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잡담이나 소회 같은 것

(47)
20250406 시간이 마치 별빛 흐르듯 봄날의 햇살, 꽃, 식사. 자목련과 아네모네, 데이지, 벚꽃은 벌써 져버렸다. 동명이인인 언니들을 초대해 오픈 샌드위치를 대접했다. 과카몰레에 석류알, 구다 치즈에 연어, 고르곤졸라 치즈에 구운 바나나, 마지막으로 비트 훔무스에 소고기 안심을 올렸다. 의외로 손이 많이 갔고 장도 왕창 봐야 했지만 내가 그동안 받아온 정신적인 지지에 비하면 작기만 한 보답이었다. 그리고 더 많은 식사들. 필리핀 음식이라는 코코넛 우유 아도보, 닭갈비, 콩나물 해장국 등. 요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고 미각도 그다지 세련되지 않다 보니 그냥 혼자서 빠르게 먹을 수 있는 일품 요리가 대부분이지만, 레퍼토리를 늘려가는 재미가 있다. 다음 장 보는 사이클에서는 각 언니가 추천해준 연어 오챠즈케와 셀러리볶음에 도전할 것이다. ..
20250314 지중해식 아침과 서글픈 밤 이상한 밤이다. 방은 춥고 몸이 무겁다. 그러고 보니 낮에도, 꼿꼿이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그래도 아침 시간을 부지런하게 보낸 덕에 멋진 지중해식 도시락을 만들어서 나갔다. 피타 치즈와 오이, 퀴노아, 소금과 후추를 쳐서 닭고기 구운 것을 쌌다. 덕분에 피곤한 것치고는 하루종일 도서관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침대 위에 반쯤은 앉아있고, 반쯤은 누워있다. 아이리스 머독의 ⟪바다여, 바다여⟫를 다 읽어간다. 2월에 읽기 시작했으니 한 달 남짓 붙잡고 있었다. 주인공 찰스가 자신의 탐욕과, 원한과, 허영심으로 꾸며낸 사랑의 거짓됨을 드디어 깨달았다. 페이지를 넘기는데 갑자기 눈물이 마구 흐르기 시작했다. 최대한 경쾌하게 일기를 써보려 했지만, 타자를 치는 지금도 마구 눈물이 난다. 나..
20250308 바람의 자비 사흘 동안 똑같은 황갈색 자켓을 입고 도시 곳곳을 돌아다녔다. 이곳에서의 생활과 관련해 유난히 기쁜 마음이 솟는 요즘이다. 기억이 날아가기 전에, 또는 혹시 생길지도 모를 나쁜 일이 내 감정에 구름을 드리우기 전에 지금의 만족감을 보존하고 싶다. 그러고 보니 하늘을 장악해온 비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기 시작한 시점과, 갑자기 내 가슴이 잔잔한 감동으로 벅차오르기 시작한 시점이 꼭 일치한다. 햇볕 쬐는 일이 이렇게 중요하다. 목요일에는 정말 오랜만에 생산적이었고, 어제인 금요일에는 나름 꽃단장을 한 채로 봉준호의 영화 '미키17'을 봤다. 두 날 모두 자기 전에 도수가 낮은 맥주를 마셨는데 법칙 따르듯 끔찍한 악몽을 꿨다. 나는 술을 마시면 오히려 잠을 잘 못 잔다. 언젠가 행복을 도덕의 원리로 삼을 수 없..
20250301 faire le ménage 고맙게도 하루종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외롭지 않은 하루를 보냈다. 같이 커피를 마시고, 잠깐 도서관에서 혼자 공부를 한 뒤 똑같은 친구들을 또 만나 메타포에서 맥주를 마셨다. 브뤼헤 트리플이라는 맥주였는데, 도수가 높아 고작 한 잔 가지고 취해버렸다. 자아의 힘이 아직 미치기 전인 날것으로서의 세계에 대해 미유키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무런 종합도, 포착도, 인식도 가해지지 않은 순수한 질료에 대한 이야기였다.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후설과 메를로-퐁티 사이의 입장 차이는 어쩌면 자아와 자아 아닌 질료 사이의 구분을 끝까지 고수하느냐, 아니면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포기하느냐에 근거한 게 아닌지 생각했다. 동시에 자아와 질료 사이 최초의 접촉에 관한 주장을 과연 현상학이, 아니 어떤 철학이든 정당..
20250225 기대 속에 사슬이 시끄러운 알람 시계를 장만했다. 꺼버리고 다시 자는 날도 있지만, 옛날보다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게 됐다. 밤이 늦으면 자야 한다는 감각. 오전에도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감각. 그리고 햇살은 생각보다 오래 지상에 머무른다는 감각 등을 익히고 있다.  피아노를 치러 집 뒷쪽의 작은 공터를 지나는데, 공터의 가생이에 흐르는 개울 같은 것 위로 나무들이 무성했다. 어떤 나무 하나가 지나치게 녹색이어서,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졌다. 아직 발명되기 전의 공업 용품처럼 빳빳하고 원색적으로 초록인 이파리 위로 햇볕이 왁스처럼 흘러내렸다. 나는 초록의 원형이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네가 아는 모든 초록의 원형. 자연에 속해 있지 않은 것만 같은 색이었다. 그로부터 묘한 생명력을 느꼈다. 정확하게는 생명력..
20250206 백수의 마음 글을 쓰기 위해 애써 우울한 척을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바깥세상의 부산스러움과, 집 안에서 이런저런 영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싸구려 웃음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야만 글을 쓸 수가 있고, 그런 탈주는 아무리 상쾌할지언정 약간의 헛헛한 기분을 남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때의 공허란 불행과 전혀 다르다. 애초에 불행과 우울 사이에는 별다른 인과관계가 없다. 슬픔과 우울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나는 가뿐하게 우울하며, 우울하게 가뿐하다. 덕분에 글을 끼적이기 시작할 수 있었다. '인디펜던트 리서처'라 쓰고 백수라고 읽는다. 6개월 차. 오늘은 오후 네 시에 일어났고, 정신적으로는 이미 약혼식까지 올린 애인과 한 시간 정도 통화를 했다. 애인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복통을 호소했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
20241125-7 비관주의 컨퍼런스에서 하하호호한 썰 철학적 생각이 아닌 일상의 사실을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망설인다. 기억할 가치가 있는 사건은 무엇이며, 기억할 뿐만 아니라 표현할 가치까지 있는 사건은 무엇일까?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사건이 표현돼야 마땅하고—한트케 소설의 치졸한 디테일링을 생각하면—어떤 의미에서는 그 반대기 때문이다. 그 어떤 사건도 딱히 표현될 가치가 없다. 무게의 부덕함, 가벼움의 미덕. 그 사이의 균형을 찾느라 애를 먹고 있는 내 아이클라우드 메모장은 빵 터져버리기 일보 직전이다. 그래도 처음으로 국제 학회에 다녀온 일은 이야기할 만하지 않을까? ‘Edmund Husserl’s Troubled Quest for Eudaimonia’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했다. 발표 자체보다도 Q&A 세션에서 즉흥적으로 대답을 할..
20241122 틴탑위곤롹킷드뢉핏탑잇헤이돈스탑잇팝잇 고등학교 3학년 때 엑소의 '늑대와 미녀'가 발표됐다. 일요일 저녁 때마다 어차피 주말에는 그다지 인기가 없는 교실 문을 쾅 닫고, 불을 끄고, 친구들과 모여서 한 주의 음악 방송을 몰아본 기억이 있다. 후속곡 '으르렁'의 컨셉은 음악이나 의상이나 너무 뻔하게 느껴졌고, '늑대와 미녀' 쪽이 차라리 세련됐다고 생각했었다. 무대의 시작에 열두 명이나 되는 멤버가 백댄서도 없이 생명의 나무였나, 아무튼 뭐시기 마법적인 식물을 형상화하는 춤이 얼마나 심미적이고 파격적으로 여겨졌던지. 그 와중에 혼자서는 어느 누군가를 어렴풋이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온유를 좋아했었다. 학교 구석구석에서 샤이니의 무척 키치한 댄스곡을(이를테면 아미고) 들으며 수능특강 등등을 공부했다. 돌이켜보면 전 학교의 누구도 온유와 비슷하게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