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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김화영 옮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문학동네, 2019. 기억상실증에 걸린 기 롤랑이 전화번호부와 사교계 카드들, 빛 바랜 사진, 어느새 노인이 된 사람들의 안개 같은 기억 속에 웅숭그리고 있는 자신의 과거를 찾아나선다.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는, 나는 누구였느냐는 물음을 타인들에게 물어가며 오직 행운에 의지해 파리 곳곳을 뒤지는 그는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자신이 다녔(다고 들었)던 학교가 문을 닫았음에 실망하고, 끝끝내 애인 드니즈의 행방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기억의 파편들을 하나둘씩 손에 쥐게 되면서 자신의 이름과 친구들의 이름, 무엇보다 오래된 감정과 재회한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삶의 덧없음과 성스러움, 둘 모두에 대한 충전한 인식이라는 모순 위에서..
배수아,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배수아,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문학동네, 2021(고려원, 1995의 재출간). "대신에 "난 외로워서 상처를 입었거든" 이렇게 언젠가 말하였다. "나는 애정 속에서 질식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어.""('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49) 배수아의 문학세계가 어떤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잉태되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단편집이다. 등단작인 '1988년의 어두운 방'이 실려있다. 작가의 시선은 일관적으로 도시의 여자들에게 향하며, 그들에 대해 일종의 유형학을 수행한다. 도시의 여자들은 결혼을 했거나, 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로 나뉜다. 결혼을 한 여자들은 백이면 백, 생명력을 잃는다. "여전히 이태리제 청바지 광고 모델처럼 생기발랄하고 만족하는 듯한 미소를 하고 있어도 옛날의 오래된 사진관에서 빛나는..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김남주 옮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2008 "'오늘 6시에 플레옐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시몽에게서 온 편지였다.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구절이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그것은 열일곱 살 무렵 남자아이들에게서 받곤 했던 그런 종류의 질문이었다. 분명 그 후에도 그런 질문을 받았겠지만 대답 같은 걸 한 적은 없었다. 이런 상황, 삶의 이런 단계에서 누가 대답을 기대하겠는가?"(59) 서른 아홉 살의 폴은 외롭고, 로제는 작고 남성적인 자유에 취해 폴을 봐주지 않으며, 스물 다섯 살의 시몽은 연민과 욕망에 휩싸여 폴과 사랑에 빠진다. 그런 시몽은 잘생겼고, 맹목적일 정도로 순진무구하며, 결..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 르네 데카르트, 이현복 옮김, ⟪방법서설, 정신지도규칙⟫, 문예출판사, 2019 "나는 결코 내 정신에서 나온 것들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211) "그러나 나는 특별한 것을 약속하려 할 만큼 주제넘지도, 대중이 내 계획들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상상할 만큼 헛된 생각에 전혀 빠져 있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내게 걸맞지 않다고 생각될 수 있는 어떤 호의를 누군가로부터 받길 원할 만큼 저급한 영혼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224) "이것으로 나는 여기서 하나의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며, 나는 이 선언이 나를 세상에서 주요 인물로 만드는 데 쓰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고, 나 또한 그러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리고 지상에서 가장 명예로운 일자리를 나에게 제공하는 자들보다 그들의 호..
20211208 Kamera 저번 주 토요일에 S가 자신의 카메라를 만질 수 있게 해줬다. 12월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1시간. 사진을 찍는데 뒤편의 바 자리에서 문청으로 보이는 어느 여자가 소설을 필사하고 있었다. 그녀가 가진 시간을 욕망했다.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서론, 1장, 2장 번역 Walter Benjamin(1936),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 Suhrkamp, 2010. (모든 이탤릭처리는 벤야민이 의도한 것이며, 볼드처리는 필자가 한 것이다.) 발터 벤야민, ⟪그것이 기술적으로 복제 가능해진 시대의 예술작품(1936)⟫ Als Marx die Analyse der kapitalistischen Produktionsweise unternahm, war diese Produktionsweise in den Anfängen. Marx richtete seine Untersuchungen so ein, daß sie prognostischen Wert bekamen. Er ging auf d..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김이섭 옮김, ⟪수레바퀴 아래서⟫, 민음사, 2001 "학교 선생은 자기가 맡은 반에 한 명의 천재보다는 차라리 여러 명의 멍청이들이 들어오기를 바라게 마련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선생에게 주어진 과제는 무절제한 인간이 아닌, 라틴어나 산수에 뛰어나고, 성실하며 정직한 인간을 키워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더 상대방 때문에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게 되는가! 선생이 학생 때문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학생이 선생 때문인가! 그리고 누가 더 상대방을 억누르고, 괴롭히는가! 또한 누가 상대방의 인생과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더럽히는가!"(142, 강조는 필자) 마을의 수재였던 소년이 모두의 기대를 받으며 엘리트 신학도로서의 길에 오르지만, 신경이 쇠약해진 채로..
풀꽃과 장미의 수난(2021.12) 전문은 https://knower2020.com/forum/view/595615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올 포 미’의 첫날은 긴장감 넘치면서도 한산한 끝을 맞았다. 가게에는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나와 내 곁을 지키기 위해 반차까지 낸 혜연, 그리고 동네에 새로 생긴 피자집이 궁금해 걸음을 떼준 이웃들 몇 명이 전부였다. 아무리 가오픈 차원에서 단축 운영을 했다고는 하지만, 하루에 손님 네 명은 너무하다 싶었다. 혹시 이름이 피자집답지 않아서 그런가 싶기도 했다. 혜연과 꼬박 일주일을 ‘올 포 미’와 ‘미 앤 마이 피자’ 사이에서 토론한 끝에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는데...... 바닥에 떨어진 도우 부스러기를 줍고, 행주로 테이블을 닦으면서 혜연에게 역시 네 말을 들을 걸 그랬나 봐, 사람들이 여기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