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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1> 요약(2021.1 1차 수정)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순수이성비판 1>, 아카넷, 2012

머리말

[A] 인간은 자연본성에 따라 신, 자유, 불멸하는 영혼 등에 대한 형이상학적 인식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물음에 대해 성공적으로 답변해내는 것은 그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어서, 이로부터 운명적인 "괴롭힘"을 당해왔다.(AVII) 종래의 형이상학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검토하지 않은 교조주의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교조주의는 회의주의 또는 경험주의를 거쳐서도 견고하게 자리를 지키다 칸트의 당대에는 무차별주의--형이상학적 인식에 대한 일종의 무관심--가 퍼지게 되었다. 칸트는 자기 시대의 무차별주의를 "경솔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사이비 지식에 자신을 내맡기지는 않으려는 시대의 성숙한 판단력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진단한다.(AXI)

 이제 새롭고 진정한 형이상학은 교조주의가 간과한 이성 비판의 작업을 수행한 뒤에야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이성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인식과 할 수 없는 인식("근거 없는 월권")을 구분한 뒤 전자--"정당한 주장을 펴는 이성"--은 보호하고 후자는 거절하는 자기인식 작업이 곧 순수이성비판이다.(AXI) 이 비판이 '순수한' 이성에 대한 비판인 이유는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립해서 추구함직한 모든 인식과 관련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AXII) 비판의 목표는 형이상학의 가능성 그리고 원천, 범위, 그리고 한계를 규정하는 것이며, 비판에는 확실성(선험적 필연성)과 분명성(논변과 관련하여, 직관[적 사례]와 관련하여)이 요구된다. 이때 칸트는 우상을 제거하고자 했던 베이컨처럼 "[이성이 할 수 없는 인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해에서 생긴 환영을 제거"하는 것, 착오의 뿌리를 잘라내는 것을 철학의 의무로 생각한다(cf. BXXXI).(AXIII)

 칸트는 자신의 비판이 지닐 포괄성과 타당성에 대해 매우 낙관적이다.* 그는 "이성이 전적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출하는 것은 숨겨져 있을 수 없"기에 "여기에서 누락된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며, 또한 순수한 인식은 "완전한 통일성"을 가지기에 "절대적인 완벽성을 가능하게 할 뿐만이 아니라, 필연적이게 한다"고 확신한다.(AXX) 이러한 신뢰가 칸트로 하여금 그의 논리학--사고의 형식에 대한 학--그리고 그에 의해 예비되는 형이상학, 나아가 철학 일반이 수학 및 물리학이 가지는 것과 같은 높은 수준의 타당성을 가진다고 믿게 해준다.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탐구해야 할 과제는 "지성과 이성이 일체의 경험을 벗어나서 무엇을 얼마만큼 인식할 수 있는가"이다.(AXVII)

*이 낙관성의 원천은 비판 대상의 순수성, 즉 "경험의 어떤 것도 또는 일정한 경험을 낳은 어떤 특수한 직관도 이것을 확장하고 증대시키는 데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성격이다.(AXX)

 Q. 순수이성 및 선험적 인식의 '통일성' 또는 '유기성'이 칸트에게 왜 중요한가? 그 통일/유기성은 어떻게 보장되는가? 왜 그러한가? cf) BXXIII, BXXXVIII

 A. 세계의 체계성에 대한 믿음, 철학이 체계적이어야 한다는 동기/순수이성이 분열돼있으면 자기인식이 투명하지 않을 것.

[B] 이성에 대한 탐구 역시 수학과 물리학--각각 수학적 대상과 물리학적 대상을 "선험적으로 규정(BX)"한다--과 마찬가지로 "학문의 안전한 길"을 걸을 수 있고, 또 걸어야 한다.(BVII) 예컨대 이성에 대한 탐구에 속하는 논리학은 "모든 사고--그것이 선험적이든 경험적이든, 어떤 근원이나 대상을 갖든 말든, 우리 마음 안에서 우연적인 또는 본성적인 방해에 부딪히든 말든--의 형식적 규칙들을 상세히 서술하고 엄밀하게 증명하는, 바로 그런 학문"으로서, "순전히 그것의 제한성 덕택"에 성공할 수 있었다. "논리학에서 지성Verstand은 자기 자신, 곧 자기의 형식 이외엔 어떤 것도 다루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아닌 대상들을 취급하는 다른 모든 객관적 학문보다 쉽게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논리학은 단지 일종의 예비학으로서, "지식의 평가를 위해서 [...] 전제되기는 하지만, 지식의 획득은 [...] 객관적인 학문들"에서만 비로소 가능하다.(BIX, 강조는 필자) (이와 같은 학 역시 이성에 의해 수행되는 한에서 선험적 인식을 포함하는데, 대상의 개념을 규정하는 이론적 인식과 대상을 현실화하는--실질적 행위를 수행하는--실천적 인식으로 나뉜다.)

 논리학뿐 아니라 수학과 물리학 역시 있는 그대로의 대상이 아닌, 인간의 기획에 따라 산출된 대상(공리를 따르는 대상, 실험의 조건을 따르는 대상)을 탐구함으로써 학문의 안전한 길을 찾는 데 성공했다. 여기서 칸트는 "우리는 곧 사물로부터 우리 자신이 그것들 안에 집어 넣은 것만을 선험적으로 인식한다(BXVIII)"고 천명한다. "어떤 것을 안전하게 선험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사물에다가 그의 개념에 맞춰 그가 그 사물 안에 스스로 집어 넣었던 것으로부터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덧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BXII, 강조는 필자 "사고방식의 혁명")

 한편 "경험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완전히 격리된 사변적 이성 인식"인 형이상학은 수학과 물리학이 누린 안전성을 확보하지 못했다.(BXIV) 오히려 종래의 형이상학은 그 어떤 진리도 확립하지 못한 싸움터에 가까웠다. 칸트는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즉 형이상학 또한 선험적이고 필연적인 인식을 확보하기 위해 수학과 물리학을 모방해 "우리의 인식은 대상들을 따라야 한다고 가정"했던 이제까지의 사고방식을 탈피해 "대상들이 우리의 인식을 따라야 한다고 가정"하자고 주장한다(BXVI). 이처럼 우리의 인식이 대상들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우리 인식 능력의 성질을 따를 때에야 비로소 형이상학의 대상들--신, 불멸하는 영혼, 자유처럼 "순전히 이성에 의해 그것도 필연적으로 생각되지만, 결코 경험에 주어질 수 없는 그런 대상들(BXVIII)"--에 대해서도 선험적이고 필연적인 인식, 곧 안전한 인식이 가능해질 수 있다.

 그런데 형이상학은 그 본질상 우리의 인식 능력이 "가능한 경험의 한계를 넘어갈" 것을 요구한다.(BXIX) 그와 같은 한계 너머의 무조건자(das Unbedingte, e.g. 물 자체)는 모든 조건적인 것(e.g. 현상)의 원인으로서 사고되고 [나아가 존재할 것이 요청되지만], 대상을 조건화시키고 마는 인간의 경험적 인식 능력에 의해서는 모순 없이 생각될 수 없다. 이어지는 비판은 사변적 인식을 통해서는 무조건자에 이를 수 없지만, 실천적 인식을 통해서는 "저 초험적 이성개념을 규정할 [...] 자료들"이 발견될 수 있음을 밝힐 것이다.(BXXI) 그러므로 이 비판의 소극적 효용은 "사변이성으로는 결코 경험의 한계를 감히 넘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BXXIV)이지만, 적극적 효용은 순수이성이 "그 실천적 사용에서 [...] 감성의 한계를 넘어 확장"될 수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자. 현상과 물 자체 사이의 구분에 다시 주목하면, 상술한 바와 같이 가능한 사변적 인식은 오직 현상으로서의 대상에 대한 것만으로 한정되지만, "대상들을 사물들 자체로서 비록 인식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사고할 수는 있"다는 데서 모순이 일어나지는 않는다(BXXVI). 예컨대 현상으로서의 대상들은 인과성에 종속되지만, 사물 자체로서의 대상들은 아무런 법칙에 의해 종속되지 않으며 이 차이는 아무런 모순도 발생시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동일한 의지가 현상계에서는 자유롭지 않고, 즉 자연법칙을 필연적으로 따르고, 예지계에서는 자유롭다고 생각될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순수이성에 대한 비판은 "자유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할 터인" 도덕의 가능성과 현실성을 비로소 정초해줄 수 있다.(BXXVIII) 이러한 효용들을 가지는 순수이성 비판은 영혼의 불멸성, 신 존재 증명의 문제에서 월권행위를 자행하는 교조주의와 "유물론, 숙명론, 무신론, 자유사상적 무신앙, 광신 및 미신, 그리고 [...] 관념론과 회의론의 뿌리를 자를 수 있다.(BXXXIV)" 

Q. BXXIX ~ BXXX를 정확히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A. 사변이성의 월권을 제한해야 오히려 진정한 신앙이 가능하다.

*인과를 현상에 한정한 흄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서론

[A] 경험은 당위 및 필연적인 것에 대한 앎/인식을 제공할 수 없으며, 바로 그 때문에 보편적인 앎/인식도 제공하지 않는다.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독자적으로 자명하고 확실"한 "선험적 인식"만이 "내적 필연성을 성격으로 갖는 그런 보편적인 인식들(A2)" 자체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험들 가운데서조차도, 틀림없이 선험적인 원천을 가지면서 아마도 오직 우리의 감관의 표상들을 연관시키는 일에 기여하는 그런 인식들이 섞여" 있다. "[...] 어떤 인식들은 심지어 모든 가능한 경험들의 영역을 벗어"나며, 아예 "감성세계를 넘어가는, 그러니까 거기서는 경험이 아무런 단서도 교정도 제공할 수 없(A2-3)"는 형이상학적 인식에 해당한다. 형이상학적 인식은 다른 모든 인식들보다 중요하고 숭고한 것으로 여겨져왔지만, 기초 없이 수행되었기 때문에 예컨대 모든 감성세계를 저버린 플라톤에게서처럼 실패하고 말았다.

*경험적 인식이 필연성/보편성을 제공할 수 없다는 통찰 역시 흄에게서 온 것으로 보인다.

 칸트는 "술어 B가 주어 개념 A에 포함되어 있는" 분석 판단(e.g. 모든 물체는 연장적이다)과 "B가 개념 A에 연결은 되어 있지만, 전적으로 A 개념의 밖에 놓여 있는" 종합 판단(e.g. 모든 물체는 무겁다)을 구별한 뒤(A6-7), 후자만이 인식의 확장을 가능케 한다고 단언한다. 일반적인 경험 판단에서는 경험을 통해 종합이 이루어지지만 "선험적 종합 판단(e.g. 일어나는 모든 것은 원인을 갖는다)의 경우에는 이런 보조수단이 전혀 없다(A9, 강조는 필자)." 따라서 안전한(=선험적, 필연적, 보편적) 진보(=인식 확장) 즉 "선험적 종합 판단의 가능성의 근거를 밝혀내는 일", "이런 판단의 모든 종류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과 [...] [선험적 인식의] 원천, 구분, 범위, 한계"를 "완벽하고 어떤 용도에도 충분하게 규정하는 일"이 곧 "순수 이성 비판"이라는 "특수한 학문의 이념(=목적, A10-11, 강조는 필자)"이다. 여기서 순수함이란 "아무런 외래적인[경험적인] 것도 함께 섞여있지 않(A11)"다는 뜻으로, 이성은 "선험적 인식의 원리들을 제공하는 능력(A11, 강조는 필자)"으로 정의된다.

 순수이성비판이 그에 속하는, "대상들이 아니라, 대상들 일반에 대한 우리의 선험적 개념들(인식방식, B판)을 다루는 모든 인식"은 초월적 인식이다. 그와 같은 인식방식에 대한 개념들의 체계가 곧 초월철학이다. 초월철학 내에는 순수이성의 요소론과 순수 이성의 방법론이 있다. 요소론의 첫 주자는 초월적 감성이론이다. "인간 인식의 대상들이 [감성에] 주어지는 조건들은 그 대상들이 [지성에 의해] 사고되는 조건들에 선행하(A16)"기 때문이다.

 Q. 초월철학, 형이상학, 순수 이성 비판의 차이는 무엇인가?

 A. 초월철학=경험을 가능케 하는 조건 탐구=형이상학의 예비학. 순수이성비판은 초월철학의 일부로, "선험적 종합 인식을 완벽하게 평가하는 데 요구되는 그만큼만 분석을 수행"함(A14).

 Q. 초월철학에 포함되지만 순수이성비판에 해당되지 않는 작업이 대체 뭔가?

 A. 순수이성비판은 인식에 있어 선험적 종합의 '원리'만 탐구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포괄하지 않는다.(e.g. A82=B108 범주의 파생개념들)

[B] --> 좀 더 구체화할 것.

 I. 시간상으로는 경험이 모든 인식에 선행한다. 선험적 인식마저 경험에 시간적으로 선행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적 인식은 수용된 감성적 원재료와 그것을 가공할 줄 아는, 무엇보다 온전히 우리 자신의 것인, 즉 선험적인 인식 능력의 합성물이다. 선험적 인식이란 "단적으로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생긴 그런 인식"을 의미한다.(B3)

 II.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는 선험적 판단으로부터만 나오며, 같은 견지에서 경험은 아무런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엄밀한 보편성을 줄 수 없다. 그리고 우리의 "인식에[는] 선험적인 순수한 원칙들[규칙들]이 실재"하는데(e.g. 인과) "경험 자신이 가능하기 위해서 이 원칙들이 불가결함을 선험적으로 밝힐 수도 있다. 만약 그에 따라서 경험이 진행되어 가는 모든 규칙들이 언제나 경험적이고, 따라서 우연적인 것이라면, 대체 경험 자신이 그것의 확실성을 어디서 얻으려 할 것인가가 문제이니 말이다."(B5, 강조는 필자) 경험적 개념들로부터 경험이 알려주는 성질들을 제거해봄으로써, 판단의 원칙에서뿐만 아니라 개념에서 역시 그 근원이 선험적인 개념들이 실재한다는 것도 알 수 있다.(e.g. 실체)

 III. 형이상학이 교조주의에, 또 회의주의에 빠지지 않으려면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과 원리들과 범위를 규정해주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

 IV. 칸트는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을 구별한 뒤, 모든 경험 판단은 그 자체로 종합적이라고 말한다(<->"물은 H2O다."). "분석 판단을 경험에 근거케 한다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이다.(B11) 예컨대 물체는 연장적이라는 식의 분석 판단은 개념에만 머물러서도 작성할 수 있다. 반면 경험적인 종합판단의 경우 개념 바깥의 경험을 통해 주어에 새로운 술어를 종합한다. 다른 한편 선험적인 종합판단의 경우 종합의 가능근거가 무엇인지 따로 물어야만 한다. 모든 선험적 인식의 궁극의도는 분석이 아닌 종합이기 때문에 이 물음은 특히 중요하다. 분석은 "종합을 위해 요구되는 개념들의 분명성을 얻기 위한 것일 따름이다."(B14)

 V. 산수(7+5=12), 기하학("'직선은 두 점 사이의 가장 짧은 선이다'는 종합명제이다."(B16)), 자연과학 모두 선험적 종합판단들을 자신의 내용 및 원칙으로 가지고 있다. 형이상학 역시 인식의 안전한 확장을 목표로 한다면 같은 원리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형이상학은 적어도 그것의 목적상 순전한 선험적 종합 명제들로 이루어져 있다."(B18)

Q. B15-6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5는 손가락으로 직관화하고 7은 개념으로 내버려두는가...?

A. '7' 등은 자체완결적인 개념. 그 개념을 상상한 뒤 다섯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8, 9, 10, 11, 12 이렇게 손가락 하나 하나에 수를 대응시켜 더해야 12가 답으로 나온다. 쉽게 말해 직관을 보조로 취함으로써 실제로 더해봐야 답을 아는 거지, 각 항들을 분해한다고 뭐가 나오지는 않는 것이다.

 VI. "순수 이성의 본래적 과제는 '선험적 종합 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물음 안에 들어 있다."(B19) 흄은 선험적 종합 판단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함으로써 형이상학을 망상으로 치부했지만, 수학이 이미 선험적 종합 판단의 가능성을 실현하고 있음을 꿰뚫지 못했다(선험적 종합판단을 불가능한 것으로 치부하면 수학의 성과를 포기해야 하는 귀결이 따른다). 따라서 이 물음은 여전히 유효하며, 그에 대한 답은 순수 수학, 순수 자연과학, 자연 소질로서 형이상학, 학문으로서 형이상학은 어떻게 가능하냐는 물음에 대한 답을 포괄한다.

 VII. "대상들이 아니라, 대상들 일반에 대한 우리의 인식방식을 이것이 선험적으로 가능하다고 하는 한에서 일반적으로 다루는 모든 인식"이 곧 '초월적' 인식이다.(B25, 강조는 필자) 선험적 인식의 능력과 한계를 규정하는 작업은 곧 초월적 비판이다. 순수이성비판은 초월철학이라는 이념을 위한, 선험적 인식 능력의 평가에 해당한다. 초월철학 내에는 순수이성의 요소론과 순수 이성의 방법론이 있다. 요소론의 첫 주자는 초월적 감성이론이다. "인간 인식의 대상들이 주어지는 조건들은 그 대상들이 사고되는 조건들에 선행하"기 때문이다.(B30)

초월적 요소론 = 선험적 종합명제의 가능성을 해명해줄 수 있는 두 가지 요소(=순수직관, 순수개념)에 대한 학

제 1편 초월적 감성학

★초월적 감성학이란 "모든 선험적 감성 원리들에 대한 학문"(A21=B35,강조는 필자)으로, 선험적 지성의 원리들을 다루는 초월적 논리학과 대비된다. 구체적으로 초월적 감성학은 감성을 통해 직관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위한 형식으로서의 시공간을 다룬다. (시공간=선험적 직관, 순수직관=모든 직관자들이 갖추고 있는 인식의 보편적 형식이자, 대상이 그것을 통해서만 현상되는 틀=이 형식적 조건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대상이--외부의 사물이든, 인간 내부의 상태든--현상될 수 없는 그런 조건)

§1 인간 의식이 그것을 통해 비로소 대상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바로 직관Anschauung이다. 직관은 대상에 의해 마음이 촉발될 때 생겨난다. "우리가 대상들에 의해 촉발되는 방식으로 표상들을 얻는 능력(곧, 수용성Rezeptivität)을 일컬어 감성Sinnlichkeit이라 한다. 그러므로 감성을 매개로 대상들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감성만이 우리에게 직관들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지성에 의해 사고되며, 지성으로부터 개념들Begriffen이 생겨난다(B33, 강조는 원저자)." 한편 현상이란 감각에 의한 "경험적 직관의 무규정적 대상(A20=B34)"이다. "현상에서 감각에 대응하는 것을 나는 그것의 질료라고 부르며, 그러한 현상의 잡다가 일정한 관계에서 질서지어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나는 현상의 형식이라고 부른다(A20=B34, 강조는 원저자)." 현상의 질료와 달리 형식은 선험적이며, "감성의 이 순수한 형식 그 자신도 순수한 직관(A20=B35, 강조는 원저자)"이다. 감성의 선험적이고 순수한 직관에는 공간과 시간이 있다.

cf. 감성과 지성=인식의 두 원천 / 직관과 개념=인식의 두 요소=표상의 두 종류. 직관은 특수표상(=특수한 대상과 직접적으로 관계함), 개념은 일반표상(=특수한 대상과는 오직 매개적으로만mittelbar 관계함)

 Q. 칸트는 표상주의자인가, 아니면 반표상주의자인가? 직관은 데카르트적 의미에서의, 실재와 유사한 것으로서의 표상과 같은가? 

 A. 크게 보면 표상주의자일 것 같으나 데카르트적 의미에서의 표상주의자는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물자체가 미지의 영역이므로 유사성의 판단 기준조차 없기 때문이다.

 Q. 만약 칸트가 표상주의자가 맞다면, 로크와는 어떻게 차별화되는가? 그에게 직관이 가지는 직접성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A. 직관하는 작용이란 주관적일 뿐인 일종의 감각내용특수하고 개별적인 객관연결짓는 작용이다. 따라서 직관은 주관적인 감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객관에 대한 표상이다. 개별적인 객관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특수표상이라는 의미에서, 객관과 오직 간접적으로만 관계하는 일반표상 즉 '개념'과 대비된다.

§2 이 개념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설 외감을 매개로 인식 주관은 "대상들을 우리 밖에 있는 것으로, 다시 말해 이것들을 모두 공간상에 표상한다. 그 위에서 그것들의 형태와 크기 그리고 상호관계가 규정되며, 규정될 수 있다." 한편 내감을 매개로 인식 주관은 "자기 자신 또는 자기의 내적 상태를 직관"하는데, 이 상태들은 "시간 관계에서 표상된다."(A22-23) 그러므로 공간은 외감/외적 직관의 형식이고, 시간은 내감/내적 직관의 형식이다. 중요한 것은 시공간이란 사물이 그 자체로 가지는, 또는 사물 자체에 부착된 성질이 아니라 주관이 선험적으로 갖추고 있는 순수직관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어째서 시공간이 ①순수한(=감각을 함유하지 않는) ②직관(=개념이 아님)인지 따져보자.

① 공간의 순수성 공간이라는 표상은 첫째, "외적 경험들로부터 추출된 경험적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감각들이 나의 밖의 어떤 것[...]과 관계 맺어지기 위해서는, 또는 내가 그것들을 서로 밖에 그리고 서로 곁에 있는 것으로 [...] 표상할 수 있기 위해서는, 공간이라는 표상이 이미 그 기초에 놓여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간은 감각경험을 함유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경험/현상 일반을 비로소 가능하게 하는 순수한 조건이다. 둘째, "공간은 모든 외적 직관의 기초에 놓여 있는 선험적이고 필연적인 표상이다. 우리는 공간상에서 아무런 대상들과도 마주치지 않는 것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어도, 공간이 없다는 것은 결코 표상할 수 없다(A24=B38-39, 강조는 필자)."

② 공간의 직관임 공간이라는 표상은 셋째, 보편적인 개념이 아닌 순수한 직관이다. 왜냐하면 "공간은 본질적으로 하나(A25=B39, 강조는 필자)"이기 때문이다. 공간의 부분들에 대한 경험적인 직관은 단일한 공간에 대한 선험적인 직관 안에서만 생각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공간은 다수의 공간들을 일반화해서 개념화한 결과가 아니다. 넷째, 공간은 "그 자체로서 무한하게 많은 양의 표상을 자기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개념일 수 없다.*(A25=B40, 강조는 필자)

*Q. 개념이란 무엇이기에 제 아래에 무한한 양을 포섭시키면 안 되는가?

A. 유한한 양의 표상들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개념이 아닐까?(푸름씨)

§3 공간 개념에 대한 초월적 해설 초월적 해설이란 "한 개념그로부터 다른 선험적 종합 인식의 가능성이 통찰될 수 있는 원리로 설명"하는 것이다.(A25=B40, 강조는 필자) 기하학은 공간의 속성들에 대한 선험적 종합 판단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이런 기하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도 공간 표상은 직관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순전한 개념으로부터는 그 개념을 넘어서는 어떤 명제도 도출되지 않는데, 기하학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것은 역시 순수한 직관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기하학적 명제는 명증적이고 필연적으로 참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공간이 외감 일반의 형식이라는 해설만이 "선험적 종합 인식으로서 기하학의 가능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A25=B41)

*기하학의 가능성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직관의 공리들 참고.

[이상의 개념들로부터 나오는 결론] 공간은 "사물들 자체의 규정이 아니"며 사물들의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주관적 조건이자 형식(=질료를 포함하지 않고, [질료와 맺는] 법칙적 관계만 포함함)으로서 "모든 현실적인 직관에 선행해서 [...] 모든 대상들이 그 안에서 규정되어야 하는 순수 직관으로서 모든 경험에 앞서 그 대상들의 [공간적 상호]관계들의 원리들을 포함"한다.(A26=B42)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인간의 관점에서만 공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공간은 현상으로서의 대상과 관련해서는, 즉 경험되는 한에서는 실재한다(=객관적으로 타당하다, 사물res의 질을 이룬다). 반면 사물들 자체Ding an sich와 관련해서는, 즉 경험 밖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한낱 관념에 불과하다(=한낱 주관적인 성질이다, 사물의 질을 이루는 바 없다). 그러므로 공간은 경험적 실재성Realität과 초월적 관념성Idealität을 지닌다. 공간의 초월적 관념성은 사물 자체와 현상 사이의 초월적 구별을 상기시켜준다. "우리에게 대상들 그 자체는 전혀 알려지지 않으며, 우리가 외적 대상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름아니라, 그것의 형식이 공간인 우리 감성의 순전한 현상들뿐이"다.(A30=B45) 또한 공간 이외에 그 어떤 주관적 표상도 외감의 순수형식 또는 선험적 종합명제를 도출해줄 수 있는 선험적 직관이 될 수 없다. 여기서 칸트는 감각을 배제하고자 하는 것 같다. 감각은 경험적이고 우연적인 데다 순전히 주관적 상태로서 직관도 아니기 때문이다. 

§4 시간 개념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설 

①시간의 순수성 시간 또한 첫째, 경험을 통해 도출되는 개념이 아니라, 동시적임이나 잇따름의 경험을 비로소 가능하게 하는 기초로서 선험적인 직관이다. "오로지 시간을 전제하고서만 우리는 몇몇의 것이 동일한 시간에 (동시에) 또는 서로 다른 시간에 (잇따라) 있음을 표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A30=B46) 둘째, 시간은 "모든 직관의 기초에 놓여 있는 필연적인 표상"으로서 "시간으로부터 현상들을 완전히 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시간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다."(A31=B46, 강조는 필자) 셋째, 이러한 시간의 선험적 필연성에 "시간 관계의 명증한 원칙들 내지 시간 일반의 공리들의 가능성 또한 기초한다. [...] 서로 다른 시간들은 동시에 있지 않고, 잇따라 있다"는 원칙은 "경험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없다."(A31=B47, 강조는 필자) 왜냐하면 경험은 필연성에 대해 해주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②시간의 직관임 넷째, 시간이 보편적 개념이 아닌 "감성적 직관의 순수 형식"인 이유는, "서로 다른 시간들은 동일한 시간의 부분들일 따름"인데 "오직 단 하나의 대상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표상은 직관"이기 때문이다.(A32=B47, 강조는 필자) 반면 개념은 여러 대상들을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시간관계의 명증한 원칙이 종합적이라는 사실도 시간이 개념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개념들로부터는 분석적인 것만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시간이 무제한적이고 전체로서 주어진다는 사실도 시간이 개념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개념에 대해서는 전체를 제한해 부분을 얻는 작업이 유효하지 않다는 전제가 숨겨진 것 같다.]

§5 이 개념에 대한 초월적 해설 변화(="두 모순 대립적인 규정들이 한 사물 안에서, 곧 잇따라 마주"치는 것(A32=B49))와 운동(=장소의 변화)의 개념은 시간상에서만, 즉 시간표상을 통해서만/시간표상 안에서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시간표상을 통해서만 변화와 운동의 가능성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간 개념은 적지 않게 효용이 큰 일반 운동이론이 서술하는 많은 선험적 종합 인식의 가능성을 설명해 준다."(A32=B49, 강조는 필자)

§6 [이상의 개념들로부터 나오는 결론] 시간은 "스스로 독립적으로 존속하는 무엇도 아니고[<->Newton] 사물들의 객관적인 규정으로서, 그러니까 우리가 사물들에 대한 직관의 모든 주관적인 조건들을 도외시해도 여전히 사물들에게 남을 그런 어떤 것도 아니다." 시간은 "현실적인 대상이 없이도 현실적으로 있는 무엇"이 아니며(A32=B49), "사물들 자신에 속하는 하나의 규정 내지 질서로서의 시간은 대상들의 조건으로서 대상들에 선행할 수도 없겠고, 선험적으로 종합 명제들을 통해 인식되고 직관될 수도 없겠으니 말이다. [그러나 시간은 대상들에 선행하고 선험적 종합명제를 통해 인식되고 직관된다. 따라서 사물 자체에 속하지 않는다.]"(A33=B49, 강조는 필자) 시간은 "그 아래에서 모든 직관이 우리에게서 일어날 수 있는 주관적 조건"으로(A33=B49), "우리의 내적 상태에서 표상들의 관계를 규정한다."(A33=B50)

 시간의 관계들은 유추를 통해 선으로써 공간화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직관이"다(A33=B50). [직관만이 공간화될 수 있기 때문 같다.] 또한 시간은 "내적 현상들의 직접적인 조건이고, 바로 그렇기에 간접적으로 또한 외적 현상들의 조건이다."(A34=B50)

 마지막으로 시간은 "오로지 현상들과 관련해서만 객관적으로 타당하다."(A34=B51) 다시 말해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서 보편적으로] 모든 [현상으로서의] 대상에 대한 경험에 필연적으로 속하므로 경험적으로는 실재한다. 그러나 "사물들 일반을 얘기한다면, [...] 그때는 시간이란 오로지 [...] 우리 (인간의) 주관적 조건이고, 주관을 벗어나면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공간과 마찬가지로 초월적 관념성을 지닌다.(A35=B51)

§7 해명 시간의 절대적, 초월적 실재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변화의 실재성을 근거로 들면서, 변화는 오직 시간상에서만 가능하므로 시간 역시 실재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비판은 공간에 대해서는 잘 행해지지 않는다. 공간의 절대적 실재성에 대해서는 오랜 관념론적 전통이 맞서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우리 내감의 대상(곧, 나 자신과 나의 상태)의 실재함은 의식을 통해 직접적으로 명백하"기 때문에 상술한 비판이 만연하다.(A38=B55) 그러나 시간의 실재성은 주관적일 뿐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객관이 아니며, 인간과 같은 감성의 조건을 가지지 않은 존재자에게는 시간과 변화의 표상이 인식되지 않을 것이다. [변화들이 실재적이라고 해도, 그 실재성조차 인간의 경험 속에서 확보되는 것이다.] 따라서 변화의 실재성을 근거로 시간이 초월적으로도 실재해야 한다는 반론은 부당하다. 

 시간과 공간은 "그로부터 여러 종합적 인식들[e.g.대수학, 기하학*]을 선험적으로 길어낼 수 있는 두 인식 원천"이다.(A39=B55-56) 다만 "현상으로서 고찰되는 한에서의 대상들과만 관계"한다는 한계를 지닐 뿐이다.(A39=B56) 시공간이 [정신과 독립해서] 절대적으로/초월적으로 실재한다고 보는 입장에는 그것을 실체적인 것으로 보는 뉴턴의 입장과 속성적인 것으로 보는 라이프니츠-볼프 형이상학의 입장이 있다. 전자는 시공간을 실재하는 무물Unding--다른 모든 사물이 실존하지 않더라도 저 혼자 덩그러니 실존하는 모순적 개념--으로 만들어버리며, 후자는 시공간에 대한 선험적 개념들의 원천을 한갓된 경험적 상상력으로 상정하기 때문에 시공간에 대한 선험적 종합명제들의 "명증적 확실성을 부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A41=B57, 강조는 필자) 한편 감성의 순수직관은 시공간 이 두 가지뿐이다.

*칸트에게 대수학은 시간(계열, 순서)을 만족시키는 대상들에 대한 학문이고, 기하학은 공간 위 대상들에 대한 학문이다.

Q. 여전히 왜 수학이 시공간에 대한 학문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cf. "칸트는 기하학에 있어서 기초적인 공리 체계의 인식뿐 아니라 연속적인 추론 과정에도 우리의 직관에 의존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를테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라는 것을 증명할 때에도 윗 꼭 지점에서 아래의 밑변과 평행하는 보조선을 긋고, 동위각이나 엇각끼리 같은 점을 공간적 직관으로 확인해 나간다. 그리고 칸트는 직선을 ‘두점 사이에 가장 짧은 선’으로 정의하며 똑바르고 두께가 없다는 설명을 했다. 여기서 똑바르다는 것은 당시 수학책에서는 한 점이 동일한 방향으로 이동할 때의 점의 자취로 설명이 되곤 했는데, 칸트도 이런 식으로 직선의 개념을 받아들였을 뿐 더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이러한 것은 상상이 가능하며 그 용어는 공간적 직관을 관념화하여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바, 칸트는 이것을 분석적이라고 보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관점에서 본다면 이를 선험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스럽다. 새로운 경험과 함께 비유클리드 기하학도 얼마든지 구성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밀의 주장대로 경험적 요소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한편, 칸트는 ‘7+5=12’ 같은 산수도 공리 도입을 거부하며 이 역시 공간적 1:1 대응에 관한 직관에 의해 추론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도 ‘700+500=1200’ 같은 복잡한 연산도 직관에 의한 추론에 의존한다고 본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스럽다. 이런 경우 우리는 보통 덧셈 연산에 있어서의 일반 규칙을 받아들이고 그 방식을 적용하여 그 결과를 얻기 때문이다."(신정수, 칸트와 브라우어의 직관주의 비교 및 비판,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철학연구> 제59집, 2019. 3, p.42.)

§8 초월적 감성학에 대한 일반적 주해

I. "그 자체로 그리고 우리 감성의 일체의 이 수용성과는 별도로 대상들이 어떤 사정에 놓여 있는가는 우리에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는 그것들을 지각하는 우리의 방식, [...] 모든 존재자에게 필연적으로 속하는 것은 아닌 방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오로지 이 방식과만 상관한다. 공간과 시간은 그 방식의 순수 형식들이고, 감각 일반은 그 질료이다."(A42=B59-60, 강조는 필자) (라이프니츠-볼프 형이상학의 입장과 달리) 대상에 대한 직관이 분명해진다고 해서 대상 자체를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불분명한 표상[자기동일적 물체]과 분명한 표상[모나드]의 구별은 한낱 논리적인[지성적인] 것으로, 내용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A43=B61). 

Q. 시공간에 대한 라이프니츠-볼프 형이상학의 입장은 무엇인가? 그것은 왜 "감성과 지성적인 것의 차이를(A44=B61)" 잘못 봤는가? cf. 칸트에게 감성=자기 바깥으로부터의 수용 vs 지성적=순전한 자기활동(B68)

 A. 라이프니츠-볼프 철학은 표상의 분명도라는 <형식>에 따라 감성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 사이의 차이는 <내용>에 관련된 것이다. 감성은 직관을 자신의 적용 대상으로 가지고, 지성은 개념을 자신의 적용 대상으로 가진다. 뿐만 아니라 칸트에게 사물 자체는 (라이프니츠에게서처럼) 불분명하게 인식되는 게 아니라 애초에 인식될 수가 없다. 

cf.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정신적 단자들의 모음을 불분명하게 표상할 경우 오직 그 경우에 물체들이 공간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표상된다. 따라서 정신과 연장은 말하자면 실재-현상의 관계를 이룬다. 그러나 인간적 한계를 탈피해 단자들에 대한 분명한 표상이 가능하다면, 즉 현상을 넘어 실재 자체에 다다른다면 공간상의 근접성은 단자들 사이 상호지각의 명료성/친밀성 즉 비공간적인 요소로 환원될 것이다. 인간적 한계에 구애되는 경험을 통해서만 공간이 인식 가능한 것이다. 반면 칸트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공간에 대해 선험적이고 분명한 인식을 수행할 수 있다.

★ 초월적 감성학이 다루는 두 선험적 직관들은 "필연적이고 보편타당한 진리들에 이르기 위해 우리의 지성"이 의지할 만한 것을 제공한다. 예컨대 어째서 공간이라는 선험적 직관만이 기하학이라는 선험적 종합판단을 가능케 할까? 경험적인, 불순한 개념들과 직관들은 "필연성과 절대적 보편성"을 제공할 수 없으며, 선험적 개념들은 종합 판단이 아닌 분석적 인식만을 제공하기 때문이다.(A47=B64) 종합은 대상과의 만남, 직관의 보조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선험적인 직관을 통해서만 선험적 종합 판단이 이루어질 수 있다.

 II. 외감(="외적 객관들에 대한 직관")이든, 내감(="마음에 대한 자기 직관"(B69))이든 그로부터의 표상은 "오로지 대상의 주관과의 관계만을 포함할 수 있고, 객관 자체에 속하는 내적인 것을 포함할 수는 없"으므로 현상하는 대로의 표상일 뿐이다.(B67) 심지어 주관 자신마저 "내감에 의해 오직 현상으로 표상될 수 있"다.(B68) 자기 자신에 대한 직관을 산출하려면 즉 자기 자신을 인식하려면 마음에 있는 것이 자기의식(=통각)의 능력을 촉발해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가 아니라, 현상으로서의 '나'만이 인식 가능하다.

 III. 객관이 현상된 대로만 표상된다고 해서 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현상된 객관도 "실제로 주어지는 무엇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B69) 만일 시공간을 객관적으로/초월적으로[초험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것들, 나아가 심지어 "우리 자신의 실존도" 무물에 의존하는 가상으로 전락할 것이다.(B71) 버클리가 [모든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esse est precipi)이며, 정신 밖에는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뉴턴의 초월적 실재론을 피하려다 물체들을 가상으로 만들어버린 것도 그릇됐다.

cf. "From Kant’s point of view, Berkeley correctly avoids transcendental realism, but does so by falsely claiming that space is dependent on empirical intuition. This is a mistake, as we have seen, because Kant thinks that the representation of space cannot be empirical."(강조는 필자) Janiak, Andrew, "Kant’s Views on Space and Time",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pring 2020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spr2020/entries/kant-spacetime/>.

 IV. 근원존재자와 달리 인간은 직관을 창조하는 게 아니라 수용할 뿐이다. "우리의 직관 방식은 근원적이 아니라, [...] 객관의 현존에 의존적이고, 그러니까 주관의 표상력이 그것[물 자체]에 의해 촉발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감성적이라 일컬어진다."(B72, 강조는 필자) 풀어 말해 반드시 촉발을 요구한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감성은 파생적이다.

 Q. 칸트는 지향성의 개념을 선취하는가? 칸트의 주장은 대상이 대상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관의 형식을 거쳐야 한다는 주장이 아닌가? 후썰이 이에 더하거나 변혁한 것은 무엇인가?

 Q. 칸트의 시간론은 어째서 비-현상학적인가? 후썰은 왜 그의 시간론을 자신의 레퍼런스가 될 만한 것으로서 인정하지 않는가?

 A. 관념론 반박 부분을 참고하면, 칸트의 시간론은 객관적 시간론에 가까움을 알 수 있다.

초월적 요소론 제 2편 초월적 논리학 <대상에 대한 판단(=S와 P를 통일시키는 지성의 작용)이 형성될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선험적 원리=S is P라는 판단 구조를 정초하는/판단의 형식들에 상응하는 12범주들=순수지성개념=선험적 개념>이 어떻게 선험적/경험적 직관과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탐구하는 학

서론: 초월 논리학의 이념

I. 논리학 일반에 대하여: 지성과 감성 중 어떤 것도 다른 것보다 우선시될 수 없으며 둘 모두가 인식을 위해 요구된다. "직관이 없이는 어떠한 개념들도, 또한 개념들이 없이는 어떠한 직관도 인식을 제공할 수가 없다." 직관과 개념은 "감각을 자기 안에 함유하고 있으면, 경험적인 것이고, 반면에 그 표상에 아무런 감각도 섞여 있지 않으면, 순수한 것이다. 감각은 감성적 인식의 질료라고 일컬을 수 있다. 그러니까 순수한 직관만이 그 안에서 무엇인가가 직관되는 형식을 포함하며, 순수한 개념만이 대상 일반을 사고하는 형식을 포함한다."(A50=B74-A51=B75) 그럼에도 지성과 감성은 구별되어야 하며, 둘 중에서 "지성 규칙들 일반의 학문"이 곧 논리학이다(A52=B76, 강조는 필자).

 칸트는 먼저 논리학을 일반논리학특수논리학으로 나눈다. 이런저런 학문의 기관 또는 방법론으로서 "특정한 대상들에 관하여 올바르게 사고하는 규칙들을 내용으로 갖는" 특수논리학과 달리(A52=B76) 일반논리학은 대상 일반에 대한 지성사용의 선험적 규칙으로, 인식 대상의 차이는 도외시하고 "오로지 사고의 순전한 형식만을" 다루는 학이다.(A54=B78) 일반논리학은 다시금 응용논리학순수논리학으로 나뉜다. 순수논리학은 "우리 지성이 활용되는 모든 경험적인 조건들을 도외시한다. [...] 그러므로 순정한 선험적 원리들만을 취급"한다. 반면 응용논리학은 "주관적인 경험적 조건들 아래에서의 지성사용의 규칙들"을 따지는 학으로 예컨대 주의 장애와 착오의 근원, 의심의 상태 등을 다룬다.(A53=B77)

II. 초월 논리학에 대하여: 초월적인 인식과 선험적인 인식은 다르다. 전자는 선험적 인식 중에서도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들의 (i)선험성에 대한 인식 및 (ii)경험 대상과 선험적 조건 사이의 관계맺음에 대한 인식에 해당한다. 초월논리학은 순수개념들이 존재하리라고 기대하면서 그것들을 통해 대상을 선험적으로 사고하는 "순수 지성 인식과 순수 이성 인식[...]의 근원과 범위와 객관적 타당성을 규정하는" 학문이다.(A57=B81)

cf. ★초월적 인식: 인식의 선험적 가능조건에 대한 인식, “메타적 인식”으로, “표상과 대상간의 관계 = 인식주관과 인식객관의 관계”를 알고자 함. —> 이 물음은 인식론적 물음일 뿐 아니라 형이상학적 물음이기도 함. 왜냐하면 객체의 (인간에게의) ‘존재’ 근거를 따지기 때문. ★초월논리학: 판단의 형성을 통한 지성적 인식의 원리에 관한 논의. '순수 개념들은 어떻게 대상과 선험적으로 연결되는가?'의 물음에 답하고자 함 (이행남 선생님 수업 참고)

III. 일반 논리학을 분석학과 변증학으로 구분함에 대하여: 인식이 보편적이고 필연적으로 만족시켜야 하는 형식을 탐구하는 논리학은 진리의 소극적 기준--진리이려면 적어도 논리의 규칙은 지켜야 한다는 기준--만을 제공한다.* 일단 진리이려면 인식의 형식과 합치해야 하는데, 그 인식이 대상과 합치하는가, 즉 형식 바깥의 질료적인 문제의 해결은 감성의 작용/경험(적 직관)을 요구하므로, 논리학만으로는 올바른 인식의 내용에 대해 말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논리학 중에서 분석학은 이처럼 진리가 성립하기 위해 사고가 따라야 할 형식적 규칙을 지성의 업무들을 분석/분해함으로써 탐구한다. "그러나 인식의 한낱 형식은, [...] 질료적 진리를 확정하기에는 아직 턱없이 불충분하다. [...] 한낱 평가를 위한 규준인 저 일반 논리학이 객관적인[대상에 대한] 주장들을 실제로 산출하기 위한 [...] 기관으로 사용되"면 변증학이 된다.(A60-61=B85, 강조는 필자) 변증학으로서의 논리학은 그에 대해서 분석만이 가능한 지성을 종합의 기관 및 도구로 쓰는 가짜 학문, 가상의 논리학, 궤변이자 사기이다.

*형식이 아닌 질료의 차원에서는 진리의 '보편적' 기준/표지가 마련될 수 없다. 질료의 차원에서 진리는 '특정한/특수한' 내용에 대한 진리로, 보편성과 모순을 빚기 때문이다.

Q. 정언명령의 형식으로부터 정언명령의 내용을 도출한 실천이성비판에서의 스탠스와 어떻게 양립가능한가?

IV. 초월 논리학을 초월적 분석학과 변증학으로 구분함에 대하여: 초월적 분석학은 순수한 지성의 요소들(e.g. 범주) 및 원리를 탐구하는 학인 한편, 초월적 변증학은 순수한 지성만으로 [지성 바깥의] 대상에 대해 이런저런 종합판단을 내리는 학이다. 변증학에서 지성과 이성은 초험적으로 사용되어 초월적 가상들에 대해 이런저런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그러나 범주에 대한 지식은 지성[주관]에 대한 지식일 뿐이기에, 대상[객관]에 대한 지식으로 잘못 생각돼선 안 된다.

초월 논리학 제1부 초월적 분석학 초월적 분석학은 "우리의 선험적인 전체 인식을 순수 지성 인식의 요소들로 분해하는 작업이다." 이 요소들은 문자 그대로 순수하고, 지성에 속하며, 파생적이거나 합성의 결과가 아니고, 그 요소들을 모두 합하면 "순수 지성의 전 영역을 완전히 아우른다."(A64=B89) 순수지성은 감성의 영향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성립하는 통일체로, 그 자체로 완벽하고 유기적인 체계를 이룬다.

초월적 분석학 제1권 개념의 분석학 개념의 분석학은 지성 능력 자체를 분해해 순수개념의 근원과 성질을 탐구한다. 순수개념은 "경험을 기연[기회원인]으로 발전되"지만 경험적 조건들로부터 해방되어 분석될 수 있다.(A66=B91)

개념의 분석학 제1장

모든 순수 지성개념들의 발견의 실마리에 대하여(이하 '실마리') 인식 능력에 의해 활용되는 개념에 대한 탐구는 기계적으로--우연히 찾아지는 대로 수집하는 방식--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초월철학이 탐구하고자 하는 "개념들은 절대적 통일체인 지성으로부터 순수하고 뒤섞임 없이 발생한 것이고, 따라서 그 자체로 하나의 개념 내지 이념에 따라 서로 연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연관성은 "각각의 순수 지성개념이 자기의 위치와 그것들의 전체적인 완벽성"을 규정해주는 "하나의 규칙을 제공한다."(A67=B92, 강조는 필자) 여기서 칸트는 지성이 그 자체로 완벽하고 유기적인 체계라면, 지성의 개념들 역시 결코 임의적이거나 우연적으로 연관될 리 없다는 전제를 작동시키고 있는 것 같다.

실마리 제1절 논리적 지성사용 일반에 대하여 지성은 곧 개념을 통해 인식하는(=사고하는) 능력서로 다른 표상들을 공통된 표상 하에 자발적으로 통일시키는 능력이다. 개념의 유일한 사용처는 판단인데, "판단은 한 대상에 대한 간접적인 인식, 그러니까 대상의 표상에 대한 표상이다."(A68=B93)* ★그러므로 지성은 결국 판단하는 능력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만약 우리가 판단들에서의 통일** 기능들을 완벽하게 드러낼 수 있다면, 지성의 기능들은 모두 발견될 수 있다."(A69=B94, 강조는 필자) --> 범주의 형이상학적 연역

*Q. A69=B94의 함수 얘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A. "모든 판단들[이] 우리 표상들 간의 통일 기능[함수]들"인 이유는, 함수에서처럼 항의 내용은 비어있고(무엇이 와도 괜찮고) 항들 사이의 관계가 판단의 논리적 기능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e.g. All S is P, that S is P is possible 등.

**주어와 술어 사이의 결합을 말하는 것 같다. 판단은 개별적인 직관을 한 개념 하에 포섭시키거나(e.g. 이 젤리는 젤리다), 한 개념을 그보다 상위의 개념에 포섭시킨다(e.g.하리보는 젤리다).

실마리 제2절 판단에는 총 열두 종류, 사고가 기능할 수 있는 열두 가지 방식이 있다(A70=B96). 바로 전칭/특칭/단칭(양), 긍정/부정/무한(질), 정언/가언/선언(관계), 미정/확정/명증(양태)판단이다.

판단

예시

전칭

모든 물체는 가분적이다. (A68=B93)

특칭

어떤 젤리는 맛있다.

단칭

내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이 젤리는 맛있다.

긍정

젤리는 맛있다.

부정

젤리는 맛있지 않다.

무한

영혼은 불사적이다(죽지 않는다).* (A72=B97)

정언

젤리는 무조건 맛있다.

가언

완전한 정의가 있다면, 고질적으로 악한 자는 벌을 받는다. (A73=B98-99)

선언

세계는 맹목적인 우연에 의해서 존재하거나, 또는 내적 필연성에 의해 존재하거나, 또는 외적 원인에 의해 존재한다.** (A74=B99)

미정(개연)

영희는 공무원 시험에 통과할 수 있다.

확정

영희는 공무원 시험에 통과했다.

명증(필연)

인문대 6동 3층 창문에서 젤리를 떨어뜨리면 반드시 땅으로 떨어진다.***

*저 무한판단이 가리키는 바는 "영혼이란 내가 가사적인 것 모두를 제거하고 나면 남는 무한히 많은 사물들 중의 하나라는 것뿐이다. [...] 그렇다고 영혼의 개념[의 내포는] 조금도 더 커짐이 없고, 긍정적으로 규정됨이 없다."(A72-72=B97-98) 따라서 긍정판단과 무한판단은 구별되어야 한다.

**선언판단에서 표현되는 사고들/판단들 사이의 관계는 "한 판단의 영역이 다른 판단의 영역을 배제한다는 점에서는 논리적인 상호 대립의 관계이지만, 동시에 그것들이 합해서 원래 인식의 영역을 채운다는 점에서는 상호작용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한 인식의 영역의 부분들의 관계이다."(A73-74=B99, 강조는 필자)

***판단들의 양태는 판단의 내용과 독립적으로 기능한다. 미정적problematisch 명제는 논리적 가능성(cf. 그러나 경험의 형식적 조건인 시공간에 의해서는 규제됨)만을, 확정 명제는 논리적 실재성을, 명증적apodiktisch 명제는 논리적 필연성을 표현한다.(A75-76=B101)

Q. 판단이 꼭 이 열두 종류라는 데 대한 근거는 무엇인가?

실마리 제3절

§10 순수 지성개념들, 즉 범주들에 대하여

 종합Synthesis이란 인식을 위해 "잡다가 먼저 일정한 방식으로 통관되고durchgehen 수득되어aufnehmen(=collect/absorb) 결합되"는 활동으로,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여러 표상들을 서로 덧붙이고 그 잡다함을 한 인식에서 파악하는 활동 작용"이다.(A77=B102-103, 강조는 필자) 종합은 "상상력의 순전한 작용결과이다(A78=B103)." 이 종합이 개념들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감성에 의해 수용되고 상상력에 의해 종합된 잡다를 개념 아래로 보내는 것이 지성의 기능이다. 종합되는 잡다가 순수한, 선험적인 성격의 것일 경우 종합은 순수 종합이 되는데, "선험적인 종합적 통일의 근거에 의지하고 있는" 순수종합이 곧 "순수 지성개념들을 제공한다."(A78=B104, 강조는 필자)* 이와 관련해, 대상 인식 일반의 선험적 조건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의 것은 순수한 직관의 잡다이다. 상상력에 의한 이 잡다의 종합이 둘째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인식을 제공하지 못한다. 이 순수한 종합에 통일성을 주며 오로지 이 필연적 종합적 통일의 표상에서 성립하는 개념들이 나타나는 대상에 대한 인식을 위한 셋째의 일을 하며, 그것들은 지성에 의거하고 있다."(A79=B104, 강조는 원저자) 순수지성개념들은 "객관들과 선험적으로 관계 맺는"데, 이와 같은 종합적 통일은--분석적 통일만을 다룰 수 있는 일반논리학[순수논리학 같다]이 아닌--초월논리학에서만 다뤄질 수 있는 것이다.(A79=B105)** 또한 각 순수지성개념은 앞서 개괄된, 판단들의 논리적 기능들 열 두가지에 상응한다.

*Q. 여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cf. 시공간의 잡다에 대한 종합=순수종합. 

**Q. 여기도 이해하지 못했다. 분석적 통일종합적 통일의 관념이 생소하다.

A. 개념의 분석적 통일=개념의 자기동일성. 개념의 종합적 통일=개념과 직관 사이 통일 즉 개념의 직관에의 적용

 칸트는 판단의 논리적 기능들을 발동시키는/정초하는 순수지성개념들을 '범주'라고 부르자고 제안한다. 양의 범주들에는 하나/여럿/모두가, 질의 범주들에는 실재성/부정성/제한성이, 관계의 범주들에는 내속성과 자존성(실체와 우유성)의 관계/원인성과 의존성(원인과 결과)의 관계/상호성(능동자와 수동자 사이의 상호작용)의 관계가, 양태의 범주들에는 가능성/현존 및 현실성/필연성이 있다. "이상의 것이, 지성이 선험적으로 자기 안에 함유하고 있는, 종합의 근원적으로 순수한 모든 개념들의 목록이다."(A80=B106) 체계적인 원리에 기반해 범주들을 발견한 칸트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들의 종류를 상정함에 있어 오직 운에 기대는 귀납적 추리만을 사용함으로써 몇몇 개념들을 잘못 포함시키거나 누락시켰다.

§11 이상은 지성의 모든 요소개념들을 빠짐없이 망라한 것이다. 칸트는 이에 대해 세 개의 주석을 단다. ①양과 질의 범주는 직관의 대상들을 겨냥하는 수학적 범주들[동종적인 것들로 이루어짐]이고, 관계와 양태의 범주는 대상들의 실존을 겨냥하는 역학적 범주들[이질적인 것들 사이의 연관을 다룸]이다. ②"각 항의 셋째 범주[는] 첫째와 둘째 범주의 결합으로부터 생긴다".(B110) ③상호성의 범주와 선언적 판단 형식의 상응은 상관자들 사이의 병렬(=일방적 종속 아님), 쌍방규정(=일방규정 아님),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면서도 상대의 근거가 되면서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성격을 통해 드러난다.

Q. 애초에 상호성의 범주가 드러내는 사물들의 사태가 뭔지 모르겠다.

A. 칸트는 "한 물체 내에서 그것의 부분들은 서로 서로 당기고 밀친다"를 든다.(B112) 상호영향관계(상대에게 작용을 가하는 동시에 당하는 관계)를 말하는 것 같다.

Q. 경험의 제3유추에 가면 공간상에 동시적으로 현존하는 대상들을 상호성의 사태로 설명하는데, 이것이 상호영향관계와 무슨 상관인가?

A. 진공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나란히 있는 것만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게 아닐까? 자기 자리에 다른 물체가 못 오게 함으로써.

§12 스콜라철학자들은 하나임, 참됨, 선함이라는 초월적 술어들 역시 범주로 사용했으나 이는 그릇됐다. --> Q. 총체적 난국

초월적 분석학 제2장 순수 지성개념들의 연역에 대하여

§13 초월적 연역 일반의 원리들에 대하여 법이론에서 연역이란 사실관계에 대한 증명이 아닌 "권한 내지는 정당한 권리를 밝혀내야 하는 [...] 증명"을 의미한다.(A84=B116) 초월적 연역이란 "어떻게 선험적 개념이 대상과 관계 맺을 수 있는가 하는 방식에 대한 설명"으로, 선험적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과 독립적으로--어째서 정당한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밝히는 작업이다.(A87=B117) 초월적 연역은 개념의 경험을 통한 발생을 제시하는 경험적 연역과 구별된다. 그리고 "순수한 인식에 대해서는 [...] 결코 어떤 경험적 연역도 있을 수 없"다.(A87=B119) 시공간 그리고 범주들은 선험적인 형식들로서, 경험을 통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험적 직관의 경우, 그것의 초월적 연역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시공간 없이는 애초에 그 어떤 대상도 주어지지조차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 선험적 개념, 범주들에 대해서는 초월적 연역이 쉽지 않다. 지성과 관계 맺음 없이, 무규정적인 무언가--개념 없는 직관--이 현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표면적인 필연성 부족--대상이 인식되기 위해 꼭 범주와 관계 맺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처럼 보임--으로 인해 "어떻게 사고의 주관적 조건들이 객관적 타당성을 가질 것인가, 다시 말해 어떻게 대상에 대한 모든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제시할 것인가"라는 물음이 제기된다.(A89=B122) [이 물음에 대해 회의적으로 답하면 예컨대 흄의 것과 같이, 주관적 필연성만을 인정하는 인과론이 귀결된다. 칸트의 관점에서 보면 흄은 범주들을 경험으로부터 도출하고자 했다. 한편 로크 역시 같은 시도를 했지만, 경험주의를 철두철미 견지한 흄과 달리 감각을 넘어선 실체를 인정하고 말았다.] 

cf. 칸트에게 기하학은 철학에 의해 정초될 필요가 없다.(A87=B120)

§14 범주의 초월적 연역으로 이행 그러나 "선험적 개념인 범주의 객관적 타당성은, 그것에 의해서만 경험이 (사고의 형식 면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에 의거한다.[...] [범주들]을 매개로 해서만 도대체가 경험의 대상이라는 것이 생각될 수 있"다.(A93=B126, 강조는 필자) [예컨대 흄에게서와 달리 칸트에게서는 애초에 무언가가 '원인'으로서 인식되려면 그것이 결과를 객관적으로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성격을 가질 것이 요구된다.] 요컨대 범주--직관을 판단의 논리적 기능들 중 하나와 관련해 규정하는 선험적 개념--의 적용은 경험의 선험적 가능조건이다. 로크와 흄이 수행한 것처럼 범주들을 경험적으로 도출하고자 하는 시도는 "순수 수학과 일반 자연과학의 현실과 서로 맞지 않으며, 그러므로 사실에 의해 반박된다."(A94=B128, 강조는 원저자)*

*Q. 어째서? 수학과 자연과학은 선험적인 종합판단이라서?

A. 수학과 자연과학은 칸트에게는 선험적 직관에 대한 범주적 판단일 텐데, 만일 범주가 경험적 개념이라면 그를 통해 도출되는 수학과 자연과학의 명제들 역시 경험적인 성격의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수학과 자연과학은 선험적 종합판단이다. 따라서 ~

순수지성개념들의 연역[A판]

cf. 예비적 용어 정의

★'통각': 넓은 의미에서는 나 자신에 대한 의식 즉 자기의식, "좁은 의미에서 칸트의 통각은 “나는 사고한다Ich denke”에 의해 나의 모든 표상들을 하나의 의식에 귀속시키는 능력을 뜻한다. 그런데 칸트가 지각perception에 덧붙여지는(ad) 의식인 통각Apperzeption을 “자기의식”이라고 표현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둔 것은, “나는 사고한다.”가 모든 표상에 동반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생각에 따르면 나에게 인식적으로 의미 있는 표상은 그것이 자아를 지향하는 의식을 표현하지 않거나 명시적으로 “의식에 대한 의식”이 아니더라도 [모두] 자아의식[통각]이다. 왜냐하면 이 일차적 상태는 “나는 사고한다.”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강지영, 「칸트의 초월적 통각 이론에서 자아의 동일성에 대한 의식」, 『인간·환경·미래』 제23호, 2019(이하 강지영), p.132, 강조는 필자) --> 그러므로 모든 의식작용은 '나'의 것인 한, 즉 자기의식을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동반하는 한에서 통각작용. '통각'으로 의식 자체를 가리키기도 함.

★'초월적 통각': 나 자신의 모든 경험/표상을 나 자신에게 초월적으로 귀속시키는 의식이자 경험들을 통해 경험의 가능조건으로서 주관의 자기동일성에 대한 의식. 또는 경험을 가능케 하는 주관의 통일성 또는 통일된 주관 자체. 

cf. "Transcendental apperception is the uniting and building of coherent consciousness out of different elementary inner experiences (differing in both time and topic, but all belonging to self-consciousness). For example, the experience of "passing of time" relies on this transcendental unity of apperception, according to Kant. There are six steps to transcendental apperception: All experience is the succession of a variety of contents (an idea taken from David Hume). To be experienced at all, the successive data must be combined or held together in a unity for consciousness. Unity of experience therefore implies a unity of self. The unity of self is as much an object of experience as anything is. Therefore, experience both of the self and its objects rests on acts of synthesis that, because they are the conditions of any experience, are not themselves experienced. These prior syntheses are made possible by the categories. Categories allow us to synthesize the self and the objects. One consequence of Kant's notion of transcendental apperception is that the "self" is only ever encountered as appearance, never as it is in itself."(강조는 필자) (Transcendental apperception - Wikipedia)

★'통각의 초월적 통일성' 또는 '초월적 통각의 통일': 자아의 초월적 동일성. 자아/의식이 모든 경험(또는 대상의 동일성)의 가능조건으로서 통일되어있음.

"이러한 초월적 통각의 근본 기능은 주어진 표상들을 지성의 기능들에 의해 “하나의 의식”27) 혹은 “하나의 경험”28)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이 때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의 경험”, “가능한 경험 일반”29), “의식의 시종 일관된 통일”30)에 대해 이야기할 때, 칸트가 자아 의식적인 한 사람의 모든 경험을 결합하는 독특한 종류의 통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다수의 감각 인상들과 현상을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대상의 지각 표상으로 종합하는 일 이상의 것, 개인의 경험을 구성하는 다수의 동시적이고도 계기적인 표상들의 상호 관계가 문제되고 있다. 칸트가 초월적 통각의 활동을 “나는 사고한다”에 의해 표상들을 자기에게 귀속시키는 것이라 설명한 것을 고려하면, “하나의 경험”, “의식의 시종일관된 통일”이 가능하려면 “나는 사고한다.” 의 작용이 모든 표상들을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나는 사고한다.”의 활동이 개별 주체에 의해 일어난 모든 일차적 차원의 사고 활동들을 연결할 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강지영, 136)

제2절 경험의 가능성을 위한 선험적 근거들에 대하여 개념은 직관--"가능한 경험의 분야 내지는 전 대상을 이루는 것"--과 대응되어서야만 비로소 내용을 가지고 대상과 관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험적인 순수한 개념들 역시 경험을 통해 객관적 실재성을 확보하는, "가능한 경험을 위한 선험적인 순전한 조건들이어야 한다."(A95)* 선험적인 순수 개념들은 "현상의 모든 경험적인 것을 도외시해도 경험의 기초에 놓여 있"다.(A96) "이제 이 범주들에 의해서만 하나의 대상이 사고될 수 있음을 우리가 증명"하는 것이 곧 범주의 초월적 연역이자 그것의 객관적 타당성을 정당화하는 방법이다.(A96-7, 강조는 필자)

*Q. 이 당위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A. 개념은 직관 없이는 공허하며, 순수개념도 마찬가지.

 개별 표상들이 서로 분리되어있다면 "결코 어떤 것이 비교되고 연결된 표상들의 전체인식으로 생겨날 수는 없을 터이다." 그러므로 감각의 일람작용에는 "[...]항상 종합작용이 대응하고, 수용성은 오로지 자발성과 결합해서만 인식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모든 인식에서 필수적으로 나타나는 세 겹의 종합의 근거이다. 곧, 직관에서 마음의 변양인 표상들을 포착하는 종합, 그것들을 상상에서 재생하는 종합, 그리고 그것들을 개념에서 인지하는 종합의 근거이다."(A97, 강조는 원저자, 밑줄은 필자)

★ 범주를 사용하는 것이 왜 정당한가? --> 범주를 사용해야만 경험이 가능하므로!

cf. 연역의 전략 "This is a general argumentative strategy that involves recognising a relationship of dependence, of some X on a synthetic act B. But B is a particular or empirical synthetic act, that in turn rests upon some pure, a priori synthesis A. Thus, all X must be conditioned by A."(Douglas Burnham with Harvey Young, Kant's Critique of Pure reason(Edinburgh Philosophical Guides), 2007,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7(이하 EPG), 79)

1. 직관에서 포착의 종합에 대하여 표상들은 모두 "마음의 변양으로서 내감에 속하는 것이며 [...] 그 안에서 정리되고 연결되고 서로 관계를 맺게 되어 있는 내감의 형식적 조건, 곧 시간에 종속한다." 인상들이 시간에 따라 잇따를 때, 마음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잡다를 쭉 훑어본 뒤(일별) 한데 묶어야 한다(통괄). 이 묶음의 결과가 바로 (한 개의) 표상이다. 따라서 포착의 종합이란 (이미 종합된 결과로서의) 하나의 표상을 산출하기 위한 작용이다. A120에서는 같은 작용이 "인상들을 자기활동 안으로 받아들"이는 활동으로 정의된다. 공간표상 및 시간표상 또한 포착의 종합이 다만 선험적으로 시행된 결과다. 특히 시간표상의 순수종합은 다른 경험적 종합의 가능조건이다.(EPG, 77) [잡다들을 서로 격리된 것이 아니라, 한 덩어리(한 표상)로 만들어줌.]

Q. 흥미로운 것은 이 종합이 근원적인 수용성인 감성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칸트가 서술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감성도 이미 낮은 수준에서나마 능동적인 것이 아닌가?

A. 종합은 상상력의 산물이므로 감성이 아닌 상상력의 작용이 아닐까? --> 그런데 A115 보면 감각기능에게로 귀속. --> A120에서 다시 상상력에 귀속.

2. 상상에서 재생의 종합에 대하여 재생의 경험적인 종합이란 "자주 잇따르고 수반하는 표상들을 마침내 함께 연합"시켜 한 표상이 다른 표상으로 마음을 이행시키는 작용이다. 그런데 칸트에 따르면 이와 같은 경험적 상상력의 발동은 "현상들 스스로가 이미 따르고 있는 일정한 규칙"에 의해 지배되지 않으면 발생할 수 없다.(A100) 현상 자체가 불규칙적이라면, 마음 속에서 최초로 규칙을 상상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상들은 마음의 외부에서도, 또는 실제로도 선험적이고 필연적으로 종합적 통일을 이루고 있다. 이 선험적 종합이 상술한 경험적 종합의 가능조건이다.

 그런데 현상이란 물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내감의 규정들에 의해 구속되는 것이다. 현상들을 지배하는 저 선험적 통일의 규칙은 바로 "상상력의 순수한 초월적 종합"으로부터 기원하며 이 또한 "마음의 초월적 작용 가운데 하나"다. 현상을 경험하려면 마음은 그 어떤 표상에 대해서도 그 속의 잡다한 표상들순차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하며, 선행한 것들을 망각하지 않고 "후속하는 것들로 나아가면서 선행한 것들을 재생"할 수 있야만 한다.(A102, 강조는 필자) 요컨대 포착의 종합만으로는 전체표상의 산출이 불가능하고, 잡다의 순차적 재생이 선험적으로 보장돼야만 비로소 전체표상이 완전하게 산출될 토대가 마련된다. [부분표상에 해당하는 각 덩어리들 사이에 순서 및 연관을 부여 --> 다만 전체표상의 완전한 산출은 인지의 종합에 이르러서야만 가능함. 각 부분표상들이 자기동일적 전체를 이루는 데까지는 도달 x]

3. 개념에서 인지의 종합에 대하여~4. 선험적 인식으로서 범주들이 가능함에 대한 예비적 설명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 한순간 전에 우리가 생각했던 바로 그것과 동일하다는 의식이 없다면 일련의 표상들에서 재생은 허사일 것이다. [...] 의식이야말로 잡다를, 곧 잇따라 직관되어 순차로 재생된 것을 하나의 표상으로 통일하는 바로 그것이"다.(A103, 강조는 원저자) 다양한 표상들에 없는 통일성[또는 다양한 표상들 사이에 부재하는 개념적 관계/연관(EPG, 78)]은 오로지 의식만이 부여해줄 수 있는데, 이를 위해 저 의식은 하나로 통일되어있을 것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 잡다를 특정한 개념에 상응하는 하나의 대상[하나의 완전한 전체표상]으로서 인지하기 위해서는, 즉 개념을 적용하고 대상에 통일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잡다를 수용한 '나'의 의식이 통일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째서 자아의 자기동일성이 대상의 인지[개념적 인식]를 위한 가능조건인가? 현상되는 대상은 사물 자체와 구별되는, 주관의 "감각적 표상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표상들로부터 이루어지는 인식, 또는 대상과의 관계맺음은 결코 임의적인 합치가 아니라, "일정한 방식으로 규정되게끔" 정해져있다.(A104, 강조는 필자) 대상이 인식의 대상이기 위해서는 "하나의 대상이라는 개념을 형성하는 그런 통일성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대상에 한 대상으로서의 규칙적 통일성을 제공하는 저 규정 또는 일종의 구속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사물 자체는 결코 아니다. 그것은 주관에게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 대상이 필연적으로 이루는 통일성은 다름아니라 표상들의 잡다의 종합에서의 의식의 형식적 통일성"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A105) 요컨대 주관이 통일되어있기 때문에 대상도 통일될 수 있다. [주관이 분열돼있다면, 다시 말해 표상마다 다른 주관이 대응되는 것이라면, ①어떻게 여러 표상들에 불과한 것이 <하나의 대상>으로 <인식될> 수 있겠는가? ②어떻게 '나'의 대상으로서 현상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통일된 의식이 곧 개념을 규칙으로 삼아 대상을 의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식의 통일이라는 초월적 근거[...] 이 근원적인 초월적 조건이 바로 다름아닌 초월적 통각이다."(A106-7, 강조는 원저자) 통각이란 어떤 표상을 자기 자신의 표상으로서 귀속시키는 작용self-attribution이다.

*Q. 저 '일정한 방식'은 경험적인 것인가, 선험적인 것인가?

A. 선험적인 것 같다. 어떤 대상이든 동일자로 인식한다는 법칙.

 그런데 칸트는, 의식이 규칙으로 활용하는 저 개념이 단순히 경험적인 것이라면 의식의 통일 역시 우연적인 통일에 불과해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통각의 초월적 통일성이 언제나 한 경험에서 [...] 이 모든 표상들을 법칙에 따라[=범주에 맞게] 연결시킨다. 만약 마음이 그것에 의해 잡다를 한 인식에서 종합적으로 결합하는 그 기능의 동일성을 잡다에 대한 의식에서 스스로 의식할 수 없다면, 의식의 이 통일성은 불가능할 터이니 말이다."(A108) 다시 말해 초월적 통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잡다들의 통일 역시 경험적인 데 불과한 게 아닌 불변하고 필연적이며 선험적인 규칙, 즉 법칙이자 범주인 것을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범주에 따라 표상을 종합하는 동일한 활동이 곧 대상의 통일성과 의식의 통일성을 동시에 가능케 하는 필요조건이다.* ★★뿐만 아니라, 의식이 규칙으로 활용하는 저 개념이 단순히 경험적인 것이라면 "현상들은 뒤죽박죽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그로부터 아무런 경험[=인식의 대상과의 관계맺음=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법칙들에 따른 연결=사고가 있는 직관=인식 자체=주관에게의 의미 가짐]도 형성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A111)** 요컨대 ★대상의 인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초월적 통각이 선험적으로 요구되고, 초월적 통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범주의 적용이 선험적으로 요구된다.*** 초월적 통각의 덕분으로 인해 범주의 사용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 된다.(EPG, 83) 또한 ★★저 인식이 임의적이지 않고, 일정한 규칙에 따른 것이기 위해서도 범주의 적용이 요구된다. 그런데 주관은 대상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인식한다. 따라서 범주는 실제로, 그것도 필연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이것이 칸트가 A판에서 그리는 초월적 연역의 윤곽이 무엇인지에 대한 필자의 해석이다. 마지막으로 칸트는 초월적[초험적] 대상으로서의 물 자체--아무런 직관도 함유하고 있지 않은, 순수한 개념--를 선험적이고 종합적으로 통일된 의식의 상관자로 설정함으로써 연역을 마무리짓는다. 그러므로 주관의 인식과 물 자체 사이의 관계맺음마저 [초월적 통각에 의거하는 한] 범주의 규정을 따라야 한다.(A110 --> 난해하기로 손꼽히는 대목이라고 한다. 내가 통일된 의식으로 존재하면 초월적 대상 역시 잡다의 원천으로서 통일된 것으로 존재하고, vice versa라는 해석 가능.)

*"[...] the synthetic act of the unity of consciousness and the synthetic act of presenting an object through a unity of presentations are the same. If Kant can show that the categories are the necessary condition for either of these ‘sides’, then the ‘Deduction’ will be complete."(EPG, 83)

**Q. 어째서 주관에게 의미를 가지기 위해 규칙이 법칙이 돼야 하는가? 왜 경험적 개념에 따르면 경험 자체가 성립하지 못하는가?

A. 애초에 동일자로 인식이 안 될 것이다.

***Q. 반대로 범주의 적용을 위해서도 초월적 통각이 요구되지 않나? 어느 방향을 논증하는 건지 자꾸 헷갈린다...

A. 맞는 말로 들리기는 하는데, 중점은 범주 덕분에 초월적 통각이 가능하다는 쪽에 실리는 것 같다.

Q. ★과 ★★(내가 생각하기에 범주가 대상 인식의 가능조건으로 성립할 수 있는 두 가지 경로. 초월적 통각을 경유하는 경로와, 그 자체로 규칙적 경험을 가능케하는 경로)의 관계=?

A. 초월적 연역과 형이상학적 연역 사이의 관계가 아닐까?

cf. 잡다의 연합은 그 근친성 덕에 가능하다.(A113)

 자연의 합법칙성마저 "통각이라는 우리의 주관적인 근거에 따르"는 것이다. "자연이라는 것 자체는 현상들의 총괄 이상의 것이 아니며, 그러니까 사물 자체가 아니라, 한낱 마음의 표상들의 집합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만일 자연이 이와 같은 초월적인 원천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 속에서는 한낱 경험적이고 우연적인 패턴만이 발견될 것인데, "그런 우연적인 통일은 사람들이 '자연'이라고 말할 때 생각하는 필연적인 연관 관계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A114)

Q. 자연법칙의 필연성을 미리 전제한 뒤 선험적 종합판단의 가능성에 대한 분석을 경유해 다시금 결론으로 도출하는 선결문제의 오류?

제3절 대상들 일반에 대한 지성의 관계와 이것들을 선험적으로 인식할[규정할] 가능성에 대하여

 칸트는 다시금 초월적인 통각이 인식의 가능조건임을 역설한다. 통일의 초월적 원리에 따르면 주관은 "[...]우리 자신의 일관된 동일성을 모든 표상들을 가능하게 하는 필연적인 조건으로서 선험적으로 의식한다."(A116) 그런데 재생의 종합에서 보았듯, 상상력이 없다면 표상들 사이의 '연관' 자체가, 즉 종합 일반이 불가능하다. 순수 상상력은 특수한 이 종합 또는 저 종합을 넘어 종합 자체를 가능하게 해준다.(EPG, 85) [그런데 초월적 통각 역시 종합적 인식이다.] "그러므로 상상력의 순수한 (생산적[재생적이지 않은]) 종합의 필연적 통일의 원리는 통각에 앞서 모든 인식, 특히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기초이다."(A118, 강조는 필자) 이처럼 상상력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진 초월적 종합, 순수 종합을 매개로 직관과 만나는 것이 바로 지성의 범주들이다. 상상력을 매개로 "[...]현상들은 지성과 필연적 관계를 맺는다".(A119) 그런데 상상력은 "잡다를 단지 그것이 직관에 현상하는 그대로 결합하는 것이"므로 감성적이기도 하다.(A124, 강조는 원저자) 그러므로 "지성에 속하는 개념들은 상상력의 매개로써만 감성적 직관과 관계 맺어질 수 있게 될 것이다."(A124) [잡다가 종합되고, 그렇게 종합된 게 개념화(또 다른 종합)돼야 하는데, 종합이 상상력의 일이므로, 상상력은 감성과 지성의 매개.]

 "경험적 인식의 모든 객관적 타당성(즉 진리)"는 지성의 선험적인 규칙들에 현상의 종합을 맡김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다. 자연의 법칙 또한 [그 자체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자연 안에 질서와 규칙성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작동하는 질서와 규칙성이다. "왜냐하면 이 자연통일은 현상들의 연결의 하나의 필연적인, 즉 선험적으로 일정한 통일이라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A125) 그리고 이런 선험적인 통일을, 나아가 그에 대한 선험적 종합 판단을 가능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지성 자신이다. "지성 자신이 자연 법칙들의 원천이요, 그러니까 자연의 형식적 통일[하나임]의 원천"이다.(A127)

cf. 지성=규칙 제공의 능력

순수지성개념들의 연역[B판]

제2절 순수 지성개념들의 초월적 연역

§15 결합 일반의 가능성에 대하여[--> 결합능력으로서 지성의 가능근거에서 오는 통일의 표상을 요구함] 감성을 통해 직관에서(=직관으로서) 수용되는 표상들의 잡다Mannigfaltigkeit는 지성의 작용 없이는 하나로 결합될 수 없다. 결합Verbindung은 자발적인 작용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종합Synthesis*이라 불리는 이 "결합이야말로 주관의 자기활동의 작용"인데, 결합의 개념통일의 표상잡다의 표상에 덧붙여진 결과다.(B130) 결합이란 곧 잡다들의 하나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 통일의 표상, 풀어 말해 '잡다의 통일성'이라는 표상은 모든 결합의 개념에 선행하므로 지성적 결합 자체의 층위에서는 찾아질 수 없고, "지성의 가능성 자체의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에서 찾아져야 한다.(B131)

*칸트는 모든 경우에서 종합이 분석에 선행한다고 말한다.

§16 통각의 근원적-종합적 통일에 대하여 "'나는 사고한다'는 것[표상]은 나의 모든 표상에 수반할 수밖에 없다."(B131, 강조는 필자) 그래야만 비로소 나에게 의미있는 표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직관의 모든 잡다'나는 사고한다'는 자발성의 작용에 따른 표상과 필연적인(=>선험적인) 관계를 맺는다. 순수 통각, 근원적 통각Apperzeption은 이처럼 모든 표상들이 '나는 사고한다'는 표상과 필연적, 선험적 관계를 맺음 또는 맺는 사태/모든 표상들이 필연적이고 선험적으로 자기동일적 자아에게귀속되는 작용 및 귀속된 상태다. 칸트는 순수 통각을 경험적 통각(="시간상에서 자신의 심적 상태의 변화에 대한 주관의 의식(강지영, 132, 강조는 필자)")과 구별하고자 하며, "여타의 모든 표상들에 수반할 수밖에 없는 '나는 사고한다'는 표상을 낳으면서, 모든 의식에서 동일자로 있는, 다른 어떤 표상으로부터도 이끌어낼 수 없는 자기의식"으로 정의한다. 이 순수한 통각[의식]의 통일은 "자기의식의 초월적 통일"이라 불리며 "이로부터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이 나"온다.(B132, 강조는 필자)

 그런데 통각의 초월적 통일은 표상들 사이의 "종합을 의식함으로써만 비로소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어진 표상들의 잡다를 한 의식에서 결합할 수 있음으로써만, 내가 이 표상들에서 의식의 동일성을 스스로 표상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통각의 분석적 통일은 어떤[통각의] 종합적 통일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하다."(B133-134, 강조는 원저자, 밑줄은 필자) 만일 여러 표상들을 한 의식에서 결합하고 파악할 수 없다면, 그 표상들은 '나의' 표상이 될 수 없을 것이고, "나는 내가 의식하는 표상들을 가지고 있는 그 수효만큼의 다채 다양한 자기를 가져야 할 터이"기 때문이다.(B134) 쉽게 말해 자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표상들을 결합하고 그것을 한 자아에게 귀속시킴으로써만, 즉 통각의 종합적 통일을 통해서만 비로소 자신이 자기동일적 존재임을 인식할 수 있다.*

*Q. 자아의 실질적 자기동일성의 가능조건이 아닌, 인식의 가능조건이기만 한 것인가?

A. 대상 인식을 위해서 자아의 동일성이 필요하고, 그 동일성을 인식하려면 표상들과의 종합적 통일을 살펴봐야 하는 것. 나의 표상이 나에게 속한다는 것 자체는 분석명제.(J씨)

[정리] 흄에게서와 달리, 칸트에게 자아의 동일성에 대한 의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통각의 종합적 통일(=서로 다른 시점의 서로 다른 표상들을 동일자로 인식하는 '나'는 같은 '나'/"[이미지1+이미지2+이미지3 =]을 경험한 내가 하나여야 한다."(이행남 선생님 수업)이 통각의 분석적 통일(=서로 다른 시점의 '나'는 같은 '나')의 전제가 됨으로써 자기동일적 자아에 대한 의식이 가능하다. 칸트의 입장에서 '지각의 다발 외에는 그 어떤 자기동일적 자아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흄의 테제는 '그 지각의 다발이 경험되려면 자기동일적 자아가 전제된다'는 테제로 반박될 것이다.

 그런데 저 표상들의 결합은 말하자면 저 표상의 원천인 대상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성만이 비로소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지성 자체는 다름아니라 [범주를 활용해] [표상들을] 선험적으로 결합하는, 그리고 ②주어진 표상들의 잡다를 통각의 통일 아래에 포섭하는 능력이며*, 이 통각의 원칙이 전 인간 인식에서 최상의 원칙이다."(B135, 강조 및 넘버링은 필자) 다시 말해 '의식이 통일되어있다'(통각의 필연적 통일의 원칙)는 명제는 분석명제이지만, ★지성의 종합(①표상들의 종합+②그 표상들을 '나는 사고한다'와 종합)이 저 통각의 종합적 통일의(그리고 그로써 통각의 분석적 통일의) 가능조건이다.

*Q. 결합한 뒤 포섭? 또는 포섭한 뒤 결합? 선후관계가 있는 것인가?

A. 결합의 대상이 되는 순간순간의 표상들도 '나의' 표상이 되어야 할 테니 포섭이 먼저여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선후관계가 존재하는 문제는 아닌 것 같기도 하다? --> 그러나 범주가 통일의 조건이려면 결합이 선행돼야 하는 것이 아닌가? / 동시에 발생, but 인식 순서상 포섭이 뒤늦을 수 있음(S씨) / 포섭의 능력 자체가 범주에 기반해서만 발휘될 수 있다. 선후관계의 문제 아님(J씨) --> 그러려면 결합이 먼저 되는 게 맞는 것 같다.

§17 통각의 종합적 통일 원칙은 모든 지성사용의 최상 원리이다 "'직관의 모든 잡다는 공간, 시간의 형식적 조건에 종속한다'는 것이" 감성의 최상의 원칙이었다면 "'직관의 모든 잡다는 통각의 근원적-종합적 통일의 조건에 종속한다'는 것이" 모든 지성사용의 최상 원리이다.(B136) 직관이 주어졌다면 그것은 감성의 원칙을 만족시킨 것이고, 직관이 한 의식에서 결합되었다면--'나는 사고한다'는 통각의 자기귀속 작용의 대상이 되었다면--그것은 지성의 원칙을 만족시킨 것이다.

 객관(Objekt)이란 직관의 잡다가 개념 안에 결합될 것을 요구하는데, 이 결합은 의식의 통일성을 요구한다. "따라서 의식의 통일은 표상들이 한 대상과 관계 맺음을, 그러니까 표상들의 객관적 타당성을, [...] 결정하는 바로 그것이며, 그 위에 따라서 지성의 가능성조차도 의거한다."(B137)* 감성만으로는 직관의 잡다가 주어질 뿐 '인식'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인식은 그 잡다들의 ①결합을 요구하므로, "의식의 종합적 통일은 모든 인식의 객관적 조건이"며--이 명제는 칸트에게 분석명제다--그렇게 결합되어 인식된 객관이 ②"나에 대해 객관이 되기 위해서"도 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B138, 강조는 필자) 그러나 이와 같은 인식의 원칙은 감성적 직관을 수용하는 데다 시공간을 기초로 그것을 수용하는 인간만의 것이다. 예컨대 감성을 거치지 않고 "표상작용을 통해 동시에 이 표상의 객관들이 실존하게 될 터인 [신적] 지성**은 의식의 통일에 대해 잡다의 종합이라는 특수한 작용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지성은 "다른 어떤 가능한 지성[...]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개념도 가질 수가 없다."(B139)

*Q. 초월적 연역에서 칸트는 (1)범주가 의식의 통일을 위해 필요하다. (2)의식은 반드시 통일돼있다. (3)따라서 범주는 반드시 동원된다. 를 증명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의식의 통일성은 지성의 가능조건이고(B137), 지성의 결합은 의식의 통일성의 가능조건이면, 순환의 오류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A. (1)이 틀렸다. 범주가 의식의 통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의식의 통일에 대한 인식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내 표상 다 내꺼! 이거는 분석적으로 당연한 건데, 그래서 나의 동일성을 실제로 의식하려면 표상들 사이를 범주를 통해 결합해봐야 한다.(J씨)

**"주어진 대상들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표상함으로써 동시에 자신이 대상들을 주고 산출해 낼 터인 신적인 지성"에게 지성은 무의미하다.(B145)

§18 자기의식의 객관적 통일은 무엇인가 "직관에 주어진 모든 잡다를 객관이라는 개념에서 합일되게 하는 것"인 의식의 초월적 통일과 의식의 주관적 통일은 구분되어야 한다.(B139) 의식의 주관적 통일은 경험적 조건에 의존하는, 내감의 우연적인 작용이고, 단지 경험적 타당성만을 가진다. "어떤 사람은 어떤 말Wort의 표상을 어떤 사상(事象)Sache과 결합하고,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사상과 결합한다."(B140)* 반면 의식의 초월적 통일은 직관의 잡다와 '나는 생각한다'는 일자 사이의 필연적 관계맺음인 지성의 순수 종합에 해당하고, 선험적인 직관들 역시 그에 종속하는 것으로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타당성을 가진다. 의식의 주관적 통일은 의식의 초월적 통일 덕분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각자가 경험적으로 각 개념을 다양한 표상과 연관짓고 사고할 수 있는 경험적 지성사용.(J씨) --> 일반적인 개념화는 주관마다 다를 테니까. 그러나 순수개념을 사용해 표상을 결합하는 과정 자체는 모든 주관에게 동일함/객관적임.

§19 모든 판단들의 논리적 형식은 그 안에 함유되어 있는 개념들의 통각의 객관적 통일에 있다 "판단이란 다름아니라 주어지는 인식들을 통각의 객관적 통일로 가져가는 방식"이다.(B141, 강조는 필자) 판단이 표시하는 통일의 객관성은 재생적 상상력의 법칙에 따르는 통일의 주관성과 대비되며, 관계사를 통해 표현된다. 판단 속의 관계사copula는 "표상들의 근원적 통각과의 [선험적, 필연적] 관계맺음 곧 현상들의 필연적 통일을 표시"한다. 예컨대 '물체는sind 무겁다'는 판단에서 물체와 무거움의 표상 각각은 "[경험적으로 필연적으로 서로 소속한다고 표현된 것이 아니라] 통각의 필연적 통일의 힘에 의해 직관들의 종합에서 [선험적으로 필연적으로] 서로 소속"하는 것으로 표현된다.(B142, 강조는 필자) 이처럼 통각의 초월적 통일의 원칙에 따라 판단해야만, 즉 표상들 사이의 통일관계를 객관적인 것으로 설정해야만 객관적으로 타당한 판단이 가능하다. 이에 반해 연합의 법칙에 따르는 판단(e.g. '내가 한 물체를 들고 있을 때, 나는 무게의 압박을 느낀다')은 표상들 사이의 통일관계가 경험적인 우연 및 주관적 조건에 달려있으므로 주관적 타당성만을 가진다.

Q. 객관적으로 타당한 판단에서 표상들이 서로 객관적으로 통일되어있는 것이 어째서 통각의 힘 덕분인가? 통각의 힘의 덕을 본다면 주관적으로 타당한 판단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cf. 판단에 대한 이상의 정의는 (+)판단을 초월적 통각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킴으로써(판단=초월적 통각에 의한 표상들 사이의 객관적 통일) 판단에서 연역되는 범주 역시 초월적 통각과 연결시켜주지만, (-)굉장히 정당하게 자아에게 귀속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즉 통각의 초월적 통일성의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고 심지어는 그것을 만족시켜야만 성립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내감에 대한 판단들을 범주의 활용영역에서 배제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20 모든 감성적 직관들은 직관의 잡다가 한 의식 안에 모일 수 있는 조건인 범주들에 종속한다 "[...]주어진 표상들의 잡다를 통각 일반 아래로 보내는 지성의 이 작용[직관의 통일]은 판단들의 논리적 기능이다. 그러므로 [...] 모든 잡다는 판단하는 논리적 기능 가운데 하나와 관련하여 규정된다."(B143) 이러한 범주(=판단하는 기능=주어진 잡다를, 판단하는 논리적 기능 가운데 하나와 관련해 규정하는 능력)의 규정을 통해서만 비로소 잡다는 통일된 의식에 귀속될 수 있고, 그로써 비로소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직관의 잡다는 반드시 범주들에 종속한다(인식의 대상이 되기 위해!).

§21 주석 이상의 결론으로부터 순수 지성개념의 연역은 시작의 단계를 밟은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잡다가 경험적 직관에 주어지는 방식[=시공간]은 도외시해야만 했는데, 그것은 범주를 매개로 지성에 의해 직관에 덧붙여지는 통일만을 주목하기 위해서"였다.(B144) 범주의 적용은 그에 앞서 잡다가 "종합작용에 독립해서" 비자발적으로, 즉 감성적으로 주어질 것을 전제로 한다. 지성은 "자기만으로는 아무런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단지 객관으로부터 그에게 주어져야만 하는 인식을 위한 재료, 즉 직관을 결합하고 정리할 뿐이다."(B145, 강조는 필자)

cf. 범주들이 왜 하필이면 12개고 그 내용이 왜 그러한가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연유를 댈 수 없다. [인간의 조건이다.]

§22 범주는 경험 대상들에 대한 적용 이외에는 사물 인식을 위한 어떠한 다른 용도를 가지지 않는다 대상의 인식은 직관의 주어짐과 개념[범주]를 통한 사고 모두를 요구한다. 사고가 적용될 만한 직관이 없다면 사물의 인식은 불가능하다. 순수 직관에 대한 범주적 판단은 대상에 대한 선험적 인식[선험적 종합판단]을 가능케 하지만, 이때의 대상은 말하자면 이념적이고 비경험적인 대상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 모든 수학적 개념들은 그것만으로는 [직관이 관여되어있지 않으므로] 인식이 아니다. 그러나 공간, 시간상의 사물들은 [...] 경험적 표상을 통해서만 주어진다. 따라서 순수 지성개념들은 (수학에서처럼) 선험적인 직관들에 적용되는 경우에조차, 이 선험적인 직관들이 그리고 이것들을 매개로 한 지성개념들이 경험적 직관들에 적용될 수 있는 한에서만, 인식을 만들어낸다. [...] 다시 말해 범주들은 단지 경험적 인식[경험]의 가능성을 위해서만 쓰인다."(B147, 강조는 필자)

Q. 수학적 인식도 인식일 텐데 어째서 순수지성개념이 '경험적' 직관에 적용될 수 있는 한에서만 인식이란 말인가?

A. 경험의 영역으로도 확장될 수 없는 인식은 인식이 아니다. 수학도 경험적 타당성을 가져야 한다.(직관의 공리들 참고) --> 예컨대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사고될 수는 있지만, 경험에 적용될 수는 없다. 칸트의 입장에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사고만 가능하지 인식 가능한 영역에 속하지는 못할 것이다. 인간은 유클리드 기하학 체계에 맞는 현상만 수용하므로.

§23 범주가 오직 사물에 대한 경험적 인식[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데에만 쓰인다는 명제는 "대상들과 관련해 순수 지성개념의 사용 한계를 규정"해준다. 시공간은 초월적 관념성을 가지므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서는 아무것도 표상하는 바가 없다. [그러나] 순수지성개념들은 이런 제한에서 자유롭다. [...] 그러나 개념들의 이런, 우리의 감성적 직관 너머까지의 확장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B148) 그것의 가능성조차 판단할 수 없는 객관에 대한, 직관 없이 공허한 개념들, "객관적 실재성이 없는 순전한 사유형식들"만이 산출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험적 직관만이 사고 형식들에게 의의와 의미를 줄 수 있다."(B149, 강조는 원저자) [칸트의 초월철학이 어떤 양상에서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를 종합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4 감관의 대상 일반에 대한 범주들의 적용에 대하여 "[...] 선험적인 감성적 직관의 잡다에 대한 통각의 종합적 통일"은 "그 아래에 우리 (인간의) 직관의 모든 대상들이 종속해야만 하는 조건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기에 한낱 사유형식인 범주들이 객관적 실재성, 곧 직관에서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대상들에 대한 적용성을 얻는다. 그리고 이 때 대상들은 오직 현상으로서의 대상[뿐]이다."(B150-151) 그런데 "선험적으로 가능하고 필연적인 감성적 직관의 잡다의 종합은 형상적" 종합으로서, "직관 일반의 잡다와 관련한 순전한 범주에서 생각되는 종합, 즉 지성결합"과 구별해서 "상상력의 초월적 종합이라 일컬어야 한다. 상상력이란 대상의 현전 없이도 그것을 직관에서 표상하는 능력이다."(B151, 강조는 필자) [잡다일 뿐인 것을 하나의 대상이라고 상상하는 능력을 일컫는 것 같기도 하다.] 상상력은 "그 아래에서만 지성개념들에 상응하는 직관[이] 제공[될] 수 있는 주관적 조건이라는 점에서, 감성에 속한다."(B151, 강조는 원저자) 그러나 동시에 상상력은 자발적인 방식으로 감성을 선험적으로 규정하므로, 범주들에 따라 직관을 종합하는 작용인 상상력의 초월적 종합은 지성이 감성에 적용되는 지성적 작용이기도 하다. 상상력의 초월적 종합은 선험적 종합판단의 가능성을 설명해주므로 단순히 경험적인 법칙들에 종속되는 재생적 상상력과 구별된다.

Q. 형상적 종합(=상상력에 의한 초월적 종합)과 지성적 종합이 뭔지 모르겠다.

A. ★상상력에 의한 초월적 종합이란 시공간 표상 자체의 종합 및 그에 따라 가능해진, 구체적 시공간에서 주어진 잡다의 범주적 종합을 뜻하는 것 같다. 이로써 지성적 종합을 통해서는 단순히 사고 또는 판단의 형식에 불과했던 범주는 초월적 상상력의 형상적 종합을 통해 비로소 구체적인 감성적 직관과 만나 현상으로서 대상에 대한 인식을 산출하고, 뿐만 아니라 [순수직관과도 연결되어] 선험적 종합판단의 가능조건으로서까지 활약하게 된다.

cf. 강기호 (2009). 칸트의 <개념의 분석론>에서 종합. 철학논총, 56, 323-344

 "칸트는 재판 연역에서 감성적 직관의 다양에 대한 종합을 형상적 종합(synthesis speciosa)이라고 부르고, 이것과 구별해서 직관 일반의 다양에 관해서 한갓 범주 중에서 사고되는 종합을 오성의 결합 즉 지성적 종합(synthesis intellectualis)이라고 한다. [...] 지성적 종합은 한갓 범주 중에서 사고되는 종합 혹은 단지 통각의 통일에만 관계하는 종합이다. 즉 지성적 종합은 대상이 주어지는 직관 형식의 성격을 추상하고 오직 통각의 형식적 원리만을 포함하기 때문에, “상상력의 도움이 전혀 없는”(B 152) 오성의 판단 기능에서 발견되는 오로지 오성에만 속하는 종합이다. 다시 말해서 “주어진 표상들의 다양이 통각의 객관적 통일에 귀속하는 판단의 활동성이다.” 이에 반해 형상적 종합은 인간의 직관 형식, 특히 내감의 형식인 시간에 관계하는 종합으로서, 비로소 우리의 대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종합이다. [...] 통각의 통일은 범주에 의한 지성적 종합을 요구하고, 이 관계를 통해 칸트가 강조하는 것은 다만 범주의 필연적 통일 즉 판단에서 범주의 필연성이다. 이러한 증명으로는 사고함에 있어서 한갓 형식에 불과한 범주가 필요함만을 보일 뿐이지, 아직 인식함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인간의 감성적 직관의 대상에 적용되는가(범주의 실재성)는 설명되지 않는다. 범주는 경험적 직관의 다양의 종합과 연결되지 않다면 그 자체만으로는 내용이 없는 논리적 형식에 불과할 뿐이다. [...] 즉 오성에 의해 순수한 오성 개념 즉 범주가 상상력에 의한 다양의 종합에 적용되지 않는 한, 통각의 통일은 일반논리학이 다루는 분석적 통일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 즉 칸트는 하나의 증명과정을 두 가지 증명단계로 나누어 설명함으로써, 첫 번째 증명단계에서는 ①직관 일반의 다양의 규정들로서의 순수범주가 직관 일반의 대상에 대해서 필연적 타당성을 가짐을 증명하고, 따라서 단지 통각의 통일에 종합작용의 필요성을 보여 주었다면, 두 번째 증명 단계에서는 ②순수범주들은 구체적으로 상상력에 의한 시간의 선험적 종합을 규제하는 원칙들로서, 따라서 시간이라는 순수직관과 관계할 때 비로소 시, 공간에 주어지는 대상들 즉 현상들에 대해 객관적 실재성을 갖는다는 점을 증명한다. [...] 우리 인간의 오성은 그 자신 직관의 능력이 아니기 때문에, 비록 직관이 감성에 주어져 있더라도, 그것을 오성 자신 속에, 이를테면 자기 자신의 직관의 다양을 결합하고자,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성의 종합은 오성만을 단독으로 고찰한다면, 통일작용 이외의 딴 것이 아니요, 오성은 이런 통일 작용을 감성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의식한다. 그러므로 한갓 사고형식으로서의 범주가 객관적 실재성을 가지려면, 즉 경험 대상에 적용되려면, “주어진 표상들의 다양을 통해서 통각의 종합적 통일에 적합해 있는 내감을 규정”(B 150)해야 한다. [...] 직관의 다양이 규정되려면, 먼저 자발성의 능력인 상상력에 의해 종합되어야 하며, 이렇게 규정된 직관만이 즉 상상력에 의한 직관의 종합만이 순수오성개념과 연결된다. 따라서 상상력의 선험적[초월적] 종합 없이는 오성은 한갓 일반 논리학의 사유능력일 뿐 내감에 대한 영향은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오성의 형식인 통각의 통일 즉 범주도 상상력의 선험적[초월적] 종합을 전제함으로써만 그것의 객관적 실재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pp.337-341, 강조와 넘버링은 필자)

☆☆☆ '내감에 의해 현상되는 나와, 있는 그대로의 나는 같은 나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칸트는 내감 역시 "우리 자신에 의해 촉발되는 대로만" 이루어지므로 "우리는 내적 직관과 관련해서, 우리 자신의 주관을 오직 현상으로서만 인식하지만 주관 자체인바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말한다.(B156) 이는 두 가지 사정 때문에 필연적이다. 첫째, "우리는 전혀 외적 직관의 대상이 아닌 시간을 우리가 그어 볼 수 있는 한에서, 하나의 직선의 도상을 빌리지 않고서는 달리 표상할 수가 없다". 또한 "내감의 규정들은 우리가 외감의 규정들을 시간상에서 규정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시간상에서 현상들을 정리할 수밖에 없다".(B156) 따라서 외감에서와 마찬가지로 내감에 대해서 역시 촉발되는 대로의 직관만이 가능하다.

Q. "통각과 통각의 종합적 통일은 결코 내감과 한 가지가 아니다."(B154) =?

A. 25절에서 설명되지만, 내감은 문자 그대로 inner sense, 경험적인 자기의식인 반면--그러므로 직관을 요구하는 반면--통각은 선험적인 자기의식, 오직 지성적 종합만으로도 성립하는 '직관 없는 사고'다.

§25 반면 통각의 종합적 근원적 통일에서의 자아에 대한 의식은 "내가 현상하는 대로도 아니고, 나 자체인 대로도 아니며, 오직 내가 [하나로서] 있다는 것"뿐으로, 이 존재의 표상은 직관 없는 사고일 뿐이다.(B157) 인간의 현존재에 대한 규정 역시, 그에게 지성적인 직관이 불가능한 한 "오직 내감의 형식에 따라, 내가 결합하는 잡다가 내적 직관에 주어지는 특수한 방식에 의해서만 생길 수 있다." (B158)

§26 순수 지성개념들의 보편적으로 가능한 경험적 사용에 대한 초월적 연역 지각 또는 경험적 의식은 "경험적 직관에서의 잡다의 합성"인 포착의 종합을 통해 가능하다. 포착의 종합은 시공간이라는 형식에 맞게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 종합 자체가 이 형식에 따라서만 생길 수 있으니 말이다."(B160, 강조는 필자) 그런데 모든 표상을 규정하는 시공간 역시 그 자체로 잡다를 함유하고 있는 직관들로서, 통일의 규정과 함께 표상된다. 이 통일은 오직 범주의 적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범주들은 [시공간 표상의 잡다를 비로소 종합함으로써] 바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고, 그러므로 또한 경험의 모든 대상에 선험적으로 타당하다(B161)."

*Q. 잘 이해했는지 자신이 없다.

A. 시공간도 잡다인 한, 범주를 통해 통일돼야 한다.

Q. B162-3도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

A. 공간상에 표상되는 집과, 시간상에 표상되는 물의 어는 과정이 있을 때, 이것들을 지각하려면 각각 크기의 범주, 인과의 범주가 작동해야 한다. 시공간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라 범주가 있어야 한다.(J씨)

☆☆☆ 범주들은 현상 그리고 모든 현상의 총괄인 자연에 선험적 법칙들을 지정한다. "그 선험적 법칙들은 자연으로부터 도출된 것이 아니요 [...] 만약 그렇다면 그것들은 한낱 경험적일 터이다".(B163) 그런데 어째서 자연현상의 법칙들이 순수한 지성의 능력과 합치해야 하는가? "현상들이 그 자체로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관이 감각기능을 갖는 한에서, 주관과 관계해서만 실존하는 것이듯이, 법칙들도 현상들 안에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들이 의존하고 있는 주관이 지성을 갖고 있는 한에서, 그 주관과 관계해서만 실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한갓 표상으로서의 현상들은 연결하는 자가 지정해 준 법칙인 그 연결의 법칙 아래에 종속한다."(B164) 그러나 순수한 지성 능력은 [자연에 대한] 경험 일반의 선험적 법칙들만을 지정할 뿐, 특수하고 구체적인 법칙들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경험이 요구된다.

§27 순수 지성개념들의 이 연역의 성과 "우리는 범주들에 의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대상도 사고할 수가 없고, 저 개념들에 대응하는 직관들에 의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사고된 대상도 인식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인간의 모든 직관은 감성적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오직 가능한 경험의 대상에 대한 것 이외에는 어떠한 선험적 인식도 가능하지가 않다." 칸트는 이 결론에 흥미로운 각주를 덧붙인다. 바로 "[사물에 대한 인식이 아닌] 사고작용[함]에서 범주들은 우리의 감성적 직관의 조건들에 제한받지 않고 [...] 직관이 결여된 곳에서도 객관에 대한 사고는 주관의 이성사용과 관련해서는 역시 참되고 유용한 결과를 가질 수 있"다는 내용이다.(B166) 

cf. 흄의 회의론은 객관적으로 타당한 판단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주관적 필연성만이 가능하다면,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다른 사람과 그의 주관이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가의 방식에 순전히 의존"해서는 지식을 얻을 수 없다.(B168)

cf. 이하 Paul Guyer(Ed.), Cambridge Companion to Kant's Critique of Pure Reas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이하 CC), pp.139-150에 대한 요약문

 B판의 초월적 연역은 두 단계로 나뉜다. 첫째, 칸트는 경험으로부터 모든 시간적 성격을 추상한 뒤 통각[의식]의 통일성과 판단--곧 범주--사이에 직접적인 연결을 확립하고자 한다. 둘째, 칸트는 직관의 시간적 성격에 대한 고려를 논의에 도입한 뒤, 범주의 적용은 오직 현상에 대한 인식만을 낳으며, 범주는 통각의 통일성뿐 아니라 시공간의 성립 자체를 위한 필요조건이기도 함을 밝히고자 한다.

 '나는 사고한다'라는 표상[순수한 통각]은 모든 표상에 동반될 수 있는 자발성의 작용이어야 한다. 더 정확하게는, 내 표상들 사이의 분석적 통일(=그들이 각각 나에게 귀속된다)뿐 아니라 내 표상들 사이의 종합적 통일(=종합의 결과로서 그들 자신들이 서로서로 연관되면서 나에게 귀속된다)을 표현해야 한다. 순수한 통각을 도입함으로써 칸트는 형이상학적 연역을 통해 단지 조건적으로만[판단의 형식이 열두 가지라면, 그것의 논리적 기능을 가능케 하는 범주도 열두 가지라는 식으로] 획득되었던 범주의 타당성을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우리의 가능한 모든 경험의 가능조건으로 격상시킨다. 이와 같은 목표에 이르기 전에 칸트는 통각[의식]의 통일성을 단지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것[경험의 가능조건]으로 확립함으로써 이에 상응해 판단 또한 '범주에 따른 [주어와 술어 사이] 필연적 통일'에 대한 주장으로서 다소 강하게 정의한다. 이로써 의식의 (단지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통일성으로서의 통각은 단지 주관적으로 타당한 것(e.g.나는 물체를 무겁게 느낀다)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타당한 주장들(e.g. 물체는 무겁다)과 동일시되고, 객관적으로 타당한 주장들의 필요조건인 범주를 초월적 통각의 가능조건으로도 성립시킬 수 있게 된다. 이제 범주는 통일된 의식에 포함되는 모든 경험, 즉 나의 모든 경험에 필연적으로 적용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역의 문제는 나에게 정당하게 귀속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수많은 주관적으로 타당한 경험들을 범주의 적용영역 바깥으로 추방한다는 것이다. 통각과 판단 사이의 연결고리를 성립시키려다 '나는 사고한다'는 표상이 모든 표상에 동반될 수 있어야 한다는 최초의 주장이 도리어 약해져버린 셈이다.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칸트는 방향을 돌려 감성의 구체적 성격을 도외시한 분석으로부터, 도외시하지 않는 분석으로, 경험의 시간성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로써 인간에게 통각[의식]의 초월적 통일성이란 시공간 속 경험의 통일성에 해당함이 밝혀질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나의 직관 속에 함유된 잡다는 범주의 적용을 통해 비로소 자기의식의 필연적 통일성에 소속되는 것으로 표상되고, 이에 따라 주어진 직관에 대한 모든 경험적 의식은 순수한 선험적 자기의식 하에 포섭된다. 이처럼 범주들의 객관적 타당성은 시공간적이고 경험적인 직관에 대한 통각[의식]의 필연적 조건으로 화한다. 같은 주장이 상상력을 매개로 다시 한 번 이루어질 수 있다. 지성에 의한 형상적 종합은 '상상력의 초월적 종합'으로서 감성에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의 직관의 잡다는 시간적으로 연장돼있으므로 따라서 잡다의 통일성에 대한 의식은 상상력에 의한 재생을 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범주에 따르는 직관들의 종합 능력은 이제 감성의 구체성을 고려하는 이상 상상력에 의해 행해져야만 한다. 지성에서 상상력으로의 이와 같은 이행은, 통각의 초월적 통일성을 산출하기 위해 범주에 따라 우리의 직관을 종합하는 능력[상상력의 초월적 종합]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에 다름아니다.  

 이와 같은 방향성의 전환은 두 가지 이유를 가진다. 첫째, 이로써 칸트는 범주의 종합이 현상에만 적용되며, 범주를 통해서라 하더라도 물자체에 대한 인식은 얻을 수 없음을 강조할 수 있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마저, 우리에게 현상하는 방식대로만 알 수 있지 그 자체의 모습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 자체에 대해서 범주를 통해 '사고'하는 일만은 가능한 것으로 남는다. 둘째, 이로써 칸트는 통각의 통일성의 필요조건으로서 범주의 역할이, 감성에서 주어지는 시공간적 직관의 통일을 위한 필요조건으로서의 역할과 동일함을 확립시킬 수 있다. 그런데 경험적 직관뿐 아니라 시공간 역시 직관으로서 동일자가 되기 위한 종합적 통일을 요한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의 통일성) 자체도 통각의 통일성, 범주에 따른 잡다의 종합에 의한 것이다. 이제 통각의 통일성 그리고 범주의 사용은 시간과 공간 자체의 가능성을 위한 조건이라고 주장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에도 문제가 있다. 첫째, 범주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공간의 통일을 가능케 하는지가 모호하다. 둘째, 시공간이 내 의식의 범위보다 넓은 것으로 표상될 수 있기 때문에 시공간의 통일성이 통각의 통일성과 일치한다는 주장의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러나 26절 후반부의 논의를 통해 시공간 자체의 통일성이 아니라 시공간 속의 특수한 대상들에 대한 판단 또는 표상을 위해 범주가 필요하다는 대안적 주장이 제시된다. 그러므로 시공간의 통일성 자체가 아니라 시공간 속의 대상들의 통일성이 범주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원칙학에서 칸트는 시공간 속 대상들의 통일성[자기동일성]을 표상하기 위해 열두 범주들이 각각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어야 하는지 밝힌다.


초월적 분석학 제2권 원칙의 분석학 "원칙의 분석학은 판단력을 위한 규준으로서, 선험적 규칙들을 위한 조건을 포함하는 지성개념들을 현상들에 적용하는 법판단력에게 가르친다."(A132=B171, 강조는 필자)

서론 초월적 판단력 일반에 대하여 칸트는 먼저 지성 일반과 판단력의 차이를 다룬다. "지성 일반이 규칙들의 능력"이라면 "판단력은 그런 규칙들 아래에 [무엇인가를] 포섭하는 능력"으로(A132=B171) "규칙들을 올바르게 쓸 줄 아는 능력"이다.(A133=B172) (주어진 것의 내용에 따라 적절한 규칙에 적용시키는 능력 같다.) 지성은 규칙들의 능력이기 때문에 주입하기라도 할 수 있지만, 판단력은 일종의 재능으로서 단지 숙련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편적인 규칙을 추상적인 수준에서 아주 탁월하게 이해하는 사람도, 판단력이 결여되어있으면 구체적인 상황/사례에서 자신이 아는 그 규칙이 적용되어야 할지 말지 판별하지 못한다. 

 일반논리학은 인식의 대상 일체를 도외시하기 때문에 판단력에 대한 지시규정을 내려줄 수 없지만, 초월 논리학은 오히려 "순수한 지성의 사용에 있어서 판단력을 일정한 규칙을 통해 바로잡고 안전하게 하는 것이 그것의 본래 과업"이다.(A135=B174) 대상 인식의 선험적 가능조건을 따지는 초월철학의 이념 하에서 판단력의 초월적 교설은 "그 아래에서만 오로지 순수 지성개념들이 사용될 수 있는 감성적 조건, 곧 순수 지성의 도식기능" 그리고 "이 조건들 아래서 순수 지성개념들로부터 선험적으로 흘러나와 여타의 모든 선험적 인식의 기초에 놓여 있는 종합 판단들, 곧 순수 지성의 원칙들을 다룬다."(A136=B175)

판단력의 초월적 교설 

제1장 순수 지성개념들의 도식기능Schematismus에 대하여

cf. "This has the job of showing ‘how’, ‘in what way’ and ‘with what critical implications’ the categories have legitimate application. The ‘how’ is the ‘Schematism’ chapter, which provides a way for pure categories to apply to objects. [...] At stake are no longer the elements of our experience (intuitions and concepts), and the question is no longer their legitimacy. Rather, the question is how must these elements ‘come together’ such that judgement happens."(EPG, 105, 강조는 필자)

"The schema is both law-like(‘intellectual’ as the category) and intuition-like(or sensible). It is thus the third term that mediates between these two sources of cognition, making pure synthetic judgements possible. Once Kant sets up the nature of schematism in this way, however, it becomes clear that even in the case of ordinary concepts and presentations (the plate from earlier; his new example is a dog), schemata are required. [...] We see, then, that all synthetic cognitions rest upon schematism, and thus the problem of how transcendental schematism is possible – the third term between pure categories and pure intuitions – becomes all the more pressing. Kant will conclude that schematism is a procedure for judgement. Transcendental schemata provide the minimum framework of procedural rules for any application of empirical concepts in judgement."(EPG, 107, 강조는 필자)

"‘[H]ence’, Kant writes, the categories are restricted by schematism and ‘have, in the end, no other use than a possible empirical one’ (A146=B185). Notice the word ‘possible’. As we have seen, it is a characteristic of transcendental philosophy that it investigates the possibility of cognition. The schema, again, is not an image because it is not actual cognition; rather, it is a procedure or function by means of which sensible cognition becomes possible. [...] The schemata ‘realise’ the categories (which are otherwise merely logical functions of unity) (A146=B186). This verb has at least two meanings here. First, the categories are brought to the real through schematism: they come to have a relation to possible experience and thus things that may be said to be ‘real’. Second, however, the categories are themselves made real as concepts, [...] made real in a spontaneous synthetic act of the imagination. On the other hand, schemata are said to ‘produce’ time, give it possible content, order and totality (A145=B184–5)."(EPG, 108, 강조는 필자)

 "In short, time too is ‘realised’ by the schematism of the transcendental imagination; the time we recognise as being time is not original, but the product of schematism. [...] through schemata pure, a priori judgements become possible. But in each case, what is this meaning, and what are these judgements? This Kant will turn to next, providing for each class of category a transcendental argument aiming to show the validity of some a priori judgement by describing how experience becomes possible through it."(EPG, 109, 강조와 밑줄은 필자)

 칸트는 개념이 어떤 대상을 포섭하기 위해서는 개념의 표상과 대상의 표상이 동종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순수지성개념과 경험적 직관은 이종적이다. 순수지성개념(e.g. 인과성 자체)을 대체 어떻게 경험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판단력의 초월적 교설이 해결해야 할 물음은 '도대체 어떻게 순수지성개념들 아래에 [그것과 절대적으로 이종적인] 경험적 직관을 포섭시킬 수 있는가?' 또는 '어떻게 순수지성개념들을 현상으로서의 경험에 적용(=판단)할 수 있는가?'이다. 칸트는 이로부터 "한편으로는 범주와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현상들과 동종적"이어서 범주를 현상에 적용 가능하도록 해주는 제3의 매개적 표상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 표상의 이름은 바로 '초월적 도식'인데, 초월적 도식은 "순수하면서도(아무런 경험적인 것도 포함하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지성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감성적이어야만 한다."(A138=B177)

 칸트는 초월적 도식초월적 시간규정과 동일시한다. 시간은 모든 표상이 만족시켜야 할 형식적 조건으로서, 초월적 시간규정은 "보편적이면서도 선험적 규칙에 의거하고 있는 한에서 [...] 범주와 동종적이고 [...] 잡다한 것의 모든 경험적 표상에 포함되어 있는 한에서는, 현상과 동종적이다. 그래서 범주의 현상들에 대한 적용은 초월적 시간 규정을 매개로 가능할 것이다."(A138-9=B178) "지성개념 사용을 제약하고 있는 이 형식적이고 순수한 감성 조건[초월적 시간 규정]을 우리는 이 지성개념의 도식(Schema)이라고 부르려 하며, 이 도식들을 가지고 하는 지성의 작용방식을 순수 지성의 도식기능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도식은 항상 그 자체로는 오직 상상력의 산물이다."(A140=B179)

 상상력의 종합능력으로서 도식기능은 [경험의 가능조건이지, 경험이 아니므로] 개별적인 직관인 도상(Bild)과 구분된다. "한 개념에게 그것의 도상을 제공하는 이 상상력의 보편적인 작용방식의 표상"이 곧 "이 개념에 대한 도식"이다.(A140=B180) "도상은 생산적 상상력의 경험적 능력의 생산물이고, 감성적 개념들의 도식은 순수한 선험적 상상력의 생산물"이다.(A141-2=B181) 도상은 도식, 모든 표상을 시간적 조건에 따라서 규정하는 기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열두 범주들도식을 매개로 모두 시간과 관련되어 규정됨으로써 비로소 경험적 직관과 만난다. 예컨대 "순수 지성개념의 하나인 양의 순수 도식은 수다. 수는 하나에다 (동종적인) 하나를 연속적으로 더해감을 포괄하는 표상이다. 그러므로 수는 [...] 내가 직관의 포착에서 시간 자체를 생산함으로써 동종적인 직관 일반의 잡다를 종합하는 통일이다."(A142-3=B182, 강조는 필자) 또 실재성과 부정성의 대립은 "동일한 시간의, 채워진 시간이냐 비어 있는 시간이냐의 차이에서 생긴다. [...] 감각은 동일한 시간을 [...] 무에서 멈출 때까지 많든 적든 채울 수 있다. 그래서 [...] 실재성에서 부정성까지의 이행이 있으며, 이 이행은 매 실재성을 양적인 것으로 표상한다."(A143=B182-3, 강조는 필자) 한편 실체의 도식은 "시간상에서 실재적인 것의 고정불변성" 즉 지속하는 기체에 대한 표상이고, 인과성의 도식은 "한 실재적인 것이 임의로 정립되면, 항상 다른 무엇인가가 그에 잇따르는 그런 실재적인 것이다. [...] 하나의 규칙에 종속하는 잡다한 것의 연이음"을 가리킨다.(A144=B183, 강조는 필자) 상호성의 도식은 "하나의 보편적인 규칙에 따르는 하나의 [실체의] 규정들의 다른 [실체의] 규정들과의 동시적임이다."(A144=B183-4, 강조는 필자) 가능성의 도식은 "한 사물의 표상의 어느 시점에서의 [경험적 조건에 합치하기에 논리적으로 가능한] 규정이다. 현실성의 도식은 특정한 시간에서의 현존이다. 필연성의 도식은 모든 시간에서의 한 대상의 현존이다."(A144-5=B184) 요컨대 도식들은 "규칙들에 따르는 선험적인 시간 규정들"이다. "양의 도식[시간 계열]은 대상에 대한 계기적 포착에서 시간 자체의 산출(종합)을, 질의 도식[시간 내용]감각(지각)과 시간 표상의 종합 내지는 시간의 채움을, 관계의 도식[시간 순서]은 모든 시간에서 (시간 규정의 규칙에 따르는) 지각들 상호간의 관계를, 마지막으로 양태 및 그 범주들의 도식[시간 총괄Inbegriff]대상이 과연 시간에 속하며, 어떻게 속하는가를 규정하는 상관자로서 시간 자체를 내용으로 갖고 표상화한다."(A145=B184)

cf. "Folglich listet Kant die einzelnen Urteile des Schematismus auf, gemäß der Zeitreihe, des Zeitinhaltes, der Zeitordnung und des Zeitinbegriffs.

  1. Schema der Quantität (Zeitreihe): Zahl
  2. Schema der Qualität (Zeitinhalt): kontinuierliche Erzeugung eines intensiven Grades[밀도적 크기의 연속적 산출]
  3. Schemata der Relation (Zeitordnung):
    1. Substanz: Beharrlichkeit[고정불변성]
    2. Kausalität: Sukzession[연이음] des Mannigfaltigen
    3. Wechselwirkung: Zugleichsein der Bestimmungen der Substanzen und Akzidenzen
  4. Schemata der Modalität (Zeitinbegriff):
    1. Möglichkeit: Zusammenstimmung der Teile eines Gegenstandes mit dem Ganzen in irgendeiner Zeit
    2. Wirklichkeit: Dasein eines Gegenstandes in einer bestimmten Zeit
    3. Notwendigkeit: Dasein eines Gegenstandes zu aller Zeit"(von de.wikipedia.org/wiki/Kritik_der_reinen_Vernunft#Disziplin_der_reinen_Vernunft)

 이로써 "순수 지성개념들의 도식들은 이 순수 지성 개념들에게 객관들과의 관계맺음, 그러니까 의미를 부여하는 진정한 그리고 유일한 조건들이다."(A146=B185) 범주들은 시간과 관련되어 규정되지 않으면 경험적 직관과 만날 수 없다. 그런데 초월적 도식으로서의 시간 규정은 범주를 의미있게 해주는 동시에 그 사용을 제한한다. 지성의 사용을 감성적인 조건들에 국한시키기 때문이다.

Q. 이게 왜 '판단력'에 대한 교설에 속하는가?

A. 모든 종합판단이 성립하기 위해 만족시켜야 하는 조건들이기 때문에.

제2장 순수 지성의 모든 원칙들의 체계 이어 칸트는 선험적 종합판단으로서 순수한 지성 사용의 모든 초월적 원칙들--각 범주마다 1+1+4+3=총 9가지의 원칙들이 있다--을 망라하고자 한다.

제1절 모든 분석 판단들의 최상 원칙에 대하여 "'어떤 것에도 그것과 모순되는 술어는 속하지 않는다'는 명제"에 해당하는 모순율은 판단의 유효성을 그 내용이 무엇인지와 독립적으로 판별하게 해주는 기준이다. "모순은 인식들을 전적으로 무효화하고 폐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순율은 분석판단에 적용될 경우 진리를 인식하는 적극적인 효용까지 가진다. 분석판단의 참됨은 모순율에 의거해서만 판별되기 때문이다. "[객관에 포함된] 그 개념의 반대가 객관에 모순될 터이니 말이다."(A151=B190) 그러므로 모순율은 "모든 분석적 인식의 보편적이고 완전히 충분한 원리"이다.(A151=B191)

cf. 한편 모순율이 "'어떤 것이 있으면서 동시에 있지 않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방식으로, 즉 A는 B이면서 B가 아닐 수 없다는 명제로 정식화되어선 안 된다. 같은 A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B에서 ~B로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 Abelard's distinction of de sensu interpretation between de dicto interpretation과의 유사성.

제2절 모든 종합 판단들의 최상 원칙에 대하여 "선험적 종합판단의 가능성 및 그것들의 타당성의 조건들과 범위"를 획정하는 것은 초월논리학의 제1과제이다.(A154=B193) 분석판단에서와 달리 종합판단에서 "나는 주어진 개념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 관계는 결코 동일성의 관계도 모순의 관계도 아니고, 이 때 판단 그 자체에서는 진리도 착오도 살펴질 수가 없다."(A154-5=B194) 그렇다면 종합 판단의 참됨은 어떻게 보장되고 판별되는가?

 두 개념 사이의 종합을 위해서는 두 개념 사이를 매개해주는 제3의 매체가 필요하다. "모든 종합판단의 매체"로서 "모든 표상들을 함유하는 오직 하나의 총괄자"는 "내감과 이것의 선험적 형식인 시간이다. 표상들의 종합상상력에 의거하고, 반면에 (판단을 위해 필요한) 표상들의 종합적 통일통각의 통일에 의거한다. 그러므로 여기[내감(시간), 상상력, 통각(의 통일)]에서 종합 판단의 가능성을 찾아야 할 것이고, [...] 순수 종합판단들의 가능성 또한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A155=B194, 강조는 필자)

 저 선험적 인식들은 경험을 통해 객관적 실재성을 확보한다. 그런데 "[경험의 현상들의] 종합적 통일이 없다면 경험은 결코 인식이 아니라, 지각들의 광상곡일 것이다. [즉 이럴 경우] 지각들은 일관되게 연결된 (가능한) 의식의 규칙들에 따라 함께한 문맥 안에 정돈되어 있지 않을 것이고, 그러니까 또한 통각의 초월적이고 필연적인 통일에 함께 정돈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A156=B195, 강조는 필자.) 쉽게 말해 경험에는 경험을 가능케 하는 의식의 규칙이 있고, 이런 "통일의 보편적 규칙들"과 경험 사이의 "관계맺음을 떠나서는 선험적 종합 명제들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A157=B196) "그러므로 모든 종합 판단들의 최상 원리는 '모든 대상은 가능한 경험에서의 직관의 잡다의 종합적 통일의 필연적 조건들에 종속한다'는 것이다. [...] 경험 일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은 동시에 그 경험의 대상들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다.(A158=B197, 강조는 원저자) [이 조건들을 탐구하면 철학의 영역에서도 선험적 종합명제를 확보할 수 있다.]

제3절 순수 지성의 모든 종합적 원칙들의 체계적 표상* 순수 지성은 경험되는 모든 것이 그에 종속되는 필연적인, 따라서 선험적인 원칙들의 원천이다. 이 "규칙들 없이는 현상들에 결코 그 현상들에 대응하는 대상에 대한 인식이 귀속할 수 없"다.(A159=B198) 자연법칙마저 이 원칙들에 종속된다. 이 원칙을 적용함, 즉 "순수 지성개념들을 가능한 경험에 적용함에 있어서 그 종합의 사용은 수학적이거나 역학적이다." 수학적 원칙들은 양, 질의 범주를 객관적으로 사용하는 규칙들로서, "순전히 직관에만 관여하고" 칸트에 따르면 "무조건 필연적"이다.(A160=B199) 이들은 직관적인 확실성을 가지며, "상호간에 필연적으로 귀속함이 없는 [동종적인] 잡다의 종합"에 관여한다.(B202) 한편 역학적 원칙들은 관계, 양태의 범주를 객관적으로 사용하는 규칙들로서 "현상 일반의 현존에 관여"하고 칸트에 따르면 "오직 경험에서 경험적 사고의 조건 아래서만, 그러니까 오직 매개적으로 그리고 간접적으로만" 필연적이다.(A160=B199) 이들은 논변적인 확실성**을 가지며, "[동종적이지 않으나] 상호 필연적으로 귀속하는 잡다의 종합"에 관여한다.(B202)

*이전에 제기했던 물음인 "범주들은 현상들에 적용될 때에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원칙들을 가지고 있는가"(B167)를 해결하는 대목이다. 칸트는 총 9가지의 원칙을 크게 둘로 나누어(수학적=동종적인 것들의 합성 vs 역학적=이종인 것들의 연결) 제시하고, 이 원칙들이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임을 증명함으로써 그것들에 선험적 종합판단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한다.

**Q. 이게 대체 뭘까?

A. 경험에 대한 논변을 통해 확보되는 확실성을 일컫는 게 아닐까? --> 설명방식의 차이. 추후 구성적 원칙과 규제적 원칙 사이의 차이와 상응함.(J씨)

cf. "Wie Kategorien auf die Gegenstände der Erfahrung angewandt werden, erörterte Kant in der Analytik der Grundsätze, die er auch als Transzendentale Doktrin der Urteilskraft bezeichnete. Aus der Kategorientafel entwickelte er das System der Grundsätze. Dies sind synthetische Urteile a priori, die als Bedingungen von Naturerkenntnis und damit als Fundamentalgesetze der Natur fungieren. Unterschieden wird in (1.) Axiome der Anschauung, (2.) Antizipationen der Wahrnehmung, (3.) Analogien der Erfahrung und (4.) Postulate des empirischen Denkens. Die ersten beiden Grundsätze, die mathematischen, lassen uns die Dinge als extensive und intensive Größen erkennen. Die letzten beiden, die dynamischen Grundsätze, bestimmen das Dasein der Dinge: die Analogien bestimmen es nach dem Verhältnis der Gegenstände untereinander, die Postulate nach dem Verhältnis, welches die Erscheinungen in Bezug auf das Erkenntnisvermögen besitzen. Alle Grundsätze sind genau und nur Prinzipien a priori der Möglichkeit von Erfahrung. Sie liegen jeder Einzelwissenschaft zugrunde. In der Analytik zeigte Kant wie reine Naturwissenschaft möglich ist. Die gesetzmäßige Ordnung der Erscheinungen nennen wir Natur, ihre Gesetze Naturgesetze. Ihr Ursprung liegt im Verstande. Und so konnte Kant sagen, dass die Bedingungen der Erkenntnis der Gegenstände zugleich die Bedingungen der Gegenstände der Erkenntnis sind. Eine Revolution der Denkart, die gemeinhin als kopernikanische Wende gilt. Dies ist jedoch nur eine Metapher für den Wechsel der Perspektive, den Kant in die Erkenntnistheorie eingebracht hat."(von de.wikipedia.org/wiki/Kritik_der_reinen_Vernunft#Disziplin_der_reinen_Vernunft, 강조는 필자)

Q. 철학의 선험적 종합명제들인 이 원칙들과 판단력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올바른 판단력만 이 원칙들을 준수한다고 생각하기엔, 애초에 판단의 대상이 될 모든 경험이 이 원칙들을 만족시킬 텐데 말이다.

A. 올바른 것이든, 그릇된 것이든 모든 판단력 일반의 발휘 조건들이 아닐까?

1. 직관의 공리들 [양 범주(=하나/여럿/전체)가 현상에 적용될 수 있게 해주는 원칙]: "모든 직관들은 연장적 크기들이다."(A162=B203, 강조는 원저자) 또는 "직관으로서의 모든 현상은 연장적 크기다."(A163=B204)

 모든 현상들은 감성의 형식에 맞게 주어져야 하기 때문에 "공간, 시간상의 직관을 함유한다."(A162=B202) 공간과 시간의 직관은 "동종적인 것의 합성과 이 (동종적인 것인) 잡다에 대한 종합적 통일 의식을 통하여" 비로소 경험된다.(A162=B202-203) 그런데 이 통일 의식은 곧 크기의 개념[에 대한 인식]과 같다. 따라서 "현상으로서의 객관에 대한 지각 자체는 오로지, 그에 의해 잡다한 동종적인 것의 합성의 통일이 크기에서 사고되는 [...] 감각적 직관의 잡다의 종합적 통일에 의해 가능하다."(A162=B203) 이때, 저 크기는 연장적 크기들이다. 모든 경험적 직관의 형식이 되는 시공간이 연장적 크기를 가지기 때문이다(CC, p.154). "연장적 크기란 그 위에서 부분들의 표상이 전체 표상을 가능하게 만드는", 쉽게 말해 부분들이 모여 전체를 이루는 크기이다.(A162=B203) 예컨대 선분은 그 부분들이 잇따라 산출됨으로써만 표상 가능하고, 시간은 여러 순간들이 순차적으로 진행됨으로써만 표상 가능하다. 그러므로 시공간의 직관을 함유하는 한--시간 그리고 공간상에서만 표상되는 한--모든 현상은 일종의 양을 가지는 집합체로 표상된다.

 전체 크기를 구성하는 부분들 사이의 종합은 생산적 상상력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종합에 기하학과 그것의 공리들, 예를 들어 "두 개의 직선은 아무런 공간도 둘러싸지 않는다"와 같은 공리들이 근거한다. 반면 "'어떤 것이 얼마나 크냐?'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서의 산수(A163=B204), 즉 "수 관계들의 명백한 명제들"--예컨대 7+5=12--은 기하학의 공리들과 마찬가지로 선험적 종합명제이기는 하나 개별적인 수식이지, 보편적인 공리는 아니다.(A164=B205) 공리가 무한하게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직관의 공리들은 이처럼 순수 수학을 정초할 뿐 아니라 그것을 "경험의 대상들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기하학의 결론들은 "경험적 직관에도 타당하다."(A165=B206) 나아가 기하학은 물 자체가 아닌 현상에 대한 학이어야만 비로소 선험적인 인식일 수 있다.

*Q. 이 적용의 사례=? 정확히 어떤 작업인지 모르겠다.

A. 예를 들어 한 물체의 폭에서 다른 물체의 폭을 뺀다든지. 인테리어를 시공하면서 공간을 먼저 측량한 뒤 그에 맞는 물건만 넣을 때처럼. 이런 작업들은 공간 및 공간 내 현상적 대상들이 모두 크기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Q. 왜 '공리Axiome'인가?

A. 직관으로서 현상들은 시공간상 위에 표상될 수밖에 없는 한, 기하학의 공리를 만족시켜야만 비로소 경험된다. 

2. 지각의 예취들 [질 범주(=실재성/부정성/제한성)가 현상에 적용될 수 있게 해주는 원칙]: "모든 현상들에서 실재적인 것, 즉 감각의 대상인 것은 밀도적 크기, 다시 말해 도[정도]를 갖는다."(A166=B207, 강조는 원저자)

 경험적인 의식으로서 지각은 실재적인 감각, 즉 "어떤 객관 일반을 위한 질료"이자 시공간상에 "실존하는 어떤 것"을 내용으로 가진다.(A166=207) "감각 그 자체는 전혀 아무런 객관적 표상도 아니"고 "순전히 주관적인 표상"이다.* 여기서 칸트는 "경험적 의식에서부터 순수 의식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단계적인 변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즉 그 자체로는 경험될 수 없는 순수직관인 [텅 빈] 시공간의 크기를 0으로 삼아 "감각의 임의의 크기까지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크기가 곧 "밀도적 크기, 다시 말해 감관에 미치는 영향의 도"이다.(A166=B208) 현상의 형식인 시공간과 달리 현상의 질료인 감각은 연장적extensional 크기를 가지지 않는데--감각은 한 순간에 전체로서 주어지지, 여러 순간 또는 부분들이 더해져야만 비로소 주어지는 게 아니다--그럼에도 어떤 크기를 가지므로, 그것은 [채움 및 비움의 정도와 관련된] 밀도적인intensional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CC, p.155).

*객관에 대한 표상을 함유하는 지각과, 지각에 포함되지만 순전히 주관적인 표상인 감각 사이의 구분이 칸트에게서도 나타난다는 것이 재미있다.

**Q. 주어진 모든 감각은 실재적이라는 점에서 1이고, 그로부터 텅빈 시공간으로의 단계적 감소가 상상 가능하다는 건가? 아니면 이념적인 실재성(1)이 상상 가능하고, 모든 현실적 감각은 0과 1 사이의 크기를 가진다는 건가?

A. 둘 다 틀렸다. 밀도적 크기라는 잣대를 들이댈 수 있으면 다 1인 것. 다시 말해 밀도적 크기를 가지면 무조건 1=유, 실재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밀도적 크기가 1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므로 0.5짜리 실재가 가능하다는 식의 서술이 아니라 온전히 실재하는 것이, 당장 가지고 있는 것보다 감소할 수 있는 밀도적 크기를 가진다는 서술. 실재, 부재 여부는 무조건 1 아니면 0인 것, 유 아니면 무인 것이고, 유에 해당한다면 반드시 밀도적 크기를 가진다는 것.

cf. 내 생각으로는 예컨대 같은 공간을 더 묵직하게/밀도 높게 채우는 물체는 허공을 더 많이 함유하고 있는, 즉 비워져있는 곳이 비교적 많은 물체보다 무게의 밀도적 크기가 크다. 이와 같은 비교는 밝기, 열, 중력 등 다른 성질에 관해서도 가해질 수 있겠다.

 예취란 "그것에 의해 내가 경험적 인식에 속하는 것을 선험적으로 인식하고 규정할 수 있는 인식 모두"로, 개별적인 감각을 마주했을 때 상기되어 그 감각에 부여되는 선험적 형상을 뜻한다.(A166=B208) 칸트는 여기서 자신이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이 참된 인식의 조건 중 하나로 내세웠던 프로렙시스(prolepsis, preconception)와 동일한 것을 지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감각의 경우 [그 내용은] 결코 경험에 앞서 예취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에서 역시 예취 가능한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기 위해 우선 감각의 (i)양화 가능성 및 (ii)양으로서의 특성부터 짚어보자.]

(i)"[...] 경험적 직관에서 감각에 대응하는 것은 실재성이고, 감각의 결여에 상응하는 것은 부정성=0이다. 그런데 모든 감각은 감소할 수 있고, 그래서 줄어들어 점차 소멸할 수 있다. 그래서 현상에서 실질성과 부정성 사이에는 많은 가능한 중간 감각들의 지속적인 연관이 있"다.(A168=B209-210) 이처럼 "오직 '하나'로서만 포착되고, 부정성=0에의 접근에 의해서만 다수성이 표상될 수 있는 그러한 크기"가 곧 밀도적 크기이다. 특히 "원인으로서의 실재성의 도", 예컨대 중력과 같은 것은 '동인Moment'이라 불린다.(A168=B210)

(ii) 한편 "양적인 것들에서 어떤 부분도 가능한 최소의 것일 수 없는 (어떤 부분도 단순하지가 않은[서로 이산적인 단순한 부분으로 절단될 수 없는]) 그런 양적인 것의 성질을 양적인 것의 연속성이라고 일컫는다." 예컨대 공간과 시간은 흐르는 것으로서 연속량을 가진다. 그런데 시공간뿐 아니라 "모든 현상들 일반은 연속적인 크기들[연속량]이다. 직관의 면에서는 연장적 크기들이고, 순전한 지각의 면에서는 밀도적 크기들이다."(A170=B212) 칸트는 이에 따라 현상의 일종인 변화 역시 명증적으로 연속적이라고 덧붙인다.

 연장적 크기와 밀도적 크기는 서로 다른 종류의 크기이며, 후자는 전자로 환원되지 않는다. 동일한 연장적 크기를 가지는 직관들이 밀도적 크기상에서 차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동일한 부피를 차지하고 있는 물체가 물질의 양 면에서 차이를 가지는 현상을 통해 예화된다. 연장적 크기만이 실재의 척도인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감각, 지각의 질료 일반은 특정한 밀도적 크기로 양화될 수 있는 실재성을 가진다는 것이 모든 지각에서 예취될 수 있는 바이다. 다시 말해 모든 감각은 "하나의 '임Sein'을 함유하는 무엇인가를 표상하며, 다름아니라 경험적 의식 일반에서의 종합을 지시한다"는 것이다.(A176=B217) 요컨대 크기들 일반에 대해 예취될 수 있는 것은 연속성이고, 특히 질에 대해서는 오직 밀도적 양--'저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모든 답이 필연적으로 전제하는 무엇이 어떠어떠한 것임이라는 보편적 형상, 말하자면 존재 자체--그것만을 예취할 수 있다.*

*"감각기관을 통해서 실재적인 것, 즉 '어떤 것', '무엇'을 바로 어떤 것, 무엇이게끔 해주는 "동인"[...]이 수용되지만, 그러나 이 수용의 바탕에는 '어떤 것', '무엇'이 '어떠어떠하다'는 보편적 표상[형식]이 예취되어 있다. 이런 이해에서, 지각의 예취에 의해서만 어떤 무엇이 인식된다."(백종현 선생님 해제, p.61)

cf. "[...] the principle that all intuitions have extensive magnitudes is proved by the fact that extensive magnitudes are ‘already’ involved in the possibility of the experience of anything in space and time. Here, though, such argument is missing. Instead, the argument turns on the possibility of a synthesis, by which the given sensation would be reduced to zero (or, presumably, increased from zero to its givenness, or higher). [...] In other words, the necessity of the possibility of progressively ‘tuning out’ sensation, and of consciously focusing on formal structures in space and time, is the experience made possible by the principle of intensive magnitudes. If, the argument runs, sensations were not intensive magnitudes then it would not always be possible to move from ‘empirical’ to ‘pure’ consciousness. Kant’s argument hinges on whether we accept this move as itself involving a change of degree."(EPG, 114, 강조는 필자)

"It is worth pointing out that the measure of intensity was a hugely important practical problem within eighteenth-century physics. Astronomers hunted for techniques of measuring the brightness of stars without relying upon subjective assessments such as ‘that looks about as bright as that other one’."(EPG, 115, 강조는 필자)

3. 경험의 유추들 [관계 범주가 현상에 적용될 때 지켜야 하는 원칙]: "경험은 지각들의 필연적 연결 표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A176=B218, 강조는 원저자) 지각들의 연결 또는 현상들의 결합이 필연적인지 아닌지는 포착 자체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저 연결 또는 결합은 관련된 잡다가 포착되는 대로가 아니라 "시간상에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로 경험에서 표상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시간 자체는 지각될 수 없으므로, 시간상에서의 객관들의 실존의 규정은 오로지 시간 일반에서의 그것들의 결합에 의해서만, 그러니까 오로지 선험적으로 연결시키는 개념들에 의해서만 생길 수 있다."(A176=B219)

 모든 경험은 내감의 형식인 시간에 따라 종합적으로 통일되며, 각 경험에는 하나의 시간 속에서 그것과 필연적으로 연결되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다른 경험이 있다(CC, p.156). "시간의 세 양태는 고정(불변)성, 계기[잇따름] 그리고 동시[적]임이다.(A177=B219, 강조는 원저자)" 다시 말해 시간은 그 자체로는 변하지 않고 지속하며, 시간을 이루는 순간들은 서로 잇따르거나 동시적이다(CC, p.156). 모든 잡다는 이러한 시간 관계에 따라 근원적 통각에서 통일돼야 한다. 이 통일은 "보편적 시간 규정의 규칙들 아래 종속해야만" 하며, 저 규칙들이 곧 경험의 유추의 원칙들이다. 이 원칙들을 따라서만 시간의 각 양태들은 경험될 수 있다. 지속의 경험을 위해 실체가, 계기의 경험을 위해 인과가, 동시성의 경험을 위해 상호성이 요구된다(CC, pp.156-7). (나아가 아래의 세 유추들은 모든 현상이 그 속에 있는, 자연의 선험적인 통일을 근거 짓는다.)

 경험의 유추의 원칙들은 현상의 산출과 구성을 설명할 수 있는--현상이 얼마나 크며 '무엇'인지 말해줄 수 있는--수학적 원칙과 달리 "순전히 규제적인 원리들"이다.(A179=B222) 왜냐하면 "현상들의 현존은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A178=B221) 규제적인 역학적 원칙들은 "한 지각이 시간 관계에서 (비록 [선험적으로] 확정된 것은 아닌) 다른 지각에 대하여 주어진다면, 선험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지각이 어떤 다른 지각이며 얼마나 큰가가 아니라, 어떻게 이 지각이 현존의 면에서 시간의 이 양태에서 저 지각과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가이다."(A179=B222) 그 다른 지각의 무엇임은 예취되지 않으며, 단지 두 지각 사이의 관계만이 인식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험의 유추는 오직 그에 따라 지각들로부터 경험의 통일이 (경험적 직관 일반으로서 지각 자체가 아니라) 생겨야만 하는 규칙일 따름이다." 이때 동원되는 범주들은 도식에 의해서 그 사용이 제한된다. 범주는 초월적 시간규정과 부합해서만 경험적 직관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Q. 구성적 원칙과 규제적 원칙의 차이?

cf. 둘 다 선험적으로 확실, 그러나 "명증의 방식에서, 다시 말해 양자의 직관성에서 (그러니까 또한 양자의 입증에서) 구별"됨.(A180=B223)

A. 구성적 원칙에서는 선행하는 항이 결정되면 나머지 항도 그 내용까지 필연적으로 구성되지만, 규제적 원칙에서는 현존하려면 어떤 것이 필연적인지만 설명하고[현존 자체만 필연적이고], 현존의 내용이 무엇일지는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A. 제1유추 실체 고정불변성의 원칙: "현상들의 모든 바뀜에도 실체는 고정적이며, 실체의 양은 자연에서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는다."(A182=B224, 강조는 원저자) 쉽게 말해 실체는 변하지 않으며, 우연적 상태들 또는 규정들만이 변한다. 이후 칸트는 제1유추를 "실존하는 모든 것은 오로지 고정불변적인 것에서만 마주쳐진다"고도 요약한다.(A216=B264)

 "그 위에서 현상들의 모든 바뀜이 생각되어야 할" 그리고 "그 위에서만 잇따라 있음 또는 동시적임이 현상들의 규정들로서 표상될 수 있는" 시간은 변하지 않는다.(A182=B224-225) 그런데 시간 자체는 그것만으로는 인식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대상을 시간적인 것으로 규정하려면 대상 내에서 고정불변적인 시간을 표상시켜줄 수 있는, 마찬가지로 고정불변적인 것을 인식해야 한다(CC, p.158). 이와 같이 대상의 모든 바뀜의 고정불변적인 기체에 해당하는 것은 실체다. 실체는 언제나 동일자로 머물러있으며, "자연에서 그 양은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없다."(A182=B225)

 실체가 없다면 "포착만으로는 이 잡다가, 경험의 대상으로서, 동시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잇따라 계기하는 것인지를 결코 규정할 수가 없다.* [...] 고정불변성이란 도대체가 시간을, [곧] 현상들의 모든 현존, 모든 바뀜과 모든 수반의 항존적 상관자로서, 표현하는 것이다."(A182=B225-6) 그러므로 실체는 시간관계의 규정을, 따라서 모든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기도 하며, 실체의 불변성은 시간의 경험적 통일성[유일성]을 보장해준다.** 한편 실체를 제외한 다른 상태들은 실체의 실존 방식에 불과한 것으로서 계속해서 변하기 때문에 시간(성)을 함유할 수도, 표상시켜줄 수도 없다. "모든 변화에도 실체는 불변존속하며, 우유성들만이 바뀐다"는 것은 선험적 종합명제이다.(A184=B227) 이로부터 역설적이게도 변모하는 그것 자체는 변화하지 않으며 그것의 규정만이 변전한다고 말해야 하게 된다. "그러므로 변화는 오로지 실체들에서만 지각될 수 있다. [...] 왜냐하면, 바로 이 고정불변적인 것이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 표상을 [...]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A188=B231, 강조는 필자) 그럼에도 이 고정불변성은 우리가 (현상에서) 사물들의 현존을 표상하는 방식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A186=B229) 

*Q. 무슨 뜻인가?

A. 실체가 없다면 고정불변적이고 지속적인 시간계열도 없을 테니, 경험 대상들의 객관적 순서도 결정할 수 없을 것이다.(J씨)

**Q. 422쪽의 서술을 이해하지 못했다.

A. 1실체 1시간계열(1직선)인데, 만일 그 같은 실체가 변하면 직선이 여러 개가 될 것.(S씨)

A2. 애초에 실체가 변하면/발생하고 소멸하면 시간 자체의 불변성이 위태로워진다.(J씨) 

Q. 왜 '유추'인가?

A. 실체는 직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 존재를 우리는 [변화와 시간에 대한 경험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CC, p.159).

B. 제2유추 인과성의 법칙에 따른 시간계기의 원칙: "모든 변화들은 원인과 결과의 결합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A189=B232, 강조는 원저자) 

 한 현상과 그에 잇따르는 현상은 상상력의 종합 능력에 의해 서로 연결된다. 그러나 이때 "순전한 지각에 의해서는 서로 잇따르는 현상들의 객관적 관계는 미확정으로 남아 있다. [무엇이 '객관적으로' 먼저였는지는 직관과 상상력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물론 "현상의 잡다에 대한 포착은 항상 순차적"이지만, 포착 자체는 원인보다 결과에 먼저 가해졌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관계가 이제 확정적으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두 상태 사이의 관계가 그에 의해 그 중 어느 하나가 먼저, 다른 하나가 나중에 놓이고, 뒤바뀌어 놓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규정된다고 생각되어야만 한다."* 이 필연성을 가능케 하는 개념이 바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 개념이다. "우리가 현상들의 잇따름을, 즉 모든 변화를 인과 법칙에 종속시킴으로써만, 그것들에 대한 경험, 다시 말해 감각경험적 인식도 가능하다."(A189=B234)

cf. 우리의 직관은 어느 두 사건을 단지 서로 독립적으로만 경험시켜주고, 상상력은 어떤 사건을 다른 사건에 선행하는 것으로 놓을지 결정할 수 없을 때 순수지성개념이 선후행의 관계를 확정적으로, 즉 필연적으로 만들어준다(CC, p.162)

*Q. 단순히 주관적인 표상과 객관을 구분하려는 노력은 알겠다. (cf. "현상에서 포착의 이 필연적 규칙의 조건을 함유하고 있는 것이 객관이다."(A191=B236)) 그러나 객관적 관계이기 위해 필연성까지 확보될 필요가 있는가?

A.논리적으로 필연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포착에서/이해에서/질료적으로 필연적이라는 뜻 같다. 상류의 배를 하류의 배보다 늦게 지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제3요청 참고. 426-427쪽 참고. 

Q. 어떤 잇따름뿐 아니라 모든 잇따름이 인과관계에 따른다고 보는 것은 상식적인 직관에 반하지 않는가?

A. 결정론적 세계관 하에서는 자연현상들이 무엇이든 인과법칙에 따른다.

 새로운 상태의 발생 또는 생성은 규칙에 따라 선행하는 현상 없이는 결코 경험적으로 지각될 수 없다. 왜냐하면 (i)"그것에 앞서 사물들의 어떠한 상태도 선행하지 않는 한 발생이란, 빈 시간 자체가 그럴 수 없듯이, 포착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A191-2=B237) 게다가 (ii)"한 사건이 규칙에 따라서 그에 후속해야만 하는 어떤 것도 그 사건에 선행하지 않는다고 가정할 것 같으면, 지각의 모든 잇따름들은 오로지 단적으로 포착 중에 있을 것이고, 다시 말해 순전히 주관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지각들 중 어느 것이 본래 선행하는 것이고, 어느 것이 후속하는 것인지는 객관적으로 규정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는 우리는 오로지 전혀 아무런 객관과도 관계하는 바 없는 표상들의 유희를 가질 뿐이며, 다시 말해 우리의 지각을 통해서는 한 현상이 여느 다른 현상과 시간관계상 전혀 구별되지 못할 터이다."(A194=B240)

★ 요컨대 인과의 범주는 발생의 경험, 사건들의 객관적 순서/잇따름의 경험, 나아가 비가역적인 시간계열 그리고 (다른 사건과 관련해서 한 사건이 가지는) 특정한 시간위치에 대한 경험마저 가능하게 한다. 칸트는 마음의 내적 규정에 불과한 주관적 표상과 객관에 대한 경험을 구별하면서, 전자에 머무르지 않고 후자로 넘어가려면, 즉 대상과 관계를 맺으려면 표상들 자체 그리고 그들 사이의 결합이 일정한 규칙에 종속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뒤집어 말해, 우리는 우리의 표상들의 시간관계에서 일정한 순서가 필연적임에 의해서만 우리의 표상들에게 객관적 의미가 부여된다는 것을 안다."(A197=B243) "지성이 시간순서를 현상들에다, 그리고 그것들의 현존에다 부여함으로써" 대상 일반의 표상이 가능해지며, "지성[이] 잇따름으로서 현상들 각각에게 선행하는 현상들과 관련해서 선험적으로 정해진 시간상의 위치를 승인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이 일정한 시간 위치 없이는 그 각각은 그것들의 모든 부분들에게 선험적으로 그 위치를 정해주는 시간 자체와 합치하지 못할 것이다."(A199-200=B245)* 이에 따라 무로부터의 발원 또는 창조는 결코 경험될 수 없다. "창조의 가능성만으로도 이미 경험의 통일성을 폐기할 것이기 때문이다."(A206=B251)

*cf. "지성은 통각의 통일에 의거해, 시간상에 있는 현상들에게 모든 위치를 연속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선험적 조건이다. 이 규정은 원인들과 결과들의 계열에 의한 것으로, 전자는 후자의 현존을 불가불 수반하며, 그렇기에 시간관계들의 경험적 인식을 항상 (보편적으로) 그러니까 객관적으로 타당토록 한다."(A211=B256, 강조는 필자) --> 절대의식이 시간위치를 지정하는 후설의 시간론과 비교해볼 것. 칸트에게 후설의 시간은 주관적인 타당성만을 가지지 않을까? / 변화를 통해 불변적인 것이 구성되는지, 아니면 vice versa인지.

Q. S씨: 왜 실체의 동일성이 시간을 위해 요구되나? 우리 자신의 자기동일성만으로는 부족한가? 후설에게서처럼.

A. J씨: 각 대상의 동일성은 확보해줄 수 있겠지만, 대상세계의 객관적 순서에 따른 변화를 설명할 수 있을까? 자기의식의 동일성만으로는 확보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실체의 동일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제 칸트는 이상의 초월적 교설의 함의들을 나열하는 것처럼 보인다. 첫째, 칸트는 흄의 인과론을 비판한다. 흄의 인과론은 '일어나는 모든 것은 원인을 갖는다'는 규칙 또는 인과의 개념 일반마저 "경험 자체와 마찬가지로 우연적"이고 "아무런 진정한 보편적 타당성도 갖지 못"하게 만든다.(A196=B241) 둘째, 칸트는 충족이유율을 옹호한다. "충분근거율은 가능한 경험의 근거, 곧 현상들을 그것들의 관계와 관련하여 시간의 계열 계기에서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근거이다."(A201=B246) 셋째, 칸트는 경험의 1유추와 2유추를 서로 연결짓는다. 원인이 결과에 시간적으로 선행한다는 것은 둘이 동시에 공존하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타당하다. 이 원인성은 실체의 개념으로도 이끈다. "작용이 있는 곳, 그러니까 활동과 힘이 있는 곳, 거기에 실체 또한 있"다.(A204=B250) "작용은 이미 인과성의 주체[기체]의 결과에 대한 관계를 의미한다. 그런데 모든 결과는 그 때 생기는 것 가운데에서, 즉 변전하는 것 중에서, 곧 시간이 연이음에서[연이어서] 표시하는 것 중에서 성립하는 것이므로, 이것의 궁극의 주체[기체]는 바뀌는 모든 것의 기체인 고정불변적인 것, 다시 말해 실체이다."(A205=B250)* 넷째, 칸트는 모든 변화는 인과성의 연속적인 작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법칙을 옹호한다. "이 법칙의 근거는 시간도 시간상의 현상도 최소한의 것인 부분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 그럼에도 사물의 상태는 그 변화에 있어서 요소들인 이 모든 부분들을 통해서 그것의 제2의 상태로 이행한다는 것이다."(A209=B254)

*칸트 역시 흄과 마찬가지로 실체-속성 관계를 인과관계로 환원하는 것 같다.

C. 제3유추 상호작용 또는 상호성의 법칙에 따른 동시에 있음[동시성]의 원칙: "모든 실체들은 공간상에서 동시에 지각될 수 있는 한에서 일관된 상호작용 속에 있다."(A211=B256, 강조는 원저자)

 "경험적 직관에서 한 사물에 대한 지각이 다른 사물에 대한 지각에 교호적으로 잇따를 수 있다면, [...] 사물들은 동시에 있다. [...] 그러나 우리는 사물들이 동일한 시간상에 놓여 있다는 사실로부터 그 사물들의 지각들이 서로 교호적으로 잇따를 수 있음을 추정하기 위해 시간 자체를 지각할 수는 없다."(A211=B257, 강조는 필자) 그러므로 포착과 상상력의 종합만으로는 객관들의 동시적 실존 및 지각의 교호적 뒤따름의 객관적 가능성에 대한 경험이 가능하지 않다. 그와 같은 경험은 순수지성개념의 활용을 요구한다.

 그런데 "만일 교호적으로 한쪽이 다른 한쪽에 규정들의 근거를 함유한다면[서로가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라면], 그것은 상호성 또는 상호작용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실체들이 공간상에 동시에 있음은 다름아니라 그것들이 서로 상호작용함을 전제하고서만 경험에서 인식될 수 있다."(A211=B258, 강조는 필자) 만일 실체들이 아무런 상호작용 없이 서로 고립되어있다면*, 즉 "완전히 텅 빈 공간에 의해 분리"되어있다면 실체들 사이의 시간관계는 경험될 수 없을 것이다.** 이때 [시간관계의 경험을 위해 요구되는] 시간상의 위치 규정은 인과의 규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두 실체의 동시적 실존은 두 실체 간의 상호적인 인과관계가 성립할 것을 요구한다. "상호성 없이는 (공간상의 현상에 대한) 모든 지각은 다른 지각에 의해 단절되며, 경험적 표상들의 연쇄, 다시 말해 경험은, 앞서는 경험과 조금의 연관도 없이 또는 아무런 시간관계도 맺을 수 없이, 새로운 객관에서는 완전히 처음부터 시작될 것이다."(A214=B260-261) 빈 공간과 같은 것은 결코 경험의 객관이 될 수 없다.

*Q. 고립이 아니면 상호영향, 이라는 이분법적 직관이 잘 와닿지 않는다.

A. 각각이 부분으로써 하나의 전체를 이루기 때문에, 하나가 다른 하나의 환경(의 일부)이기 때문에 고립되지 않으면 공존하는 것만으로도 상호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된다.

**Q. 잘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러한가? (444쪽)

A. 진공 같은 것이라기보다 모나드마냥 공간1, 공간2 이런 식으로 나뉜다는 뉘앙스. 그러면 시간1, 시간2가 상응하고 같은 시간관계가 아니겠지.(J씨)

Q. 객관들의 동시적 실존 및 지각의 교호적 뒤따름의 객관적 가능성에서 상호영향으로 넘어가는 부분이 매끄럽지 않게 읽혔다. 이 비약의 근거는 무엇인가?

A. 칸트에게는 동시적으로 실존하려면 상호영향이 전제가 돼야 한다. 상호영향을 전제해야 서로 다른 실체들이 하나의 시간계열에 포섭됨으로써 동시성이 성립 가능하기 때문이다. 서로 영향이 없다면, 즉 같은 시간관계에 포섭되지 못한다면, '동시'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Q. 여기서는 어떤 '유추'가 발생하고 있는가?

A. 서로 상호작용하고 있음이, 상호작용의 현존이 유추된다. -->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개념 비판(J씨)

cf. “Specifically, the first step of this second argument proceeds from the problem of time-determination, asserting that one cannot immediately perceive the objective simultaneity of two states nor can one immediately infer the objective simultaneity of two states from the order of apprehension (A 212/B 258–59). The second step then asserts that only a rule could warrant an inference to objective simultaneity and, in fact only a special kind of causal rule, called community or mutual interaction (A 212–13/B259–60).”(CC, 165)

☆☆☆ 이 세 유추들은 시간의 지속, 잇따름, 동시성 즉 가능한 모든 시간관계들에 따라 "현상들의 현존을 시간상에서 규정하는 원칙들이다."(A215=B262) 한편 자연이란 "법칙들에 따른 현존하는 현상들의 연관"을 뜻한다. 자연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선험적 법칙들을 가진다. 모든 자연현상은 저 법칙들에 의한 자연의 통일성을 표시해준다. "모든 현상들은 하나의 자연 속에 있으며,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 선험적인 통일성이 없다면 어떠한 경험의 통일성도, 그러니까 또한 경험에서 대상들의 어떠한 규정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A216=B263) 이것이 유추들이 궁극적으로 말해주는 바이다.

Q. 어째서 관계 범주가 유독 자연법칙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가?

A. 자연법칙은 현상들 사이의 '관계'를 관장하기 때문이다. / 인과성의 범주는 자연이 법칙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말해준다. 실체들이 인과에 따라 잇따르거나 상호성에 따라 동시적으로 실존하는 법칙들=자연법칙(J씨)

4. 경험적 사고 일반의 요청들Postulaten* [양태 범주가 현상에 적용될 때 지켜야 하는 원칙] "1. 경험의 형식적 조건들과 (직관과 개념들의 면에서) 합치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가능적으로 실존한다]. 2. 경험의 질료적 조건(즉 감각)과 관련되어 있는 것은 실제로 있다[현실적으로 실존한다]. 3. 현실적인 것과의 관련이 경험의 보편적인 조건들에 따라 규정되는 것은 반드시[필연적으로] 있다(실존한다)."(A218=B265-6)

*칸트에게 요청이란 공준이다. 실천에서 수반될 수밖에 없는데 이론적으로는 증명되지 않는 것들을 일컫는다.

 칸트에 따르면 양태의 범주들은 술어화돼도 객관의 규정을 증가시켜주지 않고, "단지 [객관과] 인식능력과의 관계만을 표현할 뿐"이라다.(A219=B266) 먼저 가능성의 범주와 관련된 원칙을 살펴보면, 그로써 천명되는 것은 논리적 가능성이 아닌 개념의 객관적 실재성, 즉 대상의 가능성이다. 순수지성개념들은 이와 같은 종류의 가능성을 보장하기 때문에 객관적 타당성을 가지는 것이다. 선험적인 개념들은 개념들 자체로부터가 아니라 "단지 경험 일반의 형식적 객관적 조건들로서만 생길 수 있"다.(A223=B271) 둘째로 현실성의 범주와 관련된 원칙을 살펴보면, "사물들의 현실성 인식의 요청은 지각, 그러니까 의식된 감각을 요구한다. [...] 사물의 순전한 개념에서는 그 사물의 현존의 성격이 전혀 마주쳐지지 않는다."(A225=B272) 마지막으로 필연성의 범주와 관련된 원칙을 살펴보면, 그로써 천명되는 것은 논리적 필연성이 아닌 현존에서의 질료적 필연성이다. 이는 곧 원인으로부터 결과가, 특정한 실체로부터 특정한 상태가 필연적으로 현존해야 한다고 말할 때의 필연성과 같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가언적으로[조건적으로] 필연적이다. [...] '아무것도 맹목적 우연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제3요청의 파생법칙으로서 "자연 내의 어떠한 필연성도 맹목적이지 않고, 오히려 조건적이며, 그러니까 이해될 수 있는 필연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A228=B280) 세계 내에 우연과 숙명이 없다는 이 법칙들에 더해 간격[진공]과 비약[불연속]이 없다는 법칙들도 성립한다. 이 네 법칙들은 지성에 의한 현상들 사이의 연관 및 경험의 통일을 보장한다. 지성만이 '하나의 경험'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을 가능케 한다.

Q. 여전히 왜 요청[공준]인지 모르겠다. 이론/실천의 구분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cf. 467-468쪽

A. 경험의 가능조건으로서, 실천상 수반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객관을 통한 경험적 증명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식주관의 능력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S씨)

Q. 요청은 왜 규제적 원리인가?

A. 직관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주관의 능력과만 관계한다.

☆☆☆ 관념론 반박 칸트는 제2요청--경험의 질료적 조건(감각)과 관련되어 있는 것은 실제로 있다[현실적으로 실존한다]--의 끝자락에 주관 바깥의 [장소에 놓인 것으로 표상되는] 외부 사물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의심하는 관념론에 대한 반박을 펼친다. 관념론은 두 종류로 나뉜다. 버클리의 교조적[독단적] 관념론은 "우리 밖에 공간상의 대상들의 현존을 [...] 거짓되고 불가능한 것으로 설명하는 이론"으로, "공간을, 불가분의 조건으로서 공간이 그에 부착해 있는 모든 사물들과 함께, 그 자체로는 불가능한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공간상의 사물들 또한 순전한 상상물로 설명"한다. 이처럼 공간을 "사물들 그 자체에 귀속해야 하는 성질로" 생각한다면 교조적 관념론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B274, 강조는 필자. cf. Unding) [그러나 공간은 경험적으로 추출되는 관념이 아니라 경험을 비로소 가능케 하는 선험적 감성형식이자 직관임을 앞서 보였으므로] "이런 관념론의 근거는 초월적 감성학에서 우리에 의해 제거되었다."(B274-5) 이제 칸트는 "우리의 현존 외에는 어떤 현존재도 직접적 경험을 통해서는 증명할 능력이 없음만을 내세우는 [데카르트의] 미정적 관념론", 즉 외부 사물의 존재를 의심스럽고 증명 불가능한 것으로 취급하는 관념론에 대한 반박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외적 사물들에 대해서 경험도 가지며 한낱 상상만을 갖는 것이 아님을 밝혀내"야 한다. 이는 "데카르트가 의심치 않았던 우리의 내적 경험조차도 외적 경험의 전제 아래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때만 달성될 수 있다."(B275, 강조는 필자)

★정리/증명목표: "나 자신의 현존에 대한 순전한, 그러나 경험적으로 규정된, 의식은 나의 밖 공간상의 대상들의 현존을 증명한다."
(B275, 밑줄은 필자) --> ★증명: 시간규정을 가능케 해줄 고정불변적인 것으로서의 외적 사물이 현존하지 않으면,
나는 시간상에서 규정되는 내적 경험을 가질 수 없다.

 "나는 나의 현존시간상에서 규정된 것으로서 의식한다.* 모든 시간 규정은 지각에서 고정불변적인 어떤 것[불변하는 질서 형식으로서의 실체적 시간]을 전제한다. 그러나 이 고정불변적인 것은 내 안에 있는 어떤 것[직관]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내 안의 직관 역시 표상들인 한 그것들과 구별되는 어떤 고정불변적인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각주 365번)] [...] 그러므로 이 고정불변적인 것의 지각은 [사물에 대한 한낱 표상이 아니라] 오직 내 밖의 사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시간 상에서 나의 현존재 규정[내적 경험 일반]은 내가 내 밖에서 지각하는 현실적인 사물들의 실존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 나 자신의 현존에 대한 의식은 동시에 내 밖의 다른 사물들의 현존에 대한 직접적인 의식이다."(B275-6, 강조는 필자)

*"I am able to order everything (or almost everything) that I have experienced in time."(CC, 170)

 이 증명에 칸트는 몇 마디를 덧붙인다. ①만일 내 밖의 다른 사물들의 현존에 대한 저 의식이 직접적이지 않다면, 그래서 모든 외감이 상상에 불과하다면 외감과 상상 사이의 구분이 무의미해질 것이다. ②"모든 사고에 수반할 수 있는 의식을 표현하는 '나는 있다'라는 표상은" 직관을 결여한 사고일 뿐이기에 인식도, 경험도 아니다. "왜냐하면 경험을 위해서는 [...] 직관, 여기서는 내적 직관이 필요하고, [...] 시간과 관련하여 주관이 규정되어야만 하는데, 그렇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외적 대상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따라서 내적 경험 자체는 오직 간접적으로만 그리고 외적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B277, 강조는 필자) ③모든 시간규정은 공간상의 운동을 통해서만 선취[지각]된다. ④실체 개념의 바탕에 둘 수 있는 고정불변성의 직관으로서 인간이 가진 것은 물질뿐이다. ⑤이상의 증명이 모든 외적 사물에 대한 직관적 표상을 참된 것으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어떤 표상은 "한낱 상상력의 결과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또한 과거에 경험했던 현실적 외적 대상에 대한 지각의 재생산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요컨대 "내적 경험 일반은 오직 외적 경험 일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B278-279, 강조는 필자)

cf. "규정적인 자기의식은 대상의 인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경험적 의식에서 통각[의식]의 통일성을 실현하는 것과 시공간 속에서 경험적 대상들의 통일성을 실현하는 것 사이에 직접적 연결이 존재한다."(CC, 148)

cf. 가능한 비판: 사물의 표상의 실존이 아닌 사물의 실존이 귀결된다고 말할 때, 이와 같은 구분은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과 양립하기 어렵다.(CC, 169) --> 왜지? 표상과 객관 구분은 잘 해오지 않았나?

cf. Stang, Nicholas F., "Kant’s Transcendental Idealism",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Winter 2018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win2018/entries/kant-transcendental-idealism/>.

 "Kant’s argument, very briefly, is that the existence of objects in space outside me (“empirically external” objects) is a condition on the possibility of my being conscious of the determinate temporal relations of my inner states. Consequently, it is impossible to be a self-conscious subject without there existing objects in space outside of me, and in being conscious of the temporal relations of my inner states I am immediately conscious of the existence of these objects. The problem of “problematic idealism”—how can I infer the existence of objects outside of me on the basis of my immediate knowledge of my inner states?—is based on a false premise. [...] At B274 Kant makes it clear that the “idealism” that he intends to refute is [...] the claim that objects in space do not exist (dogmatic idealism) or at least that we do not know whether they exist (problematic idealism). The sense of idealism that is at issue in the phenomenalist reading—empirical objects exist, and exist in virtue of the contents of experience—is not, apparently, addressed here. On an extreme phenomenalist reading, all there is to the existence of empirical objects in space is our having appropriately unified experiences of them. The phenomenalist can interpret Kant’s argument in the “Refutation” as an argument that consciousness of the temporal relations of my inner states requires that these inner states constitute appropriately unified experiences. Consequently, self-consciousness requires the existence of objects in space (spatially) outside me." 

➡︎ 외부 사물의 존재는 자아의 내적 상태가 속하는 시간관계/시간규정들에 대한 자기의식의 가능조건이다. 풀어 말하면 첫째, 스스로에 대한 의식을 가지려면 나의 '바깥에' 외부 사물이 존재해야만 하고, 둘째, 내적 상태의 시간관계에 대한 의식은 외부 사물들의 존재에 대한 의식과 병존한다. 데카르트 식의 미정적 관념론은 잘못된 전제 위에 세워진 이론이다.

Q. 왜 후설처럼 불변적 시간 형식을 주관 안에서는 찾지 못했을까?

A. 범주나 통각은 모두 시간과 무관한 초시간적 형식들이었음. 시간과 무관했음.(J씨)

원칙들의 체계에 대한 일반적 주석 순전한 사유형식인 범주들만으로는 아무런 종합 명제를 만들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직관을 수중에 가져야만 한다."(B288) 그런데 칸트는 관계 범주들을 예로 들며 범주들의 객관적 실재성은 오직 외적 직관을 통해서만 입증된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이로써 "외적인 경험적 직관의 도움 없이 한낱 내적 의식과 우리의 자연본성에 대한 규정만 가지고서 자기인식을 얘기할 때에, 그러한 인식의 가능성의 제한성을 제시하"고자 한다.(B293-4) 우리는 스스로를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 스스로에 대해 더 잘 알기 위해 외부의 현상 세계를 필요로 한다.

cf. 공간상의 고정불변적인 것, 변화, 상호작용을 직관해야 범주의 객관적 타당성 확인 가능.*

판단력의 초월적 교설 이어서(이하 재검토)

제 3장 대상 일반을 현상체와 예지체로 구별하는 근거에 대하여 범주만으로는 선험적 종합명제를 산출할 수 없다. 범주들은 반드시 도식으로써 직관을 포섭해야만 비로소 객관적 타당성을 가지게 된다. ★순수지성개념으로서의 범주는 결코 초험적으로 사용될 수 없으며, 경험적으로만 사용될 수 있다. (경험적 직관 없이는 실재적으로 정의될 수도 없다.) 그러나 범주는 그 자체로는 감성적인 조건에 매이지 않기 때문에, 마치 "감관의 모든 대상을 넘어서도 확대 적용되는 것이 허용될 듯이 보"인다.(B305) 이와 같은 감성적 존재자와 대비되는 사물 자체에 해당하는 것을 칸트는 예지적 존재자라 부른 뒤, 과연 순수지성개념들이 이 예지적 존재자에 대한 인식을 가능케 할 수 있는지 묻는다.

[A] 현상체와 예지체는 라이프니츠에게서와 달리 "동일한 사물에 대한 불분명하거나 또는 분명한 인식의 논리적 형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우리 인식에 어떻게 주어질 수 있는가의 차이"를 통해 구별된다.(A249) 전자는 감성적 직관과 범주적 통일을 통해, 후자는 비감성적 직관을 통해 물 자체로서 (주어질 수 있는 존재자가 있다면) 주어진다. 이 물 자체는 미지의 것으로 "단지 감성적 직관의 잡다의 통일을 위한 통각의 통일의 상관자로 기여할 수 있을 따름이다."(A250) 또한 "현상에는 그 자신 현상이 아닌 어떤 것이 대응해야만 한다는 것은 현상 일반의 개념에 나오는 당연한 결론이다."(A251, 강조는 필자) 그러나 이 예지체에 대해 인간은 사고할 수만 있을 뿐, 특수한 직관과 범주을 동원한 인식은 불가능하다.

Q. 어째서 물 자체가 통각의 통일의 상관자인가?

A. 물 자체는 '어떤 것 일반'이므로(=세계?). 통각의 통일 하에 종합되는 표상들의 근원으로서 통각의 통일과 상관관계를 맺는다.

Q. "어떤 것 일반이라는 전적으로 무규정적인 사유물"은 왜 예지체라 일컬어질 수 없는가?(A253)

A. '적극적인' 의미의 예지체, 인식의 대상은 아니다. 그저 사유물로서만, 현상의 근원으로서만 있을 뿐. 

[B] 칸트는 소극적 의미의 예지체와 적극적 의미의 예지체를 구분한다. 전자는 "감성적 직관의 객관이 아닌" 것을 일컫고, 후자는 "하나의 비감성적 직관의 객관'을 일컫는다.(B207) 칸트는 범주 사용의 한계이자, 모든 감성적 존재자에 상응하는 것으로 사고되는 사물 자체로서의 초험적인 예지체의 개념을 그 소극적인 의미에서 불가피하게 용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예지체라는 개념 자체는 아무런 모순을 함유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감성에 대해 그것만이 직관의 유일하게 가능한 방식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A254=B310) 그러나 예지체에 대한 종합 명제를 가능케 할, 그로써 그것들의 객관적 타당성을 적극적으로 확보해줄 비감성적 직관을 수중에 넣는 것은 우리의 인식 능력 바깥에 있다. 이에 따라 칸트는 적극적 의미의 예지체는 그것의 논리적 가능성 이상으로 확신하거나 입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예지체 개념은 순전히 감성의 참월을 제한하기 위한 한계개념이며, 단지 소극적 사용만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은 자의적으로 지어낸 것이 아닌 것으로서, 감성의 범위 밖에 무엇인가 적극적인 것을 세울 수는 없지만, 감성의 제한과 연관이 있다."(A255=B311) 사정이 이러한데도 범주들을 예지체에 대해 적용하고자 하는 시도는 초월적 변증학을 낳을 것이다. --> J씨 정리 함께 참고할 것.

cf. "A noumenon in a positive sense would be an object of an intuition other than our sensible one. The answer to the question if there is such an intuition lies outside our possible cognition (B 309). A noumenon in a negative sense is something that is not an object of our sensible intuition (B 307). This only means, according to Kant, that we know that the way we cognize things is dependent on our form of intuition."(CC, 189)

부록 경험적 지성사용과 초월적 지성사용의 혼동에서 생긴 반성개념들의 모호성에 대하여(이하 재검토) "성찰Überlegung은 주어진 표상들의 우리의 서로 다른 인식 원천들과의 관계에 대한 의식"이다.(A260=B316) 어떤 표상의 쌍이 순수 지성에 속하는지, 아니면 감성적 직관에 속하는지 구별하는 작업은 초월적 성찰에 해당한다. 칸트는 "일양성상이성, 일치상충, 내적인 것외적인 것, 마지막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규정(질료와 형식)"에 대해 논한다.(A261=B317, 강조는 원저자)

반성 개념들의 모호성에 대한 주해 초월적 위치론은 어떤 개념이 감성의 인식력에 속하는지 아니면 지성의 인식력에 속하는지, 또는 그 개념이 적용되는 대상이 현상체인지, 예지체인지 판별해주는 학이다. 라이프니츠의 철학에는 이러한 초월적 위치론이 없었기 때문에 지성만을 세계에 대한 직접적이고 혼란 없는 인식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는 시공간과 같은 감성적 직관을 현상에 근원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고, 사물 자체 또는 예지적 실체인 단자들이 가지는 질서로 생각했다. 반면 감성의 작용 일반은 사물 자체에 해당하는 단자들에 대한 혼란된 표상으로 이해했다. 특히 공간의 본성에 대한 불충분한 고려는 무구별자 동일성의 원리에 대한 [잘못된] 옹호로 이어졌다. 공간의 본성을 이해한다면 내적, 질적 개념규정이 동일한 대상이 직관상 서로 다른 공간에 배치될 경우 수적으로 상이해진다는 것이 자명한데도 말이다.(확인) 또한 개념상 상충하지 않는 것도 실제로는 상충해서 서로의 작용을 상쇄할 수 있음을, 서로 고립된 단자들 사이의 예정조화에 의한 것이 아닌 물리적 상호작용이 존재한다는 것을 꿰뚫지 못했다. 이처럼 라이프니츠는 직관을 도외시하고 오직 개념으로써 세계를 인식하려 했으며 “감관의 개입 없이도 대상들을 규정하려고 하는 지성적 인식의 잘못된 체계”를 세웠다.(A280=B336) 결국 칸트에게 그는 알 수 없는 것—직관 및 현상 너머의 사물 자체—에 대해 철학을 한 독단론자다. 우리의 개념들은 오직 직관에서 주어진 것들에 대해서만 객관적으로 타당하게 사고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관에 대한 고려 없이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대상에 대해 사고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하기 때문에 지성의 월권과 변증적 오류가 생긴다.

cf. 초월적 위치론에 따른 로크 비판(A271=B327). 라이프니츠는 현상을 지성화했고, 로크는 지성개념을 감성화했다.

☆☆☆ 무(無) 개념의 4가지 구분 

1. 대상 없는 공허한 개념(이성적 존재자 --> 논리적으로 가능) e.g. 예지체 

2. 한 개념의 공허한 대상(결여적 무) e.g. 그림자, 추위

3. 대상 없는 공허한 직관(상상적 존재자) e.g. 순수공간과 순수시간 따위의, "대상의 한낱 형식적 조건"(A291=B347) 

4. 개념 없는 공허한 대상(부정적 무 --> 논리적으로도 불가능) e.g. 두 변을 가진 직선도형(자기모순적인 개념의 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