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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조지 버클리, <하일라스와 필로누스 사이의 세 대화> 일부 요약

George Berkeley, ed. by Michael R. Ayers, Philosophical Works Including the Works on Vision, David Campbell Publishers, 1975.

하일라스와 필로누스 사이의 세 대화

첫 번째 대화 두 사람이 회의주의와 장대한 사변 모두의 해로움에 동의한다. 필로누스는 물질적 실체(material substance) 또는 물질(matter)이 현존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이 주장에는 회의주의도 비상식적 부조리도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물질의 현존을 믿는 철학자들이 모순과 비상식*, 역설에 맞닥뜨린다.

*Q. 필로누스는 상식의 개념을 자기 멋대로 취하는 것이 아닌가? 상식 자체는 서로 모순된 것들로 구성될 수 있다(우리는 우리의 관념만을 알지만, 관념 바깥의 사물도 있다고 생각하는 등).

 만일 회의주의가 모든 것에 대한 의심을 의미한다면, 필로누스는 자신이 자신의 의견을 긍정하고, 하일라스의 의견을 부정하기 때문에 회의주의자가 아니라고 반론한다. 만일 회의주의가 "사물들의 현실과 진리를 부정하는 자" 또는 "과학의 원리와 공리들"을 부정하는 자를 의미한다면, '사물들의 현실과 진리' 및 '과학의 원리와 공리'는 물질로부터 독립적인 지성적 개념이므로 이번에도 자신은 회의주의자가 아니라고 반론한다(163). 회의주의가 "감각을 불신하고, 감각적 사물들의 실재적 현존을 부정"하는 자여도 자신은 그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필로누스가 보여주고자 한다(163). (그는 감각이 현존하는 것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믿는다. 다만 현존하는 모든 것이 관념일 뿐이다.)

 감각적 사물이란 "감각에 의해 지각되는 사물들"이다(164). 이때 감각적 사물은 감각에 의해 무매개적으로만 지각되는 사물이다. 나아가 감각의 원인 자체는 감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감각함은 추론함이 아니다. "감각에 의해 지각되는 전부인 결과와 현상으로부터 원인 또는 기회원인을 연역함은 그러므로 전적으로 이성과 결부된다[전적으로 이성의 몫이다]."(165) 무매개성에 대해 곱씹어보면, 감각적 사물로부터 "모든 감각 가능한 성질들(sensible qualities)[빛, 색, 모양, 소리, 맛, 냄새, 촉각성질]을 제거하면 감각 가능한 것이 남지 않는다"는 점이 따라나온다(165).*

*우리는 물질(=우리의 관념으로부터 독립적인 것, 감각적 성질이 아닌 것)을 감각할 수 없다.

 하일라스는 현존함과 지각됨은 상이하다고 주장하지만, 필로누스는 감각적 사물들의 경우 그들의 실재적 현존이 지각됨으로부터 구분되지(distinct from, 독립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때도 하일라스는 설령 열이라고 하더라도 열의 실재적 절대적 존재가, 그것의 기회원인으로서의 사물 속에 별도로 들어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열이 얼마나 크든, 얼마나 작든지간에 똑같다. 그런데 필로누스는 높은 정도의 열은 큰 고통과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이때 고통은 감각적 사물 안에 내재해있을 수 없다.* 감각적 사물에게는 감각이 없기(senseless)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통, 나아가 그와 동일한 높은 정도의 열은 감각적 사물 안에 내재해있는 것이 아니다.

 이에 하일라스는 고통은 열의 결과이므로 열과 구분된다고 반론한다. 이에 필로누스는 열과 고통은 "하나의 단순한 일형적 감각"으로 무매개적으로 느껴진다고, 따라서 하나의 감각이라고 반론한다(166). 높은 정도의 열을 큰 고통 없이 감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아가 "열, 냉기, 맛, 냄새 등에 대한 모든 특수한 관념으로부터 추상된 감각 가능한 고통 또는 쾌락 일반의 관념"은 생각될(be framed) 수 없다(167). 그러므로 "자연 속에 있는 그 어떤 물체(body)도 실재적으로[절대적으로] 뜨겁지 않다."(167)

 이에 하일라스는 높은 정도의 열과 그보다 낮은 수준의 열을 구분해야 한다고 반문한다. 높은 수준의 열은 특수한 고통감각과 동일하지만, 다른 수준의 열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필로누스는 정신 속에만 현존하는 정도의 열과 그렇지 않은 수준의 열을 구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반론한다. 이에 고통을 야기하지 않는 열의 경우 구별이 가능하다고 하일라스가 반론한다. 여기에 다시 필로누스는 고통을 야기하지 않는 열은 온기로서 쾌락과 동일하다고 반론한다. 다시금 쾌락은 감각적 사물이 아닌 감각하는 정신 속에만 현존하는 것이다.

 이에 하일라스는 온기가 꼭 쾌락을 주냐고 반론한다. 온기는 쾌락도 고통도 없는 이완(indolence)일 뿐이다. 이에 필로누스는 동일한 사물이 따뜻한 동시에 차가울 수는 없는데, 서로 다른 손을 서로 다른 온도의 물에 넣은 후 같은 온도의 물에 함께 담그면 두 손에 이는 온도에 대한 감각이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다. 감각적 사물인 물 자체가 따뜻한 동시에 차갑다고 말하는 것은 부조리하므로, 온기와 냉기는 정신 속에만 있는 것이다. "불 속에는 열이 없다."(169) 이는 온기, 냉기뿐만 아니라 다른 감각적 성질들(맛, 소리, 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음식은 서로 다른 맛을 내기에 상대성의 논변은 똑같이 적용되고, 소리를 운동으로 볼 경우, "진짜 소리는 절대 들리지 않는다"는 역설이 생긴다(173). 색 역시 우리의 감각 속에서만 가시적이다. 거리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고는 해도, 이 역시 실재에 대한 감각이 달라지는 경우이므로 '진짜' 색과 '현상하는' 색 사이의 차이는 없다.

Q. 불이 야기하는 고통과 뜨거운 철판이 야기하는 고통을 감각적으로 구분할 수 없을 경우, 그 둘은 동일한 것이 돼버리는 부조리가 발생한다.

A. 그 경우, 시각을 통해 구분이 가능하다.

 이에 하일라스는 1차 성질과 2차 성질 사이의 구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반문한다. 2차 성질의 경우 정신 속에만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연장, 모양, 견고함(solidity), 중력, 운동, 그리고 휴식(rest)"은 감각적 성질이되 정신 속에 없는 것이다(178). 이에 필로누스는 2차 성질에 대해 겨눠진 모든 논변이 1차 성질에 대해서도 겨눠질 수 있다고 답한다. 연장과 모양은 사람마다 다르게 지각되며, 운동의 속도, 물체가 일으키는 저항감(견고함), 연장을 전제하는 운동 등 역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1차 성질과 2차 성질의 구분은 상정할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구분이다.

 이에 하일라스는 상대적 연장과 절대적 연장을 구분하고자 하지만, 필로누스는 "현존하는 모든 것은 특수한 것"이라는 주장을 유지한다(183). 모든 감각적 양태들을 도외시한 연장의 추상관념은 누구도 생각해낼 수 없다. 2차 성질과 구분되는 1차 성질 역시 누구도 생각해낼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순수한 지성"의 도움을 받아서도 수행할 수 없는 일이다(184).

 이에 하일라스는 자신이 혹시 감각(sensation)과 대상(object)을 부적절하게 구분한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그러나 필로누스는 "무매개적으로 지각된 것"인 대상과 감각이 어떻게 구별되느냐고 반문한다(185). 하일라스는 후자는 정신의 능동적 지각작용이며, 전자는 지각작용의 수동적 대상(이자 물질)이라고 답한다. 그러나 필로누스는 대상이 보아진 것이면서 어떻게 볼 수 없는 물질이 되느냐고 반문한다. 나아가 모든 감각은 수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기에, 지각에서는 정신의 능동적 작용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Q. 185-187쪽의 논증을 내가 잘 이해한 게 맞는지 모르겠다. 하일라스의 구분 자체가 틀렸다는 논지인가? 버클리는 감각함과 감각됨을 혼동하고 있지 않은가?

 이어 하일라스는 모든 양태와 성질들의 기저에 있는 무언가를 상정하는 것이 여전히 옳아 보인다고 반문한다. 그러나 이는 기저의 기저를 계속해서 요구하는 무한퇴행을 낳는다(188). 나아가 그 기저가 그 자체로 무엇인지, 그 기저와 양태 사이의 관계가 무엇인지 역시 알려지지 못한다(189).

 이어 하일라스는 표상주의에 의거해, 무매개적으로 인식되는 대상(관념)과 그 관념을 매개로 지각되는 외부 사물들(물질)을 구분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필로누스에 따르면 (관념과 유사한) 그 외부 사물이란 감각을 통해서도, 감각에 의한 매개적 상상적 권유(suggestion)를 통해서도, 추론을 통해서도, 기억을 통해서도, 반성을 통해서도 인식될 수 없다(194-195). 나아가 표상주의는 어떻게 변동하는 관념이 고정된 외부 사물을 표상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답할 수 없다. "어떻게 감각 가능한 것이 감각 불가능한 것과 유사할 수 있는가?"(196)

cf. Winkler(1989), pp.161-174의 첫 대화 분석 읽어볼 것.


두 번째 대화 신 존재 증명(내가 통제할 수 없는 감각관념들의 지각자로서의 신), 물질에 대한 가능한 정의들과 그 모두에 대한 반박


세 번째 대화 필로누스에 따르면 실재와 감각 가능한 현상을 구분하고, 전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지지 않기 때문에 사물의 본성에 대해서 회의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은 물질적 실체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재는 현상과, 즉 내가 감각에 의해 지각하는 것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 외의 알려지지 않은 존재자들"에 대해서는 고민할 이유가 없다(219). 심지어, 지각되는 감각적 사물이 현존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순이다. 감각적 사물의 현존으로부터 그의 지각됨을 구분할 수 없다. 설령 나 자신이 당장 감각적 사물을 지각하고 있지 않을지라도, 다른 정신이 지각하고 있을 수 있다. 나 그리고 다른 유한한 정신 이전과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도처에 있는 영원한 정신"인 신이 사물세계를 지각할 것이다(220). 그리고 이 신이 우리에게 세계를 보여주는 방식이 바로 자연의 법칙이다.

 이에 하일라스는 신은 능동적인 반면 모든 관념은 수동적이므로, 우리는 신에 대해 아무런 관념도 가질 수 없다고 말한다.* 만일 그렇다면 신의 내부에 사물세계에 대한 관념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나아가 그에 대해 아무런 관념을 가질 수 없는 물질과 신이 어떻게 다른가? 이에 필로누스는 사유, 작용, 의지할 수 있는 능동적 "마음[정신], 정신, 영혼(mind, soul, spirit)"을 수동적 관념과 구분한다. 이때 나의 정신은 내게서 불완전성을 제거하고 나의 힘을 강화함으로써 신에 대한 개념(notion)추론(reasoning) 및 반성(reflexion)을 통해 획득할 수 있다. "나 자신의 정신과 나 자신의 관념들에 대해서 나는 무매개적 지식을 가진다. 그리고 이들의 도움으로, 나는 다른 정신들과 관념들의 현존의 가능성을 매개적으로 통각한다. 나아가, 나 자신의 존재로부터, 그리고 내가 나 자신 속에 그리고 나의 관념들 속에서 찾는 의존성으로부터, 나는 이성의 작용으로, 필연적으로 신의 현존을 추론"한다(221).

*Q. 정말 그러한가?

 이에 하일라스는 다시금, 정신과 관념은 서로 유사하지 않기 때문에 그에 대해 우리가 아무런 관념을 가지지 않는 정신을 상정하는 것은 물질을 반대했던 입장과 비일관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하일라스는 물질적 실체에 대해서는 우리가 개념조차 가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그 어떤 방식으로도 인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개념을 상정할 경우 모순에 이른다고 반론한다.* 

*"[that ...]any unthinking being should exist without being perceived by a mind"(234)라는 모순.

Q. 그렇다면 필로누스는 물질적 실체가 인식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이상으로 (존재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A. 그런 것 같다. 'something cannot exist without being perceived.' or 'an unperceived being is (inconceivable, thus) impossible'.

 이에 하일라스는 그렇다면 실제 사물들과 상상의 대상들을 구분할 수 없어지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이에 필로누스는 상상의 대상들은 (정신의) 의지에 의존하며, 희미하고, 서로 간의 경계가 불분명하다고 답한다. 반면 실재하는 사물들은 뚜렷하고 명백하며(vivid and clear), "우리와 다른 정신에 의해 마음에 각인됨으로써 우리의 의지에 (상상대상들이 가지는 것과) 유사한 의존성을 가지지 않는다."(225) 무엇보다 실재는 이전과 이후의 사건들과 잘 연결되는 규칙성을 가지고 있다.

 이에 하일라스는 그렇다면 물리적 원인이 존재하지 않고 "정신이 자연 속 모든 현상의 무매개적 원인"이라는 반직관적 결론이 도출되지 않느냐고 묻는다(225). 이에 필로누스는 성경의 내용을 생각하면 그 결론에는 이상할 것이 없다고 답한다. 이에 하일라스는 다시금, 그렇다면 신이 모든 죄악의 원인이 되어버리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이에 필로누스는 삼중의 대답을 내놓는다. 첫째, 물질적 실체를 믿어서 신이 물질적 실체를 통해 죄를 일으킨다고 해도 변신론의 문제는 똑같이 대두된다. 둘째, 죄는 행위 자체에 깃들어있지 않고 "이성과 종교의 법칙들로부터 의지의 탈선"에 깃들어있다(226). 따라서 신이 행위의 원인이라고 해도 죄는 (의지의 주인인) 죄인의 것이 된다. 셋째, 신이 모든 행위의 원인이라고는 말한 적이 없다. 신이 아닌 다른 합리적 존재자들(e.g. 악마)이 죄의 원흉일 수 있다.

 이에 하일라스는, 만일 관념이 모든 실재(현실)라면 어째서 우리가 물 속에서 굴절된 막대를 보듯이 오류에 처해지느냐고 묻는다. 이에 필로누스는 "그는 그가 현행적으로(actually) 지각하는 관념들과 관련해서는 틀리는 것이 없지만, 그의 현전하는 지각들로부터 그가 만드는 추론들에 있어서 틀리다"고 답한다(227-228). 코페르니쿠스적 체계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여서, 지금 내 눈에 지구가 돌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곳에서 역시 마찬가지이리라고 잘못 추론한 것이 코페르니쿠스 이전 사람들의 오류이다.

 이어 하일라스는 우리가 단지 동일한 실체를 자신은 '물질'로, 필로누스는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일 뿐이 아니냐고, 즉 여태까지의 논의는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이에 필로누스는 "연장되지 않은 능동적 존재자"를 '물질'로 부를 수는 없다고 답한다(229). 이에 하일라스는 그렇다면 그것을 꼭 '정신'이라고 부를 이유가 무엇이냐고, 이를테면 제 3의 자연일 수는 없겠냐고 묻는다. 이에 필로누스는 능동성(행위, 작용성, action)은 의지로부터 나오고, 의지는 정신에게만 있다고 답한다. 나아가 내가 아닌 다른 정신이 지각하고 있는 사물들의 존재에 대한 추론은 지성을 요구하는데, 지성 역시 정신에게만 있다.*

*Q. "archetypes"는 무엇을 의미하는가?(229)

A. 신의 관념

 이어 하일라스는 고통 역시 신의 정신 속에 있다면, 신을 고통에 취약한 수용적인 존재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이에 필로누스는 신이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며, 자연법칙에 의거해 우리만 감각을 통해 고통을 느끼도록 만들어졌을 뿐이)라고 답한다. 신은 관념을 가지고 있지만, "그의 관념들은 그에게 우리와 달리 감각을 통해 전해지지 않는다."(231) 이어 하일라스는 물질의 존재는 중력의 법칙으로써 이미 증명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이에 필로누스는 그가 물질의 존재를 이미 전제한 채로 학적인 성과를 나열하는 순환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Q. 이 부분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에 하일라스는 그렇다면 "현상들(phenomena)에 대한 가설과 해설"을 물질을 전제로 하여 수행한 모든 자연철학자들이 틀린 것이냐고 묻는다(232). 이에 필로누스는 그 현상--"나의 감각들에 의해 지각하는 현출들(apperances)"--이 곧 관념이라고 말한다(232). 그러므로 과학이란 어떻게 우리가 감각에 의해 각인되는 관념에 의해 영향을 받는지에 대한 학, 관념들 사이의 연결관계를 탐구하는 학(일 뿐)이다. 과학자는 물질이 도대체 어떻게 관념을 생산하는지 해설해주지 못한다.

 이에 하일라스는 그렇다면 신이 우리를 물질에 대해 믿게 만듦으로써 기만해온 것이냐고 묻는다. 이에 필로누스는 신은 우리에게 '물질'의 개념을 계시를 통해서도, 우리의 자연적 능력을 통해서도 전해주지 않았다고 말한다. 필로누스는 자신이 여전히 물질적 실체에 대한 믿음에 반해 "상식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한다(233). 하일라스가 사물의 현상일 뿐인 것으로 취급하는--그러므로 그는 그 자신의 감각을 불신하고 있다--관념들을 필로누스는 실재하는 사물들 자체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하일라스는 필로누스가 일반인처럼 감각을 맹신한다면서, 그렇다면 육안으로 모든 것을 볼 것이지 어째서 현미경과 같은 것이 필요하느냐고 묻는다. 이에 필로누스는 현미경으로 보아지는 대상과 육안으로 보아지는 대상은 같지 않다고 답한다. 그럼에도 그저 실용적인 편의를 위해 여러 관념들이 하나의 단어 하에 불리게 된 것이라고 말이다.*

*Q. 이 부분은 지나치게 비상식적이다.

 이어 하일라스는 필로누스가 옳을 경우, 즉 "우리는 오직 우리의 마음들 속에 현존하는 관념들만을 지각"할 경우 여러 사람이 동시에 하나의 '같은' 사물을 보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느냐고 묻는다(236). 이에 필로누스는 저 '같음'을 일반인과 철학자는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증명되지 않은 추상관념인 동일성에 대한 편견을 배제하면,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사물을 보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나아가 하일라스의 비판은, 우리가 무매개적으로 지각하는 것이 관념뿐일 경우, 물질주의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에 하일라스는 물질주의자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것을 지각할 수 있게 하는 "외적 원형(external archetype)"을 상정한다고 답한다(238). 이에 필로누스는 그 원형 역시 관념이라고 답한다. 이를테면 체리의 실재는 그에 대한 감각들과 다르지 않다.

 이어 하일라스는 연장된 사물들이 어떻게 연장되지 않은 우리의 (비좁은) 마음 속에 (충분한 공간을 차지하면서도) 들어가있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 이에 필로누스는 자신의 '들어가있다'는 말은 '지각한다'는 뜻을 가지는 데 불과하다고 말한다.*

*Q. 이 부분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어 하일라스는 필로누스의 관념론이 성경에서의 창조와 어떻게 양립 가능하냐고 묻는다. 하나님의 창조는 그렇다면 관념의 창조에 불과한가? 이에 필로누스는 자신이 말하는 관념이란 허구가 아니라 실재라고 답한다. 따라서 자신의 관념론 하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실재를 창조하신 것이다. "일반적인 대화에서, 우리의 감각들의 대상들은 관념들이 아니라 사물들이라고 불린다."(240) 하지만 이는 언어상의 차이일 뿐, 저 사물들이 (감각되는 성질들 외에) "절대적 외적 현존"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240). 하나님 자신은 모든 실재를 영원히 아시지만, 즉 그의 정신 속에서는 아무것도 생성하거나 소멸하지 않지만, 자연 법칙에 따라 유한자로 하여금은 오직 일시적으로만 사물을 지각할 수 있게 명했기에(decree) 관념론 하에서도 사물의 생성과 소멸은 설명된다. 또한 인간 외의 정신에 의한 지각 역시 존재를 가능케 하기 때문에, 인간보다 다른 존재자들이 먼저 창조되었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물질주의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들(감각적 대상들)로부터 실재를 앗아가려 한다. 모세가 말한 창조는 감각적 대상들이지, 알 수 없는 절대적 실체(물질)에 대한 것이 아니다. 정신 바깥의 그와 같은 절대적 실체는 오히려 신을 부정하거나 신 바깥의 것이 있다는 주장으로 흐른다.

 마지막으로 필로누스는 자신의 비물질주의에 개입할 경우 물리학, 윤리학, 신앙, 형이상학, 수학 등의 분야에서 생겨날 이점들에 대해 역설한 뒤, 설득된 하일라스와의 대화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