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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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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니 에르펜베크, <모든 저녁이 저물 때> 예니 에르펜베크, 배수아 옮김, ⟪모든 저녁이 저물 때⟫, 한길사, 2018 가정법이 지배하는 소설이다. 우리가 살 수 있었던 모든 삶들, 바랄 수 있었던 모든 사랑들, 행할 수 있었던 모든 정치들을 현실세계와 가능세계의 교차를 통해 형상화한다. 문학의 형태를 입음으로써 이야기는 현실성과 가능성 사이의 위계를 해체시키고, 둘을 궁극적으로는 분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그 모든 가능한/현실적인 실존들의 끝은 공통적으로 죽음이다. 사람이 죽지 않는 가능세계는 없다. 사람이 죽지 않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가능하지 않냐고 묻는 것은 아주 우스운 일이다. 유대인 혐오, 제1차 세계대전, 볼셰비즘, 독일 통일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등장하기에 진지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이해한다. 형식적으로 아주 독특하고 미..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석영중•정지원 옮김, ⟪이반 일리치의 죽음⟫, 열린 책들, 2021. 세상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어떤 해석을 내놓고 퍼뜨리는지를 탁월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하이데거 자신이 ⟪존재와 시간⟫ 내 각주를 통해 톨스토이의 이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외면에서 기만을 발견하고, 삶 전체를 자신의 임박한 죽음에 입각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가진다. 그렇게 죽음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견해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삶 역시 기만이었음이 밝혀진다. 죽음에 대한 직면이 '좋은 삶'에 대한 진심어린 성찰을 가능케 한 것이다. 문득 나는 우리가 죽음이 아니라 늙음에 대해서도 외면하지 않는가 생각하게 되었다. 나만 해도 마치 내가 영원히 늙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면서 지내고 ..
데버라 리비, <알고 싶지 않은 것들>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데버라 리비, 이예원 옮김, ⟪알고 싶지 않은 것들⟫, 플레이타임, 2018. / 버지니아 울프, 공경희 옮김, ⟪자기만의 방⟫, 열린 책들, 2021. '작가의 탄생'을 주제로 11월까지 소설을 쓰려고 해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읽게 된 책 두 권인데, 둘 모두 여성의 글쓰기를 다룬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이 자유롭게 소설을 쓰고 시를 쓰고 예술을 향유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오기를 진지하게 바랐지만, 데버라 리비가 우리로 하여금 단지 '목소리를 크게 내도 된다'고 말해주기 위해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쓴 것을 생각해보면 울프의 바람은 반만 이루어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람들에게 그리고 가사일에 방해받는 거실이 아닌 나만의 방에서 블로그로, 화상회의로, 혼자만의 수첩..
알라 알아스와니, <시카고> 알라 알아스와니, 김능우 옮김, ⟪시카고⟫, 을유문화사, 2014. 좋은 소설은 보편성과 특수성을 날실과 씨실처럼 교차시킨다. 숱하게 보아왔던 주제를 한 번뿐인 상황 속에 녹여내 어딘지 친숙하면서도 새롭다는 반응을 이끌어낸다. 알라 알아스와니는 ⟪야쿠비얀 빌딩⟫에 이어 ⟪시카고⟫에서도 타고난 이야기꾼으로서 활약한다. 사랑과 애국심, 여성의 억압이라는 보편적 테마가 시카고에 사는 이집트인 유학생들의 삶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 용해되어있다. 샤이마와 타리크의 연애는 강박적이며 억압적인 종교의 규율에 얽메여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따스하고, 성공한 이민자 교수인 살라흐 박사의 조국을 위한 용기와 비겁은 비난의 시선을 거두게 될 만큼 안타깝다. 남편의 이기심과 '후진국'의 조직적 부패에 희생당하는 마르와는 돈의 유..
배수아, <에세이스트의 책상> 배수아, ⟪에세이스트의 책상⟫, 문학동네, 2021. 오늘날의 언어는 더 이상 '야만적'이지 않기 때문에, 즉 개별 단어가 지칭하는 의미의 범위가 지나치게 좁아졌기 때문에 오히려 진정한 소통을 방해하게 되었다. 이제 어떤 언어를 구사할 줄 모른다는 사실은 상황에 따라 누군가를 깔보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 독일어에 서투른 사람이 독일인뿐인 파티에 간 상황을 상상해보자. 그녀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도, 주위의 환경에 대해서도 정확한 단어를 골라 표현할 수가 없다. 반면 음악은 특수한 언어에 구애되지 않는 매체로, 서로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의 사이도 연결해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음악이 지시할 수 있는 의미의 범위는 무한하게 넓다. 따라서 음악에 의한 소통은 언어에 의한 소통과는 정반대의 ..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김난주 옮김, ⟪인간실격⟫, 열린책들, 2021. "불행. 이 세상에는 불행한 온갖 사람이, 아니 불행한 사람들뿐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 사람들의 불행은 세상을 향해 당당히 항의할 수 있는 것이고, 또 도 그 사람들의 항의를 쉽게 이해하고 동정합니다. 그러나 나의 불행은 모두 나의 죄악에서 비롯된 것이니 누구에게 항의할 수도 없고, 또 우물쭈물 한마디라도 항의 비슷한 말을 하면 넙치는 물론이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느냐며 가당치 않아 하겠지요. 나는 속되게 말해 것인지, 반대로 마음이 너무 약한 것인지 나도 도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죄악 덩어리인 듯하니 한없이 불행해지기만 할 뿐 막을 구체적인 방안이 없습니다."(129) 얼마 전 대학원 사..
하인리히 뵐, <천사는 침묵했다> 발췌 하인리히 뵐, 임홍배 옮김 ⟪천사는 침묵했다⟫, 창비, 2019. 전쟁 직후 독일의 폐허를 응시하는 책. 주옥 같은 구절들이 많은데, 손목이 슬슬 아파서 두 부분만 옮긴다. 차례대로 사랑을 집어삼키는 피로를 다루는 93쪽, 1948년의 독일의 본질을 꿰뚫어버리는 듯한 144-5쪽. "나와 함께 있어줘." 이렇게 말하고서 그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키스를 하자 그녀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가 그녀를 놓아주자 그녀가 말했다. "아냐, 이러지 마. 날 놓아줘. 너무 피곤해서 죽을 지경인데,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고. 배도 고파, 너무너무 배고파."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 그가 말했다. "당신도 날 사랑해?" "그런 것 같..
오스카 와일드, <행복한 왕자> 오스카 와일드, 최애리 옮김, ⟪행복한 왕자⟫, 열린책들, 2021. 오스카 와일드의 짧은 소설 네 편이 실린 책이다. 가장 유명한 는 뭉클했지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고, 는 너무 작위적이었다. 사랑에 실패한 뒤 실속 있는 형이상학 공부로 되돌아가겠다고 선언하는 젊은 학생의 독백 부분을 사진으로 찍어 분석형이상학도 분께 보내드렸더니 "그게 실속이 있다고요?"라며 허탈한 웃음을 내보이셨다. 도 그저 그랬지만 만큼은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은 인어에게 반한 어부가 사랑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제거하면서 시작된다. 영혼은 계속해서 어부에게 자신을 다시 받아들여달라고 유혹하지만, 지혜에 대한 약속도, 부에 대한 약속도 어부를 설득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어부는 끝내 춤추는 여자의 맨발을 보여주겠다는 약속에 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