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창작물

(11)
커피하우스가 타버리고 남은 재(2021.7) https://knower2020.com/forum/view/564861에서 전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커피하우스가 타버리고 남은 재 커피하우스가 타버리고 남은 재 7월의 비엔나는 마음이 부풀은 관광객들에게조차 역겨울 정도로 더웠다. 그들은 미술사 박물관 앞에서 한 마리의 굵은 ... knower2020.com 7월의 비엔나는 마음이 부풀은 관광객들에게조차 역겨울 정도로 더웠다. 그들은 미술사 박물관 앞에서 한 마리의 굵은 뱀이 되어 줄을 서있었다. 공교롭게도 모두가 노랑이나 갈색, 올리브색의 상의를 입고 있었으므로 그냥 뱀도 아닌 구렁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것의 비늘은 폭염을 견딜 만큼 두껍지 않았고 그늘 또한 구시가지의 악명대로 존재하지 않았다. 햇빛이 잔인할 정도로 공평하게, 박물관 앞의 가..
즉흥 글 1 (2021.9) 20210904 16:12~18:09 누가 보면 내 일상은 휴가 같아 보일 수 있다. 나는 이르면 열두 시, 늦으면 두 시에 하루의 첫 눈을 뜬다. 이른 아침 해가 뜰듯 말듯 하는 모습을 못 본 지는 매우 오래되었다. 언제나 태양이 가장 강렬할 때에, 커튼이 쳐진 방 안으로까지 침투해오는 그 존재감을 온몸으로 애달프게 받아들이고 나서야 비로소 몸을 일으키는 것이다. 뭉친 어깨를 주무르면서 부엌으로 나가면 전날 밤 썰어둔 계절 과일이 락앤락 속에 담겨있다. 나는 체리나 사과를 집어먹거나 복숭아 따위가 썰린 것을 한 입 베어물고 씹을 때마다 한 꺼풀씩 옷을 벗는다. 과일을 삼킬 때즈음 나는 샤워 부스 안에 서 있다. 샴푸에서는 제비꽃 냄새가, 바디워시에서는 라벤더 냄새가 난다. 아닌가, 라벤더가 아니라 라일..
제지기오름(2021.8) 제지기오름 바닷소리의 데시벨에 맞서 해발 구십 미터 남짓의 작은 오름 엄마 아빠 손을 붙잡고 아니 사실 그럴 나이는 훨씬 지나서 그저 일직선으로 성질 급한 아빠와 허리 아픈 엄마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든 조절해보며 오른다 바닥엔 세잎클로버 무리와 이름 모를 풀, 목재 계단 투박하게 이따금 새똥 짓궂게 그리고 나팔 악대처럼 모여있는 취나물 사이에서 올 여름 첫 모기들을 만난다 허벅지 위 융기한 붉은 오름 정상에서의 파노라마 땀에 젖은 바다를 내려다보고 다리 한두 번 긁적여본 뒤 두리번거리면 나무에 걸린 책갈피 독실한 누가 남기고 갔는지 신이 죽음의 짐을 내려놓게 해준단다 고개를 떨궈 솔방울로 축구를 한다 제지기오름의 어원이라던 어느 젊었을 절지기와 함께 그러나 산 자의 패스는 차마 죽은 자에게 닿지 못하고 ..
소마와 프시케(2018.3) 서양고대철학 수업시간의 망상에서 시작해 공모전에 응모도 했지만 탈락했던 이야기. 심사평이라도 받을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무튼 퇴고를 굉장히 오래 거쳤었다는 기억이 남아있다. 사람이 없이 텅 빈 해변. 나와 영미가 그 위에 드러누운 채로 있다. 가까이서 파도가 철썩이지만 물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백사장 곳곳에 박힌 소라껍질도 표면이 너무 고운 나머지 인공의 것으로 여겨진다. 무엇보다 여기서는 영미가 제 아무리 몸을 움직여도, 혹은 움직임을 당해도 피부에 모래 한 알 달라붙지 않는다. 이튿날은 아늑한 오두막이다. 이 오두막에도 수상한 구석이 있다. 가까이서 난롯불이 타오르는데도 내 맨살은 뜨거워질 줄을 모른다. 벌겋게 색이 달아오를 리도 없으니 근심을 던 채, 그저 영미에게 가까워졌다가 물러나기..
작은 바울(2018.5) 가장 아끼는 소설들 중 하나. '나는 나의 작품의 피조물이다'라는 유치하고도 진지한 필명으로 내놓았던 독립출판물에 실려있다. https://smartstore.naver.com/gaga77page/products/4465350296 [2차 입고] 나작피,정수지 - 불 : gaga77page [gaga77page] 독립책방카페 gaga77page [ 입고문의 | gaga77page@naver.com ] smartstore.naver.com 정류장 가까이에 음식물 쓰레기봉투들이 나뒹군다. 냄새가 고약하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셔츠 소매로 코를 막으려던 순간, 비둘기 한 마리가 시야의 구석에 등장한다. 비둘기는 뒤뚱거리면서 주황색 봉지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다가간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일어서지 못하는 오뚝..
진리의 짧은 자서전(2017.2) 처음 습작을 시작했던 시절에 끄적였던 글들 중 그나마 완성도가 높았던 아이다. 여러 모로 부족하지만 부족한 대로 약간의 수정만 거쳐 아카이빙해둔다. 2017년 2월이라니 4년도 더 전인데, 글재주는 부족했어도 열정만큼은 무모할 정도로 컸었어서 오히려 그리운 느낌도 있다. 나는 글재주의 기준에선 얼마나 발전했을까. 열정의 기준에서는 얼마나 깊어졌을까. 스물넷에서 스물일곱이 되는 사이, 무엇을 잃고, 대신 무엇을 소화했을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중간에 내가 소설 쓰기를 진심으로 포기했었다는 사실이다. 이 문장을 대단한 과거형으로 쓸 수 있어 다행이다. 유년기 스스로 돌이켜본 나의 어린 시절은 토막나 있다. 7살 이전의 기억은 가물가물하다는 말도 부적절할 정도로 무에 가깝다. 그래서 나란 역사의 초창기는 ..
Oh my love,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2018.4) ⟪화실⟫이란 장편소설을 쓰기 전--제 1회 박상륭 문학상에 호기롭게 응모했다가 심사평도 받지 못하고 탈락했지만, 언젠가 다시 제대로 써내서 세상에 내보일 것이다--그 이야기를 아주 막연하게만 예감하면서 자유롭게 써내려갔던 소품이다. 낙성대역의 바에서 처음으로 마셔봤던 위스키 맛을 열심히 기억하고 있다가, 대학동 고시촌의 어느 카페에서 늦은 저녁시간에 끄적였었다. 영감의 원천이 됐던 노래를 첨부한다. 과거의 내 딱딱한 문체와 유치한 표현들은 지금 봐서는 견딜 수 없다. 그래도 그때 나름의 정취가 담겨있으니 최대한 내버려두었다. www.youtube.com/watch?v=u3QZVdqUidw 밤을 꼬박 새우고도 아직 사라지지 않은 취기를 내 안에서 쫓아내려 몸부림쳤다. 몸부림이라고 해봤자 날 집으로 돌아가게..
에스프레소 콘파냐를 마시는 3가지 방법(2020.5) - 내가 본 몇 편 안 되는 홍콩 영화들에 대한 동경을 담은 소설. 내가 사랑했던 남자들은 나와 빠르게 헤어졌다는 점 외에도 하나의 공통점을 더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작은 방에서 혼자 살아온 지가 오래인 사람들이었다. 그 안에서는 이상하게도 두 극단으로 나뉘었다. 한 쪽은 매일 두 끼 이상을 무조건 집에서 요리를 해먹어 지나치게 성실하다는 느낌마저 들었고, 다른 쪽은 가스레인지를 켜본 적도 없을 정도로 전혀 요리를 하지 않았다. 한 쪽은 또 집을 알뜰살뜰 꾸몄으며 스스로 고른 가구를 들여 그 그림자까지 청소했다. 소품점의 유리창 너머로 예쁜 램프가 보이면 만 원 정도는 지불할 용의가 있는 이들이었다는 뜻이다(그렇게 나는 선인장 모양, 빵 모양, 달 모양 램프 아래서 책을 읽다 낮잠을 자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