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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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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누벨 마리(2022.9)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석류인간(2022.8)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비 오는 날, 생의 조각들(2017.5) 2017년이면 내가 학부 4학년을 통과하고 있었을 때구나. 본격적으로 습작을 시작하면서 꿈을 키웠던 시절의 단편. '모리돈부리'라는 덮밥집에서 사케동을 먹으면서 구상했던 기억이 난다. 언어에 대한 감각, 이를테면 콤마를 어디에 찍는 것이 심미적일지에 대한 관점이 지금과 달라 신기하다. 미국에 머물고 있는 동안 올리는 게 적합해 보인다. 하늘은 남색이고 육지는 따분하다. 미국 중서부의 어느 대형슈퍼마켓에서 사람들은 이전부터 셀 수 없이 사온 물건을 또 쥐고 또 담고 하고 있었다. 일주일 전, 일년 전과 마찬가지로 햄과 감자칩과 사과 알이 사람들의 봉지 속에서 등을 동그랗게 만 채로 웅크렸다. 계산대 앞의 캐시어는 표정도 없이 똑같은 행위를 몇백 번째 반복했다. 마트 옆의 1층짜리 상가건물도 따분하기는 매한..
바다 망령의 숨(2022.4)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화실 1장(2018.11) 1. 한가해진 안나는 한가해서 더욱 예민했다. 한가함에도 불구하고 예민한 것이 아니었다. 한가한 때에만 가능한 예민함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를테면 안나는 단골 카페에서 일요일 오후마다 지켜지는 사소한 규칙에 지나친 신경을 쏟았다. 그녀는 3시 10분과 3시 15분 사이에 반드시 양복을 입은 남자 네 명이 카페에 들어오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다리를 잘 꼬는 안나에 비해 그들은 늘 정자세를 유지했다.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으니 옷에도 구김이 없었다. 무더운 날에도 양복차림들을 고수했는데, 등 부분은 마치 갓 다림질되어 매장에 걸린 옷처럼 빳빳했다. 그들이 의자에 앉으면 양복바지의 밑단 네 쌍이 아주 얌전히 말려 올라가 왼쪽과 오른쪽의 발목을 정확히 동일한 크기만큼 드러냈다. 그렇게 드러난 살조차 꼼꼼..
화실 0장(2018.11) 유치하지만 진지했던 스물 네 살 가을의 추억.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완성했던 장편소설. 총 15장까지 있었고, 안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했다는 기억이다. 0. 혼자 공책을 펴는 시간, 그때만큼은 테이블 위의 스탠드 불이 태양보다도 강력하다. 창문에 커튼이 쳐져 자연으로부터의 빛이 차단된 방 안에서, 안나는 얼마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프랑스어를 두 어절쯤 적어보았다. 그 사이 전구의 둥근 몸뚱어리가 눈꺼풀을 향해 인공의 열기를 쏘는 것이 느껴졌다. Je suis 알파벳들은 적히자마자 안나의 머릿속에서 제 음가를 연주했다. 그녀는 그 발음을 생각하면서 문득, 이 말들이 혹시 ‘Jesus’의 오타는 아닐까 하는 농담 같은 진담, 혹은 진담 같은 농담을 꾸며보다가 그만 두었다. 안나의 프..
미완 - 사과로부터의 푸른 빛(2022.2) 앙리 르 시다네르의 그림들은 견고해 보이는 우리네 세계가 실은 언제나 미세하고 부드럽게 진동하고 있으며, 매 순간 예측할 수 없는 색깔의 빛을 입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세계에 대해 고정불변하게 타당할 인식을 찾고자 한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아름다움까지 훼손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식은 일종의 반달리즘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처음에는 인식의 효용에 대한 강박적인 기대와 그것의 덧없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야기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인물이 메시지를 육화하지 못하고 단지 예시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상이 조금이라도 배어있는 소설을 쓰고 싶은 사람이 맞닥뜨릴 수 있는 가장 흔하고 치명적인 실수가 아닌가 생각한다. I 오빠가 정성스럽게 피드백을 해줬음에도 불..
도도는 도도도도 / 비평가들(2022.1) (1) 회사에서 도도의 별명은 ‘도도는 도도도도’였다. 도도에게 일을 시키면 도도가 도도도도, 눈알을 잽싸게 굴리고 빠르게 타자를 쳐서 도도도도 프린터로 달려가 다시 도도도도, 서류가 필요했던 사람에게 전달했기 때문이다. 또는 도도가 도도도도, 전화를 걸거나 외근을 나가 볼일을 보고 잠시 커피를 마시는 요령도 없이 도도도도, 회사로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도도는 후배도 없는 유일한 말단사원에 불과했고, 입사 후 3년이 지나도 그 점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능력 있고 성실한 데 있어서는 그녀의 상사들보다 배로 나았다. 아무리 규모가 작다고 해도 도도 없이는 회사 전체가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그들은 게을렀으며, 일은 자꾸만 위에서 아래로 끝내는 뿌리의 밑동인 도도에게로 내려왔다. 도도는 혼나지도 않았다.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