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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란, <크리스마스 캐럴> 하성란, ⟪크리스마스 캐럴⟫, 현대문학, 2019. 단숨에, 하루만에 읽어내렸다. 흡입력이 좋은 소설이다. 거의 문 닫은 것이나 다름 없는, 버섯 모양 지붕이 있는 리조트에 혼자 묵게 되는 여자가 낯선 곳에서 느끼는 모호한 공포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공간을 활용하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최은미 작가의 ⟪운내⟫가 떠오르기도 했다. 나도 언젠가 이런 헤테로토피아를 만들어볼 수 있을까. (단, 1부와 2부 사이의 단절은 조금 아쉬웠다. 그 자체로 완결성이 있는 2부와 달리, 1부는 2부의 도입을 위해 억지로 만들어진 느낌이다. 2부만 따로 중편소설화되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라파와 줄리(2022.12) 배수아,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테오리아, 2022. 짧은 소설로 감상을 갈음한다. 라파와 줄리 라파는 빈에 사는 스무 살의 소년으로, 키가 훤칠하고 몸은 아주 깡말랐다. 그는 레몬색 반팔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거리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여 버는 돈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관광객들이 빈에 대해 품어주는 환상의 덕에 그의 벌이는 불안정할 뿐 아주 나쁘지는 않은 편이다. 그의 특기는 아마추어답지 않게 깔끔한 더블스톱으로, 그가 두 현을 동시에 켜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지갑에서 하나둘씩 동전을 꺼내보인다. 동전이 짤랑거리는 소리는 라파에게 반가운 반주이다. 라파의 버스킹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12시까지, 오후에는 15시부터 17시까지 도시의 가장 더운 시간을 피해 진행된다. 12시부터 15시 사이에 라파..
20221204 그간의 사진들 뗀뚜댕이 J씨께서 생일선물로 플라톤의 ⟪뤼시스⟫를 주셨다. 언젠가 어디 동굴 같은 곳에 소울메이트와 함께 들어가 얼굴을 맞대고 플라톤의 대화편을 정독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철학을 좋아하면서 플라톤과 마음이 맞지 않기는 어려울 테니까. (그렇지만 외로운 건 또 싫으니까, 꼭 소울메이트와 함께.) 엄마와 매주 화요일 필라테스를 다닌다. 아침에 일어날 때는 정말 지옥 같지만 막상 하고 나오면 더없이 뿌듯하다. 필라테스라도 하지 않으면 내 몸은 석고상처럼 단단히 굳어 책장조차 넘기지 못할 것이다. 꾸역꾸역, 정말이지 꾸역꾸역 프루스트를 읽고 있다. 비유가 복잡하고 악명 높은 만연체인지라 정보를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때가 많다. 하지만 가끔씩 정말 보석 같은 표현들을 만날 때마다 아, 이런 게 대작가의 글..
박상영, <믿음에 대하여> 박상영, ⟪믿음에 대하여⟫, 문학동네, 2022. 네 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연작소설이다. 이 책의 미덕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얄미운 상사 배서정부터 시작해서 '요즘 애들'마저 곤란하게 만드는 진짜 '요즘 애'인 윤나영, 방송 일을 시작하게 된 후로 자신의 이미지에 몹시 신경을 쓰게 된 김남준, 사랑에 적극적인 유한영, 광신자인 어머니께 시달리는 임철우까지 모든 인물이 세세하게 구분이 되고 성격이 콕 짚어진다. 둘째, 취재가 바탕이 되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으리라 생각될 정도로 현실적이다. 비록 나 자신이 회사에 다니고 있지 않아 정서적인 공감이 가지는 않았지만 사회생활의 고충, 특히 코로나 시대에 회사를 다닌다는 것의 의미가 확 와닿았다. 먼 훗날 누군가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게르망트 쪽 1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정미경, <프랑스식 세탁소> 정미경, ⟪프랑스식 세탁소⟫, 창비, 2013. 수많은 삶들—출판사 편집장의 삶, 도박 중독자의 삶, 탈북민의 삶, 기자의 삶, 치매 걸린 어머니의 삶, 요리사의 삶—을 탐사하다가 완결 짓기보다는 눈길을 거둔다. 그리고는 장악이 아닌 응시가 서사를 만든다는 것을 증거한다. 소설가가 된다는 것은 백 명의 삶을 들여다 보는 백 개의 눈을 가지는 일일까. 3인칭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다가도, 무척 어렵겠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가장 재미있었던 소설은 아무래도 반전이 있는 이었다. 서사를 무척 긴장감 있게 이끌어갔다. 그러나 마음에 깊이 남는 소설은 다. 두 인물이 애인관계로 진전되지 않고 서로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친구관계로, 청자와 화자 관계로 남아서 다행이었다.
조지 버클리, <인간 이해력의 원리들에 대한 논고> 일부 요약 George Berkeley, ed. by Michael R. Ayers, Philosophical Works Including the Works on Vision, David Campbell Publishers, 1975, 모든 강조는 필자의 것. 인간 이해력의 원리들에 대한 논고: 과학의 오류와 어려움의 주된 원인들이 회의주의, 무신론, 비종교의 근거들과 함께 탐문된다. Introduction §1,2 상식과 본능을 따르는 일반 사람들과 달리, 철학자들은 사변 끝에 여러 역설과 부조리에 맞닥뜨리며 회의주의자가 되곤 한다. 그 이유로는 인간 정신의 유한성이 대두된다. 유한한 정신이 무한과 관련된 것을 탐구할 때에는 모순에 부딪힌다. §3 그러나 오류와 회의주의의 진정한 원인은 인간 정신의 유한성이 아니..
조지 버클리, <하일라스와 필로누스 사이의 세 대화> 일부 요약 George Berkeley, ed. by Michael R. Ayers, Philosophical Works Including the Works on Vision, David Campbell Publishers, 1975. 하일라스와 필로누스 사이의 세 대화 첫 번째 대화 두 사람이 회의주의와 장대한 사변 모두의 해로움에 동의한다. 필로누스는 물질적 실체(material substance) 또는 물질(matter)이 현존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이 주장에는 회의주의도 비상식적 부조리도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물질의 현존을 믿는 철학자들이 모순과 비상식*, 역설에 맞닥뜨린다. *Q. 필로누스는 상식의 개념을 자기 멋대로 취하는 것이 아닌가? 상식 자체는 서로 모순된 것들로 구성될 수 있다(우리는 우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