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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조대 동해안으로 가는 버스에 타서 나는 띄엄띄엄 잠을 잤고,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푹 잤다. 잠깐씩 깰 때마다 눈 감은 그의 옆얼굴, 곧은 코와 살짝 튀어나온 아랫입술을 바라보다 영원을 꿈꿔버리고 말았다. 서로 나눠 끼운 이어폰을 통해서는 환상약국이란 요상한 이름의 밴드가 노래하고 있었고. 양양여객터미널의 흡연실은 서울 것에 비해 매우 깔끔했고 냄새도 별로 안 났다. 그는 터미널에서 사온 말보로 어쩌고를 피웠고 나는 보다 얇고 긴 멘솔을 피웠다. 하조대의 해변가에 나오니 구름이 많이 걷혀있었다. 해가 없어서 하늘이 가라앉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오히려 좋았다. 바닷가를 걷다 잠깐 쪼그려 앉았고 그대로 파도가 땅을 만나 잦아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꽤 거칠어보이는 파도도 막상 우리의 발 밑에 가까이 와서는 힘없이..
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 토마스 만, 홍성광 옮김, ⟪토니오 크뢰거⟫, 열린 책들, 2021. 진실하고 인간적인 감정 일체로부터 스스로가 유리되었음을 느끼고, 단지 시민 크뢰거가 되기를 꿈꾸는 시인 토니오. 시인은 이를테면 사랑 자체가 아니라 사랑에 대한 인식을 추구하느라, 단순하고 소박한 실재의 세계를 떠나 끝없는 사색에 지치게 만드는 정신의 자장 속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질서 잡힌 생활을 동경하는 예술가가 세상에 대해 쏟아내는 질투를 설득력 있게 그려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생활인들은 토니오의 삶을 동경할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고 만다. 그럼에도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꼭 읽어보고 싶게 되었다. 가장 좋았던 대목. "관능에 대한 혐오감과 증오심에 사로잡혀 순수함과 품위 있는 평화를 갈구하는 동안에도 그는 예술적인 ..
장-폴 사르트르, <상상계> 일부 요약 장-폴 사르트르, 윤정임 옮김, 사르트르의 상상계, 기파랑, 2010 Jean-Paul Sartre, The Imaginary: A phenomenological psychology of the imagination, (translated and published by) Routledge, 2010 제 I부 확실한 것 I-I. 기술 1. 방법 이미지화하는 작용에서 이미지화되는 대상이 아닌 이미지화함 자체, 곧 “대상이 주어진 방식”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반성이 요구된다(21). 이때 “반성적 의식은 전적으로 확실한 소여들을 건네준다는 것”이 데카르트 이래로 알려져있다(21).* 내가 나의 이미지화함을 반성한다면 반성의 내용, 즉 내가 이미지화하고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확실하게 알려진다. ..
본능에 관한 논문 세 편: Mensch (1997), (1998) & Bower (2014)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Nietzsche and Phenomenology: Power, Life, Subjectivity 일부 발췌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20230301 Es geht so. 1. '스킨스' 시즌 3를 이어서 보는데, 프레디와 쿡 모두 나름의 이유로 매력적이다. 쿡은 나의 이상형에 가깝고(160 후반 정도 되어보이는 키에 장난 많게 생긴 얼굴, 배드 보이, 무엇보다 퇴폐미) 프레디 역시...... 나의 이상형에 가깝잖아?(마른 팔다리, 뚜렷한 이목구비, 내려놓고 놀기를 좋아하지만, 스케이트보드 타기 같은 건전한 취미도 가짐) 그 외에도 틈틈이 문화생활을 한다. 며칠 전엔 차이밍량 감독의 '애정만세'를 보았다. 하루키의 '스푸트니크의 연인'이 많이 생각 났다. 세상은 왜 이렇게 고독한 곳인지. 인물들이 죄다 담배를 지독하게 피워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연기를 들이마시는 순간만큼은 공허가 채워지는 듯한 환상을 가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나 역시 팔할은 같은 이유로 담배를 피우는..
자넷 도노호, <후설의 윤리학과 상호주관성> 발췌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프레데릭 바이저, <독일 관념론> 피히테 장 요약 Beiser, Frederick, German Idealism, Harvard University Press, 2002, pp. 217-345 요약 (세계 가운데서 내가 수용해야 하는 것과 내가 직접 형성해내는 것 중 후자의 비율을 무한히 높이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이다.) ✸ 모든 강조는 필자의 것이다. Introduction: The interpretation of Fichte’s Idealism 피히테에 대한 주된 해석은 서로 양립 불가능한 두 갈래로 나뉜다. 한 편에서 피히테는 물 자체와 주어진 잡다(manifold)를 말소시키는, 그리하여 전체 세계를 구성하는 단 하나의 절대적 자아의 존재에 개입하는 절대적 관념론자로 이해된다. 다른 한 편에서 피히테는 주체가 이를 수 있는 지식의 한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