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

(86)
아이리스 머독, <바다여, 바다여> "세월이란 사람들의 현실로부터 우리를 갈라놓고, 사람들을 떼어놓아 유령으로 바꿔놓[는다고들 하]지. 그게 아니라, 그들을 유령이나 악마로 변형시키는 건 오히려 우리야. 과거에 대한 쓸데없는 선입견들이 그런 환영을 만들어내고는 유령 헬렌을 위해 트로이의 영웅들이 싸우게 만들었듯이 힘을 발휘하지."(II-177) 소설은 바다의 광채와 식도락에서, 물빛과 아스파라거스에서, 그러니까 완전한 행복과 낙원의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1인칭 화자인 주인공 찰스는 바다가 드러내는 모든 시청각적 세부를 흡수할 줄 아는 이지적인 인물이다. 또 식사 한 끼도 허투루 먹는 법이 없도록 삶의 물질적인 면모 역시 사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예계를 은퇴했지만 여전히 정력적인 그에게서 독자는 좋게 말하면 (기껏해야) 예민하고, 나..
우다영,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우다영,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문학과지성사, 2023. 우다영의 세 번째 소설집에 실린 다섯 편의 글은 모두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인간성의 본질, 혹은 (본질주의의 언어가 부담스럽다면) 조건이라고 불릴 수 있는 그것은 그 개념상 선험적으로 성립하는 것으로서, 한낱 경험적인 변화에 불과한 문명의 발달이나 지구적 사건에 의해 좌우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하지만 SF라는 장르는 인간적 삶의 선험적 구조를 극적으로 시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한다. 여기서 '극적으로'란, 인간의 조건 가운데 하나를 과감히 삭제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에서는 자아의 단일성을, 에서는 한 번의 탄생과 한 번의 죽음으로써 규정되는 삶의 유한성을, 에서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에서는 ..
사뮈엘 베케트, <머피(Murphy)> 사뮈엘 베케트, 이예원 옮김, ⟪머피(Murphy)⟫, 워크룸프레스, 2020. 인간이기를 멈추고자 발버둥치는 인간의 실존적 실패를 기록한 소설. 1935-6년, 유럽의 전간기에 쓰인 ⟪머피⟫는 기이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머피가 창밖으로 미미하게 들려오는 속세의 소리를 경멸하면서, 제 몸을 목도리 일곱 장으로 흔들의자에 스스로 결박한 채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삶도 죽음도 아닌 이 부동의 상태가 머피에게만큼은 지복이다. 의지도, 행위도 없고 무엇보다 타인이 없다. 유아론자 머피는 이처럼 부산스러운 세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려 하지만, 베케트는 첫 문단부터 "자유인 양"이라는 미묘한 표현을 통해 벌써부터 머피의 실패를 암시하고 있다(9). 머피의 스승 역시 심장을 자의로 멈출 줄 아는 니어리라는 도인이다..
프란츠 카프카, <성> 본의 아닌 코메디언 K의 분투기. 본의 아니란 사실이 이 코메디를 비극으로도 만든다.  작품의 초반부에서 돋보이는 설정은 바로 성이 자아내는 감정이 바로 우울감이라는 사실이다(2장). 슬픔도, 두려움도 아닌 우울감. 우울감은 마치 죽음이 슬픔을, 괴물이 두려움을 야기시키는 것처럼 특정한 대상의 특정한 성질로부터 개연적으로 기인하는 종류의 감정이 아니다. 우울감은 한두 개 대상의 조합물로 환원될 수 없는 세계 전체를 물들이는 일종의 무드이다. 이 병리적 무드 속에서 K는 자신의 처지를 '싸움'으로 규정한다. 익명적인 성의 폭력에 맞서 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싸움으로. 그런데 관청이 가하는 폭력이란 실체 있는 억압이나 추방에 대한 협박이 아니다. 그보다는 당신이 불필요하고 잉여적인 존재임을 ..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사유와 멜랑콜리 윌리엄 셰익스피어, 김민애•한우리 옮김, ⟪셰익스피어 4대 비극⟫, 2023, pp. 9-250."아니, 이건 좀 다시 생각해 봐야겠는데."(146) 두 번역가 님 중 어느 분께서 쓰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작품 해설에 따르면 "햄릿은 우유부단한 인물의 전형이 아니라 오히려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근대적 인물이었다."(875, 강조는 내 것)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는 합리적이었기 때문에 우유부단해졌다. 자신의 아버지가 죽임을 당하는 동일한 상황에 놓였을 때에 격정적으로, 즉시 행동에 돌입한 레어티즈와 달리, 햄릿은 미친 척 가장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복수가 이루어질 최적의 타이밍을 계산했으며, 친서를 위조하는 등 자기의 이익에 맞게 상황을 조작했다. 그러나 장시간에 걸쳐 숙고된 이 모든 합리적 선..
시몬 드 보부아르, <초대받은 여자> 시몬 드 보부아르, 강초롱 번역, ⟪초대받은 여자⟫, 민음사, 2024."그 애인가 나인가. 그건 내가 될 것이다."(365) 인물을 살아있는 육체가 아니라 형이상학의 사례로 전락시키고자 의도한 보부아르에게 실망했다. 문학은 철학의 시녀가 되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문학의 의미는 개념과 논증, 심지어는 직관에 의해서도 감금되지 않는 데, 즉 교훈으로 전락하는 일로부터 끊임없이 도주하는 데 있다. 그러나 오만과 나란히 상당한 자기혐오를 지니고 있는, 자아의 경계가 허물린 그자비에르와 위선의 표본 프랑수아즈, 그녀들의 모든 불안 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저 홀로 단단히 지내 얄미운 피에르 사이 복잡한 욕망의 서사에 압도적인 설득력이 있어 소설가로서 보부아르의 역량을 부정할 수만은 없다. 결정적으로 이 소설은 보..
시몬 드 보부아르, <위기의 여자> 시몬 드 보부아르, 손장순 옮김, ⟪위기의 여자(La Femme Rompue)⟫, 문예출판사, 2020."타인의 연애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거랍니다."(121) 종속의 위험과 슬픔에 대한 소설.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으면 마음을 너무 쓰게 되"어, "상대방이 얼굴을 한번 찌푸리거나 하품만 해도 벌써 불안해"지는 유약한 주부 모니크는 남편 모리스와 두 딸 콜레트, 뤼시엔으로 이루어진 가정에 충실한 그야말로 현모양처다(49). 콜레트는 사회생활을 포기하는 대신 이른 결혼을 하고, 뤼시엔은 뉴욕으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모니크는 40대에 들어 글을 쓰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는 데만 마음을 쏟아도 되는 여유를 누린다. 남편 모리스가 변호사 노엘리와 내연 관계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후로는..
셰익스피어, <맥베스> 윌리엄 셰익스피어, 한우리 옮김, ⟪맥베스⟫, 더클래식, 2019, 모든 강조는 필자.  잠의 모티프가 서사를 관통한다. 처음에 맥베스는 뛰어난 군인이자 충성심의 화신으로만 비추어진다. 적어도 세 마녀들이 그에게 왕이 될 운명을 계시하기 전까지는 그렇다. 이후로 독자는 "별들이여, 빛을 감추어라! / 이 검고 깊은 야망을 보지 마라."고 말하는 맥베스를 만나게 된다(37). 그러나 맥베스는 성왕을 암살하려는 자신의 계획이 끔찍하다는 것을 잘 알기에 주저한다. 즉 그에게는 야심과 더불어 양심이 아직 살아있다. 결국 계획을 단념하기로 생각한 그의 마음을 되돌리는 것은 그의 부인, 레이디 맥베스다. 레이디 맥베스는 남편의 '비겁함'과 남자답지 못함을 꾸짖는다. 부인의 책망과 자기 안의 야심을 못 이겨 결국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