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니 에르펜베크, <모든 저녁이 저물 때>
예니 에르펜베크, 배수아 옮김, ⟪모든 저녁이 저물 때⟫, 한길사, 2018 가정법이 지배하는 소설이다. 우리가 살 수 있었던 모든 삶들, 바랄 수 있었던 모든 사랑들, 행할 수 있었던 모든 정치들을 현실세계와 가능세계의 교차를 통해 형상화한다. 문학의 형태를 입음으로써 이야기는 현실성과 가능성 사이의 위계를 해체시키고, 둘을 궁극적으로는 분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그 모든 가능한/현실적인 실존들의 끝은 공통적으로 죽음이다. 사람이 죽지 않는 가능세계는 없다. 사람이 죽지 않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가능하지 않냐고 묻는 것은 아주 우스운 일이다. 유대인 혐오, 제1차 세계대전, 볼셰비즘, 독일 통일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등장하기에 진지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이해한다. 형식적으로 아주 독특하고 미..
데버라 리비, <알고 싶지 않은 것들>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데버라 리비, 이예원 옮김, ⟪알고 싶지 않은 것들⟫, 플레이타임, 2018. / 버지니아 울프, 공경희 옮김, ⟪자기만의 방⟫, 열린 책들, 2021. '작가의 탄생'을 주제로 11월까지 소설을 쓰려고 해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읽게 된 책 두 권인데, 둘 모두 여성의 글쓰기를 다룬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이 자유롭게 소설을 쓰고 시를 쓰고 예술을 향유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오기를 진지하게 바랐지만, 데버라 리비가 우리로 하여금 단지 '목소리를 크게 내도 된다'고 말해주기 위해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쓴 것을 생각해보면 울프의 바람은 반만 이루어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람들에게 그리고 가사일에 방해받는 거실이 아닌 나만의 방에서 블로그로, 화상회의로, 혼자만의 수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