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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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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ples / Pompeii / Ischia / Sorrento / Positano 오랜 여행을 마치고 이제야 유학지에 도달했다. 어제는 커다란 짐 세 개를 끌고 버스를 타랴, 기차를 타랴 고생한 탓에 숙소에 오자마자 누룽지 한 그릇만 후딱 끓여먹고 잠에 들었다. 그래도 오늘은 여유롭게 늦잠을 자고, 공항에서 택시를 타지 않은 대신 아낀 돈으로 라멘과 커피를 사먹었다. 숨을 좀 돌리고서는 다시 나가 러닝을 30분 정도 하고 생필품을 샀다. 지금은 애인이 추천해준 offonoff의 노래를 듣고 있다. 남은 하루의 계획은 다음과 같다. 토마토 스프와 계란을 저녁으로 먹고, 은행 계좌를 개설하기 위해 필요한 절차를 밟고, 네덜란드에 사는 친구에게 연락을 하고, 수강편람을 조금 살펴본 뒤 Miller(2002)와 하이데거를 조금 읽을 생각이다. 바쁘다 바빠.
Athens "시체의 창백한 피부 색깔로 된 벽지에 걸린 달력을 나는 보고 있었다. 작년의 달력이었다. 새해가 되었을 때 떼어내지 않았다. 새로운 시작 따위를 할 기력이 없었다. 작년의 달력만큼 쓸모없는 존재가 있을까?"라는 문장군을 미술관에서 떠올렸다. 파르테니스라는 화가의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이미 절반도 지난 2023년도 달력을 단지 그의 도록 형태를 띠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구매한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스스로를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저 여성 인물은 얼마 전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했다. 자신의 잘못으로 직업을 잃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수치심에 허덕인다. 퇴사를(주변 사람들에게는 해고가 아닌 퇴사라고 알려져있다) 계기로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떠난 이국의 수도 아테네에서마저 괴로움에 시달린다. ..
Naxos / 용기에 대한 메모 거대한 페리를 타고 낙소스 섬으로 넘어왔다. 낙소스 섬에서는 아기오스 프로코피우스 해변 옆에 숙소를 잡았다. 실제로 사흘 내내 오후에는 바다에만 머물렀다. 염분이 많아 수영을 하지 못하는 나도 둥둥 띄워주는 고마운 물 속에서 용기에 대해 이것저것 사색할 수 있었다. 전장에서 병사들이 쓴 에세이들을 토대로 쓰인 Mystery of Courage (2002)를 읽고 있는데, 덕분에 몇 가지 조건들만을 제시함으로써 용기의 모든 사례를 포괄하는 어떤 정의를 제시하는 일은 무척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목표로 삼는 작업은 아무래도 용기의 본질을 독단적으로 규정하는 일보다 용기를 발휘하는 주체의 의식을 탐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상학이 주객 이분법의 해소를 꿈꾸는 것과는 별개로--나는 사실 이 꿈이 실..
Mykonos 구름이 페가수스 모양으로 모였다가 아무런 영웅적인 이야기도 없이 싱겁게 흩어졌다. 나는 그리스의 파티 아일랜드라고도 불리는 미코노스의 호텔 수영장에 있었다. 얼핏 페인트로 칠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얀 흙으로 만들어진 듯 자연스럽게 보이는, 그러나 오래 들여다보면 인공성이 드러나는 건물 안에서 칵테일을 마시면서. 머리 위로 올리브나무 잎이 오랫동안 깎지 않은 강아지의 머리털처럼 살랑거렸다. 등 뒤로는 바닷바람이 뜨거운 햇살을 중화시키며 부드럽게 불어왔다. 그러니 아무 걱정거리도 없어야 했다. 천국의 형상을 본따 만들어진 휴양 호텔 안이었기 때문이다. 저녁에는 올드 타운에 내려가볼 예정이었다. 이틀 전 나는 다니던 대학의 자퇴 원서를 카페에서 작성하고 카페 옆의 PC방에서 인쇄했다. PC방에서는 아르바이..
울산 Tag 1 비 탓에 기차가 지연될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서울역에서 편의점 커피를 마셨다. 다행히 열차는 정시에 도착했고, 중간중간 속도를 늦추긴 했지만 마침내 우리를 무사히 울산에 데려다주었다. 애인은 바다를 보고 싶어했고, 나는 그의 고향이 궁금해 선택한 여행지였다. 당황스럽게도 ktx 역과 울산 시내는 서로 무척이나 떨어져있어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려야 했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어느 소곱창 집이었다. 모든 메뉴가 2인분 이상으로밖에 주문이 안 돼서 폭식할 것을 각오하고 구이 2인분, 전골 2인분을 주문했다. 구이는 부드러우면서도 질겅질겅 씹혔는데, 알알이 바삭하게 튀겨진 감자 맛이 났다. 곱창 안에 곱이 잔뜩 차있어 정말 고소했다. 전골은 맵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국물 맛이 중독적이었다. 서..
마곡나루 꿈과 같던 나날, 천국과도 같았던 서울의 서쪽. 술기운에 문학 이야기를 하고 단잠을 자고 일어나면 풀과 꽃과 야자수가 안녕, 나라는 세계도 존재한단다, 하고 웃어줬던 마곡나루. 사진 찍는 법을 배웠고 행복해지는 연습을 했습니다.
하조대 동해안으로 가는 버스에 타서 나는 띄엄띄엄 잠을 잤고,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푹 잤다. 잠깐씩 깰 때마다 눈 감은 그의 옆얼굴, 곧은 코와 살짝 튀어나온 아랫입술을 바라보다 영원을 꿈꿔버리고 말았다. 서로 나눠 끼운 이어폰을 통해서는 환상약국이란 요상한 이름의 밴드가 노래하고 있었고. 양양여객터미널의 흡연실은 서울 것에 비해 매우 깔끔했고 냄새도 별로 안 났다. 그는 터미널에서 사온 말보로 어쩌고를 피웠고 나는 보다 얇고 긴 멘솔을 피웠다. 하조대의 해변가에 나오니 구름이 많이 걷혀있었다. 해가 없어서 하늘이 가라앉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오히려 좋았다. 바닷가를 걷다 잠깐 쪼그려 앉았고 그대로 파도가 땅을 만나 잦아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꽤 거칠어보이는 파도도 막상 우리의 발 밑에 가까이 와서는 힘없이..
Phu Quoc 20221223 비좁기로 악명 높은 비엣젯 에어를 타고 현지 시각 새벽 여섯 시, 푸쿠옥에 도착했다. 잠을 거의 못 잔 상태로 몹시 피곤했지만 날씨가 따뜻한 곳에 오니 신이 났다. 호텔 체크인까지 시간이 떠 얼리 모닝 투어를 다녀왔다. 가장 먼저 역시나 베트남 쌀국수를 먹었고—언니와 엄마는 고수풀을 넣어 먹었지만, 나는 예전에 두드러기가 난 적이 있어 참았다—도시의 경치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연유 넣은 베트남 식 커피를 마셨다. 바다를 구매한다는 개념이 알쏭달쏭했지만 해변가를 따라 리조트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호곡사’라는 절에 가기 위해 다시 차에 올라탔다. 차창 밖으로 호텔들이 한가득 보였다. 재미있는 것은 아직 개발중인 도시인지라 쓰레기가 날아다니는 허허벌판 바로 옆이 번지르르하다는 점이다.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