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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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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파르테논은 그녀 자신이다(2025.2.17)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있지 않다. 쥐는 있다. 티끌은 있다. 유령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유령은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신도 있다. 신조차 있다. 너도 있다. 너는 당연히 있다. 너를 내가 말하기 때문이다. 그치만 내가 입을 열기 전에도 너는 이미 있다. 너는 있었고, 있으며,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있지 않다. 없는 것은 아니다. 있지 않을 뿐이다. 없지는 않다. 없다면, 아예 없다면 나는 너를, 너는 나를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있지 않다. 있기는 너무 어렵다. 너는 쉽게 있는다. 사람들은 쉽게 있다. 대부분 그렇다. 사람이란 개념도, 조금 어렵게이기는 하지만, 있다. 나만 있지 않다. 어떻게 하면 있을 수 있을까? 너에게 묻는다. 어떻게 하면 있을 수 있어? 너는 ..
음산한 땅(2024.8) 동쪽 나라의 사람들에게 서역 크라메타는 음산한 땅이었다. 아득한 국경 너머로는 여행은커녕 통행도 금지되어있었기에, 누군가는 그곳을 오아시스 하나 없는 사막으로, 누군가는 대륙의 모든 썩은 물이 모여 고이는 늪으로 상상했다. 확실하게 알려진 단 한 가지는 그곳에도 사람이 산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이 넓은 대륙에 고대로부터 줄곧 살아온 원주민이. 기록된 역사에 따르면 원주민들은 본래 대륙 동녘의 비옥한 땅에 살았으나, 농사를 지을 줄 알면서도 식인 풍습을 즐기고 글자를 몰랐으며 쌀과 함께 흙을 집어먹었다. 어린이마저 온몸을 문신으로 뒤덮고 있는 야만인 무리를, 바다를 건너온 왕가의 선조들이 몰아낸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천 년 전 일이었다. 여전히 문명이 있을 리 만무한, 현재 그들의 삶의 모습과 터전을 직..
빛의 무게(2023.8) 그르체크로 가는 열차 안에서 저는 미국 시를 읽고 있었습니다. 다른 승객들이 듣지 못할 정도로만 소리를 내서 말입니다. 영어를 잘하지 못해 절반 정도만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감각을 즐겁게 해준 것은 알아듣지 못한 나머지 절반이었습니다. 뜻을 모르는 단어들이 맞추는 각운에 저는 머리가 아플 정도로 황홀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알아들을 수 있었던 행들이 감동을 못 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합니까(So how should I presume)?’ 가장 눈에 밟혔던 구절이어서, 되풀이해서 중얼거렸는데, 흥분했는지 말소리가 너무 커진 모양이었습니다. 옆에서 졸고 있던 승객이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는 공교롭게도 영국인이었습니다. 영국인은 다행히 왜 사람을 잠에서 깨우..
마론은 이따금 스스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낀다(2024.7) 마론은 어제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 햇님에게서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마론 네가 무해해서 참 좋아. 그렇게 말하고서 햇님은 수줍게 웃어보였다. 칭찬이었다는 뜻이다. 그것도 깊은 선의로부터 우러나온. 물론 햇님이 그 이상의 말을 아꼈기에 어떤 의도가 더 숨어있는지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아는 마론으로서는 햇님의 말이 순수한 호의의 표현, 심지어는 꽤나 까다로운 인정의 발부임을 알았다. 다만 정확히 무엇의 인정이었는지가 아리송했을 뿐이다. 마론의 모국어는 한국말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국어의 '무해하다'에 의미상으로도, 구조적으로도 대응되는 단어가 존재하기는 했다. 하지만 마론의 고향 사람들은 그 단어를 사람에게 쓰지 않았다. 보통 그 단어가 붙는 것은 질병이나 약품, 야생동물 같은 것이었다..
미완 - 부쉬 드 노엘(2021.2) 부쉬 드 노엘"이와 관련해서, 추측하건대, 우리들 중 대부분은 우리에게 무엇이 쾌감과 고통을 가져다주는지 퍽 감을 못 잡는 것 같다. 당신은 정말 크리스마스를 즐기는가?" (Eric Schwitzgebel, The Unreliability of Naive Introspection, The Philosophical Review, Vol. 117, No. 2, 2008, p. 250) 사랑은 과자 같은 것이다. 바삭하거나 달콤하다. 그리고 없이 살 수 있다, 라고 썼다. 그리고는 가슴을 네 번 쓸어내렸다. 연구실에서 지선은 문득 자신이 살아가는 방법을 까먹어버렸다고 털어놨다. 천천히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저 한순간에 바보가 된 것마냥, 갑자기 까먹어버렸다고. 그녀는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최근 보라색으로 염..
바다 망령의 숨(2022.4)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사생활(2023.6) 방 안으로 그가 들어왔다. 문을 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창문까지 활짝 열었다. 하나도 아니고 두 개의 창문을 열었다. 그는 두 개의 벽을 차지하고 소설과 철학서로 가득한 서가로 손을 뻗었다. 책 대신 꺼내든 것은 인센스. 곽에는 절 향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는 세속을 초월하는 것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 향을 가장 좋아했다. 어쩌면 세속과 초월 사이에 구분선이 없다고, 그렇게 믿는지도 몰랐다. 어차피 그는 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각하며 일상을 살았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시공으로부터 넘어와 서울을 초토화시키는 고지라. 그는 종종 전후 일본에서 나온 영화를 보러 영상자료원이나 아트 시네마를 찾았다. 본드 스트리트에서 꽃을 사는 클러리서 댈러웨이. 버지니아 울프를 그는 언제나 감..
인물 스케치: 온마루(2023.5) 마루는 쾰른의 밤거리를 배회한다. 타국의 골목길은 아무리 익숙해지고 싶어도 언제나 낯설기만 한 미로이다. 만날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마루는 실시간으로 데이팅 어플을 들여다보며 마찬가지로 근처를 배회하는 여자들을 찾고 있다. 딱히 비극적이지도, 희극적이지도 않은 그 모습이 매사에 진지한 마루에게만큼은 희랍의 비극인 양, 동시에 끔찍한 희극인 양 느껴진다. 자신은 냉정하기 그지없어야 할 플라톤의 아들인데 욕망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음이 비극이다. 그리고 그 욕망이 고작 성욕이라는 점이 희극이다. 마루의 핸드폰에 진동이 울린다. 몇 분 전 추파를 던져봤던 여자에게서 답장이 왔다. 그녀는 세 블럭 정도밖에 떨어져있지 않은 바에 있다. 마루는 그리로 걸음을 재촉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