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ise (14) 썸네일형 리스트형 Antwerp 루프트 교수님과의 면담, 그로만 교수님 수업에서의 발표를 모두 마치고 가뿐해진 마음으로 떠났다. 스스로에게 보상을 준다는 생각을 정말 오랜만에 했는데, 자기연민처럼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무척 즐거운 1박 2일이었다. 혼자였지만 많이 웃었고, 어쩌면 혼자였기 때문에 많이 웃을 수 있었다. 타지살이를 하면서 놀라운 점은 내가 외로움을 많이 타는 편이고, 지금도 조금은 쓸쓸하게 느끼지만 그런 것치고는 혼자서 상당히 잘 논다는 사실이다.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며칠을 보낸 뒤, 새삼스럽게 오, 며칠동안 입을 안 열고도 그냥저냥 지냈네, 레벨업,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게 된다. 기차를 타고 산 하나 없는 플랑드르의 평원을 지나는 중, 바로 앞에 앉은 장발의 남자가 너무 험악하게 생겨서 쫄았다. 그렇게 움츠린.. Leipzig 에드문트 후설은 자아에 의한 구성* 이전의 비자아적 존재자를 근원질료(Urhyle)라 일컬었다. 구성에 논리적으로 앞서기에 'Ur'가 붙고, 구성에 의해 형상(morphē)이 그처럼 아직 부여되지 않았기에 질료라 불린다. 후설에 따르면 세계가 우리에게 현재 경험되는 이 모습으로 경험되는 이유는 자아가 저 구성적 성취를(Leistung, accomplishment) 통해 근원질료에 질서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국역에서는 종종 '작업수행'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성취'라는 표현이 무척 중요하다. 세계가 저 홀로, 레디메이드로서, 원래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의 성취를 통해 비로소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 주관 없이는 세계가 아예 없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렇게' 우리가 잘 아는 방식대로 세계가.. Firenze 부주의하다면 부주의했고, 억울하다면 억울했다. 단 하루만에 비행기 한 편과 기차 세 편을 내리 놓쳤다. 갑작스러운 데다 상당한 추가 지출이 있어 그로써 마치 내 존재의 무게라도 감해진 듯, 하루종일 허했다. 목구멍에서 신 맛이 나도록 실컷 뛰어가놓고 세 번째 기차를 놓쳤을 때는 로마 도심의 잿빛 정류장에 주저앉았다. 훌쩍거리면서 여행함이라는 실존의 양태를 저주했다. 하지만 마침내 피렌체 역에 도착해, 거리의 식당으로부터 스며나오는 누런 빛깔과 끊이지 않는 말소리에 맞닥뜨리자 스르륵 긴장이 풀렸다. 마음을 다스리고 시뻘건 플로렌타인 스테이크를 뜯었다. 또 먹고 싶다. 이번 여행의 큰 수확은 내 죽음 이후의 시간성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얻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시간이 있으리라는 것 정도야 당연히 알고 .. Naples / Pompeii / Ischia / Sorrento / Positano 오랜 여행을 마치고 이제야 유학지에 도달했다. 어제는 커다란 짐 세 개를 끌고 버스를 타랴, 기차를 타랴 고생한 탓에 숙소에 오자마자 누룽지 한 그릇만 후딱 끓여먹고 잠에 들었다. 그래도 오늘은 여유롭게 늦잠을 자고, 공항에서 택시를 타지 않은 대신 아낀 돈으로 라멘과 커피를 사먹었다. 숨을 좀 돌리고서는 다시 나가 러닝을 30분 정도 하고 생필품을 샀다. 지금은 애인이 추천해준 offonoff의 노래를 듣고 있다. 남은 하루의 계획은 다음과 같다. 토마토 스프와 계란을 저녁으로 먹고, 은행 계좌를 개설하기 위해 필요한 절차를 밟고, 네덜란드에 사는 친구에게 연락을 하고, 수강편람을 조금 살펴본 뒤 Miller(2002)와 하이데거를 조금 읽을 생각이다. 바쁘다 바빠. Athens "시체의 창백한 피부 색깔로 된 벽지에 걸린 달력을 나는 보고 있었다. 작년의 달력이었다. 새해가 되었을 때 떼어내지 않았다. 새로운 시작 따위를 할 기력이 없었다. 작년의 달력만큼 쓸모없는 존재가 있을까?"라는 문장군을 미술관에서 떠올렸다. 파르테니스라는 화가의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이미 절반도 지난 2023년도 달력을 단지 그의 도록 형태를 띠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구매한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스스로를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저 여성 인물은 얼마 전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했다. 자신의 잘못으로 직업을 잃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수치심에 허덕인다. 퇴사를(주변 사람들에게는 해고가 아닌 퇴사라고 알려져있다) 계기로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떠난 이국의 수도 아테네에서마저 괴로움에 시달린다. .. Naxos / 용기에 대한 메모 거대한 페리를 타고 낙소스 섬으로 넘어왔다. 낙소스 섬에서는 아기오스 프로코피우스 해변 옆에 숙소를 잡았다. 실제로 사흘 내내 오후에는 바다에만 머물렀다. 염분이 많아 수영을 하지 못하는 나도 둥둥 띄워주는 고마운 물 속에서 용기에 대해 이것저것 사색할 수 있었다. 전장에서 병사들이 쓴 에세이들을 토대로 쓰인 Mystery of Courage (2002)를 읽고 있는데, 덕분에 몇 가지 조건들만을 제시함으로써 용기의 모든 사례를 포괄하는 어떤 정의를 제시하는 일은 무척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목표로 삼는 작업은 아무래도 용기의 본질을 독단적으로 규정하는 일보다 용기를 발휘하는 주체의 의식을 탐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상학이 주객 이분법의 해소를 꿈꾸는 것과는 별개로--나는 사실 이 꿈이 실.. Mykonos 구름이 페가수스 모양으로 모였다가 아무런 영웅적인 이야기도 없이 싱겁게 흩어졌다. 나는 그리스의 파티 아일랜드라고도 불리는 미코노스의 호텔 수영장에 있었다. 얼핏 페인트로 칠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얀 흙으로 만들어진 듯 자연스럽게 보이는, 그러나 오래 들여다보면 인공성이 드러나는 건물 안에서 칵테일을 마시면서. 머리 위로 올리브나무 잎이 오랫동안 깎지 않은 강아지의 머리털처럼 살랑거렸다. 등 뒤로는 바닷바람이 뜨거운 햇살을 중화시키며 부드럽게 불어왔다. 그러니 아무 걱정거리도 없어야 했다. 천국의 형상을 본따 만들어진 휴양 호텔 안이었기 때문이다. 저녁에는 올드 타운에 내려가볼 예정이었다. 이틀 전 나는 다니던 대학의 자퇴 원서를 카페에서 작성하고 카페 옆의 PC방에서 인쇄했다. PC방에서는 아르바이.. Phu Quoc 20221223 비좁기로 악명 높은 비엣젯 에어를 타고 현지 시각 새벽 여섯 시, 푸쿠옥에 도착했다. 잠을 거의 못 잔 상태로 몹시 피곤했지만 날씨가 따뜻한 곳에 오니 신이 났다. 호텔 체크인까지 시간이 떠 얼리 모닝 투어를 다녀왔다. 가장 먼저 역시나 베트남 쌀국수를 먹었고—언니와 엄마는 고수풀을 넣어 먹었지만, 나는 예전에 두드러기가 난 적이 있어 참았다—도시의 경치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연유 넣은 베트남 식 커피를 마셨다. 바다를 구매한다는 개념이 알쏭달쏭했지만 해변가를 따라 리조트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호곡사’라는 절에 가기 위해 다시 차에 올라탔다. 차창 밖으로 호텔들이 한가득 보였다. 재미있는 것은 아직 개발중인 도시인지라 쓰레기가 날아다니는 허허벌판 바로 옆이 번지르르하다는 점이다. 허허.. 이전 1 2 다음 목록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