기지개를 편 뒤 침실을 나서면 부엌에서는 이미 함께 사는 동료 작가, 또는 동료 철학자, 또는 애인이 아침 겸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나는 오전엔 식욕이 왕성한 편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먹는 부어스트를 한 덩이 그리고 오렌지를 두 슬라이스 뺏어먹는 것으로 만족한다. 잘근잘근 먹을 것을 씹으며 나는 주위를 둘러본다. 좁지만 아늑한 공간에 가구들이 정확히 자신들이 있어야 할 곳에 안정감 있게 붙박..
20210325 가위 돌리던 아이 9시 40분 셔틀버스를 타고 학교를 나왔는데, 술집의 영업이 끝나는 시점과 겹쳐서 그런지 2호선도, 3호선도 지하철이 만원이었다. 이곳저곳을 조심스레 비집고 다니다가 운 좋게 자리를 잡았다. 가방 끈을 풀고, 어깨 위의 무게감이 갑자기 줄어든 데 안도하고 있는데 지하철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딱 들어도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자신은 신입 차장인데, 구파발행 열차를 몰 때마다 대화행 열차가 아니어서 실망하는 고객님들을 스쳐지나간다고. 그 분들을 생각하면 죄송스럽다고. 그래서 대화행 열차가 더 많이 운행될 수 있도록 자기가 힘 닿는 데까지 노력하겠다고. 그에게 직접적으로는 아무것도 해준 게 없음이 거의 분명한데도, 손님들께 늘 감사드린다고. 단어가 하나하나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강 이런 이..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G.H.에 따른 수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배수아 옮김, ⟪G.H.에 따른 수난⟫, 봄날의 책, 2020 '장편은 서사, 단편은 인물'을 무의식중에 공식처럼 생각하며 지냈던 것 같다. 손보미 소설가의 단편이 서사와 서스펜스로 넘쳐나고, 오정희 소설가의 (하나뿐이었던) 장편이 인물을 중심으로 돌아간 것을 어쩌면 의도적으로 망각한 채로. 그런데 ⟪G.H.에 따른 수난⟫은 저 공식을 파괴하는 것을 넘어 처음부터 없었던 것마냥 무화시킨다. ⟪G.H.에 따른 수난⟫에는 서사랄 것이 없다. 가정부가 자신 몰래 치운, 자기 집에 속한 방에서 바퀴벌레와 마주하는 것, 그 바퀴벌레를 죽이는 것, 그리고 벌레의 사체에서 배어나온 하얀 체액을 섭취하는 것이 240쪽 남짓 되는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전부다. 그렇다고 해서 인물의 성격이나 ..
김성중, <이슬라> 김성중, ⟪이슬라⟫, 현대문학, 2018 수려한 한국어로 된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는 기분이었다. 학교로 가는 지하철에서부터 읽기 시작해, 결국 해야 하는 과제들을 제쳐두고 하루만에 끝까지 읽어내고 말았다. 그만큼 이야기가 나를 매료시켰고 몰입도가 강했다. 몇 달만에 집어든, 그만큼 마음을 굳게 다진 뒤에 꺼내든 한국 소설이었는데, 용기를 내길 정말 잘했다고 느낀다. 김성중 소설가의 작품은 사실 단편소설 '쿠문'과 '정상인'을 읽어본 것이 전부였다. 그 둘은 너무 다른 내용과 주제의식을 담고 있었기에 이 작가가 소화할 수 있는 이야기의 스펙트럼은 어디까지인가, 불현듯 놀랐던 기억이 있다. 젊은 나이 탓인지 내 마음에 더 든 쪽은 환상적 요소가 강했던 '쿠문'이었는데, ⟪이슬라⟫는 감사하게도(?) '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