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충분조건

(3)
3 어떤 독서는 육체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지적인 이해를 넘어 신체적인 전율을 가져다주는 책들이 있다. 부자조차 마르크스를 읽는다면 두 볼이 상기되고, 천사조차 니체를 읽는다면 허공에라도 주먹질을 하고 싶어질 것이다. 또는 가만히 글을 쓰고 있는 것뿐인데 마치 춤을 추고 있는 것만 같이 느껴지는 시간들이 있다. 철학적 행위는 가장 정적인 순간에 최대한의 역동성을 가능하게 만든다. 고요한 카페가 새로운 매니페스토, 혹은 복음서가 야유와 함께 울려퍼지는 광장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카페가 조용하면 조용할수록 찬성과 반대의 목소리는 보다 우렁차게 대립한다. 스물두 살 무렵의 어느 일요일 오후, ⟪독일 이데올로기⟫를 읽던 와중 성경 읽기 모임을 하기 위해 카페에 들어온 신자 무리와 눈을 마주친 적이 있다. 나는 공..
2 다섯 시면 해가 져버리는 데다 해가 떠있어도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날씨를 보상하기 위해 도시 전체가 조명을 휘감았다. 다른 도시에 가도 마찬가지다. 주황색 불빛 아래를 걸어 식당과 마트, 무엇보다 세탁방에 도착한다. 열흘에 한 번 세탁방 안에 가만히 앉아있는 일이 주는 위안은 크다. 세탁방 안에서 당신은 스스로를 정당화할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당신의 목적은 세탁뿐이고, 그 일은 군말없이 물을 뿜고 세제를 삼키는 기계들이 대신하고 있다.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순간 당신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세탁--을 반드시 완수하게 된다. 실수가 끼어들 틈도 거의 없다. 필연적인 성공을 느긋하게 기다리는 당신은 책을 읽어도 좋고,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셔도 좋으며 어떤 이유에서인지 세탁기보..
1 유학일기 같은 것을 정기적으로 쓰고 싶다는 생각에 새 카테고리를 파게 되었다. 서울대입구역 3번 출구 근처에 내가 정말 좋아하는 분위기의 술집이 있다. 지난 해 봄에 쓴 ⟪바다 망령의 숨⟫에서 주인공이 모르는 남자와의 사랑에 마음을 의지하려다 그와 같은 행위의 절대적 무의미함을 깨닫고 관둔 술집의 이미지는 그곳에서 따왔다. 철학과의 동료이자 친구들을 그곳으로 이끌고 갈 때마다 나는 그곳이 혁명을 모의하기 좋을 만큼 음습해서 맘에 든다고 말하곤 했다. 저녁에 들어가 새벽까지 머무르기도 하고, 타임킬링에 불과했던 수다에서부터 진지한 대화까지 모두 나눌 수 있었던 곳으로, 내 대학원 생활을 한 개의 장면으로 집약해야만 한다면 그곳 구석의 이미지를 나는 택할 것이다. 어느 날의 새벽, 그곳에서 술을 마시다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