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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니 에르펜베크, <모든 저녁이 저물 때> 예니 에르펜베크, 배수아 옮김, ⟪모든 저녁이 저물 때⟫, 한길사, 2018 가정법이 지배하는 소설이다. 우리가 살 수 있었던 모든 삶들, 바랄 수 있었던 모든 사랑들, 행할 수 있었던 모든 정치들을 현실세계와 가능세계의 교차를 통해 형상화한다. 문학의 형태를 입음으로써 이야기는 현실성과 가능성 사이의 위계를 해체시키고, 둘을 궁극적으로는 분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그 모든 가능한/현실적인 실존들의 끝은 공통적으로 죽음이다. 사람이 죽지 않는 가능세계는 없다. 사람이 죽지 않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가능하지 않냐고 묻는 것은 아주 우스운 일이다. 유대인 혐오, 제1차 세계대전, 볼셰비즘, 독일 통일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등장하기에 진지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이해한다. 형식적으로 아주 독특하고 미..
20220912 어떻게 지내세요 요로코롬 벚꽃이 피기 시작했을 때부터, 더위가 한 풀 꺾인 지금까지 찍은 사진들이다. 지금 내가 속해있는 연구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형용사 몇 개 속에 내 마음을 가두고 싶지는 않고, 여러 가지 신변잡기적인 사항들을 나열하면 좋을 것 같다. 눈을 감으면 사람들 하나하나의 얼굴이 또렷하게 그려지고, 저마다의 개성이 탄산 같이 터지면서 마음에 와닿는다. '실패'를 '성공'으로 바꿔 말하는 이상스러운 낙천주의자 분. 같은 닥터마틴 14홀 워커를 사서 신고 다니는, 나의 든든한 관념론 자매님. 그런가 하면 관념론자는 빌런이라고 생각하는 냉철한 분석철학도 분이 계시고. 평소엔 무심한 듯이 굴다, 아프다는 말 한 마디에 곧바로 약을 사다줬던 뽀글머리 분. 피곤하다고 얼굴을 어깨에 비비면 포..
에드문트 후설, ⟪이념들⟫ 3권 §2 육체, 육체파악 그리고 육체학 a) 번역 Edmund Husserl, Ideen zu einer reinen Phänomenologie and phänomenologischen Philosophie. Drittes Buch: Die Phänomenologie und die Fundamente der Wissenschaften. Hrsg. v. Biemel, Marly, 1952(Hua V), s. 7-9 [7] §2 육체(Leib), 육체파악(육체해석, Leibesauffassung) 그리고 육체학(Somatologie) a) 구체적인 육체규정들. 자신의 대상을 이차적인 대상으로서 구성하는 파악의 두 번째 근본종류는 육체[에 대한 ]파악이다. 육체대상성의 가장 상위의 층위, 구체적인(spezifisch) 육체층위[몸]가 육체의 사태가 물질[질료..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석영중•정지원 옮김, ⟪이반 일리치의 죽음⟫, 열린 책들, 2021. 세상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어떤 해석을 내놓고 퍼뜨리는지를 탁월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하이데거 자신이 ⟪존재와 시간⟫ 내 각주를 통해 톨스토이의 이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외면에서 기만을 발견하고, 삶 전체를 자신의 임박한 죽음에 입각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가진다. 그렇게 죽음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견해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삶 역시 기만이었음이 밝혀진다. 죽음에 대한 직면이 '좋은 삶'에 대한 진심어린 성찰을 가능케 한 것이다. 문득 나는 우리가 죽음이 아니라 늙음에 대해서도 외면하지 않는가 생각하게 되었다. 나만 해도 마치 내가 영원히 늙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면서 지내고 ..
데버라 리비, <알고 싶지 않은 것들>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데버라 리비, 이예원 옮김, ⟪알고 싶지 않은 것들⟫, 플레이타임, 2018. / 버지니아 울프, 공경희 옮김, ⟪자기만의 방⟫, 열린 책들, 2021. '작가의 탄생'을 주제로 11월까지 소설을 쓰려고 해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읽게 된 책 두 권인데, 둘 모두 여성의 글쓰기를 다룬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이 자유롭게 소설을 쓰고 시를 쓰고 예술을 향유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오기를 진지하게 바랐지만, 데버라 리비가 우리로 하여금 단지 '목소리를 크게 내도 된다'고 말해주기 위해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쓴 것을 생각해보면 울프의 바람은 반만 이루어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람들에게 그리고 가사일에 방해받는 거실이 아닌 나만의 방에서 블로그로, 화상회의로, 혼자만의 수첩..
폴 리쾨르, <해석학과 인문과학> 1부 요약 및 발췌 Paul Ricoeur, ed. & trans. by John B. Thompson, Hermeneutics and the Human Scienc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6. 해석학의 과제 해석학은 중립성의 환상을 폭로한다. ➔ The presentation which follows is therefore not neutral, in the sense of being free from presuppositions. Indeed, hermeneutics itself puts us on guard against the illusion or pretension of neutrality. (3) 해석학의 일반화는 해석학의 존재론화와 함께 간다. ➔ But this movem..
빌헬름 딜타이, <해석학의 탄생> 1부 요약 및 발췌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알라 알아스와니, <시카고> 알라 알아스와니, 김능우 옮김, ⟪시카고⟫, 을유문화사, 2014. 좋은 소설은 보편성과 특수성을 날실과 씨실처럼 교차시킨다. 숱하게 보아왔던 주제를 한 번뿐인 상황 속에 녹여내 어딘지 친숙하면서도 새롭다는 반응을 이끌어낸다. 알라 알아스와니는 ⟪야쿠비얀 빌딩⟫에 이어 ⟪시카고⟫에서도 타고난 이야기꾼으로서 활약한다. 사랑과 애국심, 여성의 억압이라는 보편적 테마가 시카고에 사는 이집트인 유학생들의 삶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 용해되어있다. 샤이마와 타리크의 연애는 강박적이며 억압적인 종교의 규율에 얽메여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따스하고, 성공한 이민자 교수인 살라흐 박사의 조국을 위한 용기와 비겁은 비난의 시선을 거두게 될 만큼 안타깝다. 남편의 이기심과 '후진국'의 조직적 부패에 희생당하는 마르와는 돈의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