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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조지 버클리, <인간 이해력의 원리들에 대한 논고> 일부 요약

George Berkeley, ed. by Michael R. Ayers, Philosophical Works Including the Works on Vision, David Campbell Publishers, 1975, 모든 강조는 필자의 것.

인간 이해력의 원리들에 대한 논고: 과학의 오류와 어려움의 주된 원인들이 회의주의, 무신론, 비종교의 근거들과 함께 탐문된다.

Introduction

§1,2 상식과 본능을 따르는 일반 사람들과 달리, 철학자들은 사변 끝에 여러 역설과 부조리에 맞닥뜨리며 회의주의자가 되곤 한다. 그 이유로는 인간 정신의 유한성이 대두된다. 유한한 정신이 무한과 관련된 것을 탐구할 때에는 모순에 부딪힌다.

§3 그러나 오류와 회의주의의 진정한 원인은 인간 정신의 유한성이 아니라, 그것의 잘못된 사용이다. 신은 인간을 사랑하기에, 인간이 얻을 수 없는 지식에 대한 갈망을 주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일으킨 먼지 때문에 사태 자체를 보지 못하는 것이지, 사태 자체가 근본적으로 접근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4, 5 그러므로 "인간 지식의 첫 번째 원칙들"을 검토해 문제를 바로잡는 것이 철학적 난제가 "객체들[대상들]의 어둠과 복잡성 또는 이해력의 자연적 결함이 아니라 우리가 고집해온 그릇된 원리들로부터 발원한다는 것"을 밝히는 데 중요하다(75). 장대한 사변보다는 사태 자체를 직접 보는 '근시'가 철학에 더 적합할 수 있다.

§6 이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언어의 본성과 남용"과 관련된 서론이 요구된다(75). 무수한 오류와 난점의 주범은 바로 "정신에 추상적 관념들 또는 사물들의 [추상적] 개념들을 만드는(frame) 능력(power)이 있다는 의견"이다(76). 이 의견은 특히 논리학과 형이상학에서 지배적이다.

★§7, 8 "사물들의 성질들과 양태들은 결코 각각이 떨어져 자신만으로,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분리되어 현존하지 않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 합쳐져 있고 함께 있다는 것(are mixed, as it were, and blended together), [그리하여] 여럿이 같은 대상 속에 있다는 것이 모두에 의해 동의되어있다(It is agreed on all hands). 그러나 우리는 정신이 각 성질을 단일하게(singly) 고려할 수 있거나, 함께 통일되어있는(unite) 다른 성질들로부터 추상된 채로 고려할 수 있다고 듣는다. 그리고 정신이 스스로 추상적인 관념들을 만듦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듣는다."(76) 이를테면 우리가 연장과 색깔, 운동을 따로 고려할 수 있다는 식이다. "색깔 또는 운동이 연장 없이 현존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신이 추상을 통해(by abstraction) 연장이 없는 색깔의 관념, 색깔과 연장 모두가 없는 운동의 관념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76) 이 의견에 따르면 상이한 특수한 연장들 가운데서 모두의 공통점(what is common to all)만을, 모두가 닮아있는 지점만을 떼어내 선도, 표면도, 견고함도, 모양도 크기도 없는 연장의 관념, 하얗지도 파랗지도 않은 색을 만들 수 있다. 이 공통점은 [다시금] 모든 감각 가능한 특수자들에 상응한다.

§9 동일한 정신적 능력이 "보다 복합적인(compounded) 사물들"에 대해서도 추상적 관념을 형성하는 데 사용된다. 모든 특수성을 제거한 '인간'의 관념을 형성하는 것이 그 예이다. 이 사람은 키를 가지고 있지만, 큰 키도 작은 키도 가지고 있지 않다.

§10 그러나 우리는 특수자에 대한 상상력과 표상력을 가지고 있을 뿐, 그리고 서로 분리되어 현존할 수 있는 특수자를 결합시키고 분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손, 눈, 코를 몸의 다른 부분으로부터 추상시켜서 또는 분리시켜서 각각을 그 자체로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손 또는 눈을 상상하든, 그것은 어떤 특수한 모양과 색깔을 가져야 한다. [...] 나는 생각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위에서 기술된 추상적 관념을 생각해낼(conceive) 수 없다."(78) 서로 분리되어 현존하는 것이 불가능한 성질들은 정신적으로도 분리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특수자들로부터 추상하여 일반적인 개념을" 만드는 것에도 정신은 무능하다(78).* 추상관념을 만들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철학자들뿐이다.

*두 추상은 서로 다른 유형의 추상이다.

§11 로크는 (언어와 기호를 사용하면서)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일반관념을 형성하는 능력이 인간과 짐승을 비로소 구분해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언어나 일반적인 기호를 사용한다고 해서 "인간이 [...] 그들의 관념을 추상하거나 일반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79). 언어에 상응하는 것은 로크의 생각에서처럼 일반관념이 아니라 "여러 특수한 관념들 중 단어가 정신에 무차별적으로 권유하는 하나"이다(79). 그러므로 '연장을 가진 것은 모두 분할 가능하다'는 문장은 연장의 추상관념에 대한 문장이 아니며, 단지 "어떤 운동을 내가 고려하든, 그것이 빠르든 느리든 [...] 어떤 대상 속에 있든, 그와 관련된 공리가 똑같이 참"이라는 뜻이다(79-80).

§12, 13, 14 그렇다고 해서 '일반적인 관념'이 없다는 주장은 아니다. "그 자체로[혼자서] 고려될 때에는 특수한 관념이 일반적이 되는 것은 그것이 같은 종류의(of the same sort*) 다른 모든 특수한 관념들을 표상하거나(represent) 대표하도록(stand for) 만들어졌을 때이다."(80) 그러므로 일반성은 그것이 무차별적으로 가리키는(denote) 여러 특수자들로부터 비롯하는 것이다.** 로크 자신도 추상관념을 생각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관해 인정한다. 그토록 어려운 것이 너무나 쉬운 언어적 소통에서 활용됨이 필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조리하다. 그 어려움 때문에 추상관념에 대한 "항상적이고 익숙한 사용"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Q. 공통점을 추출함 없이 이 말을 할 수 있는가? 버클리는 '공통성' 대신 '무차별적 적용성'을 논하지만, 둘이 얼마나 다른지 모르겠다.

**Pappas(2000)는 이 보편성이 본성이 아니라 기능상 보편적인 것이라고 해설한다(p. 71).

§15 소통뿐만 아니라 지식의 확장(enlargement)을 위해서도 추상관념은 불필요하다. "모든 지식과 증명이 보편적 개념들에 대한 것"이라는 데는 동의하지만, 보편개념이 추상화를 통해 형성될 필요는 없다. 보편성이란 "그에 의해 표상된 또는 가리켜진(signified) 특수자들과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82).*

*Q. "But only that the particular triangle I consider, whether of this or that sort it matters not, doth equally stand for and represent all rectilinear triangles whatsoever, and is in that sense universal."(82)은 '구체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이다'라는 모순된 문장을 승인하는 것이 아닌가?

A. Pappas(2000)의 보편성 해석을 수용한다면, 그 구체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으로 '기능하는' 셈이다.

§16, 17 어떤 문장이 모든 특수한 삼각형에 대해 옳기 위해서는/옳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이 삼각형에 대한 추상관념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의문스럽다. 삼각형과 관련된 증명에서, 그와 관련해 증명이 이루어지는 그 삼각형은 구체적, 특수한 삼각형(들)이지, 삼각형 일반이 아니다. 증명에 사용되는 요소들이 해당 구체성에 의존하지 않으므로, 구체적인 삼각형에서 발견된 사실이 모든 삼각형에 (무차별하게) 적용될 수 있어질 뿐이다. 추상관념은 정신에게 아주 명백한 것들에 대해서조차 종결되지 않는 논란만 낳을 뿐 아무 유용성이 없다.

§18 추상관념의 원천(source)은 이성과 언어인 것 같다. 로크는 언어가 없었더라면 추상에 대한 사유도 없었으리라고 인정한다. 언어는 어떻게 추상관념의 개념으로 이어지는가? 첫째, "모든 이름은 단 하나의 정확하고 고정된 의미(signification)을 가지거나 가져야 한다고 생각된다."(84)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추상적이고 확정된(determinate) 관념들이 있어  그것이 각 일반적 이름을 위해 참되고 유일한 무매개적 의미를 구성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84). "그러나 사실 그 어떤 일반적인 이름에도 그에 결부된(annex) 하나의 정확하고 확정적인 의미는 없으며, 그것들[일반적 이름들]은 모두 대단한 수의 특수한 관념들을 무차별적으로 의미화한다."(84) 이에 혹자는 모든 이름에는 정의(definition)가 있으므로, 그것은 하나의 특정한 의미만을 가지는 게 맞다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테면 삼각형의 정의에서 정의되는 것에는 다양성(variety)이 있으며, "삼각형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한계 짓는 하나의 고정된 관념은 없다."(85)

§19, 20 둘째, 언어의 목적은 관념의 소통에 있으며, "모든 의미있는(significant) 이름은 관념을 대표한다(stand for an idea)"는 것이 받아들여져있다(85). 그런데 의미있는 이름인데도 "항상 우리의 특수하고 생각 가능한 관념들만 가리키지(mark) 않"는 이름이 있다는 것이 확실하므로, 그것들은 "추상적인 개념들을 대표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퍼져있다(85). 그러나 각 단어를 말할 때마다 그것과 상응하는 특수자를 떠올릴 필요는 없으며, 소통이 언어의 유일한 목적인 것도 아니다. 언어는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행위를 격려하거나 저지하는 데도 사용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좋은 것에 대한 약속에 의해,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념 없이도 영향 받지 않겠는가?"(86)*

*상응하는 관념을 떠올림 없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언어는 특수자를 대표한다.)

§21, 22 그러므로 버클리는 자신이 (관념과 곧잘 결합되는) 언어에 대한 생각을 제쳐두고 관념들을 "날 것 그대로(bare and naked)" 생각하겠다고 약속한다. 그 경우 오류는 피해질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기만당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내가 나 자신의 관념들이 비슷한지 또는 비슷하지 않은지에 대해 [... 내리게 되는 판단]이 참이 아니라고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It is not possible for me to imagine, that any of my own ideas are like or unlike, that are not truly so)"하기 때문이다(87). "내 관념들 사이에 합치(agreement)가 있는지 없는지 분별하는 것, 어떤 관념들이 복합적 관념에 포함되어있고 포함되어있지 않은지 보는 것"에는 "나의 이해력 속에 무엇이 지나쳐가는지에 대한 주의깊은(attentive) 지각"만이 요구되기 때문이다(87).*

*Q. 내성에 대한 너무 강력한 확신이 아닌가? cf. "[...] I do not see how he can be led into an error by considering his own naked, undisguised ideas."(88, §25)

§23, 24, 25 물론 언어의 모든 기만으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단어들의 유일한 무매개적 사용은 관념들을 의미화하는 것[뿐]이며, 모든 일반적 이름의 무매개적 의미가 확정된(규정적인, determinate), 추상적 관념"이라고 생각할 경우에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만일 자신이 오직 특수한 관념들만을 가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오류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본문

§3 사유(thought), 정념(passion), 관념(idea), 감각(sensation)은 정신(mind) 없이는 현존할(exist) 수 없다. 현존한다는 것은 지각된다는 것이다. "그것들[unthinking things]의 존재는 지각됨이다[Their esse is percipi]. 그것들을 지각하는 정신들 또는 사유하는 사물들 바깥에 그것이 어떤 현존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90)

§4 사람들은 "감각적 대상들이 이해력에 의해 지각됨으로부터 독립적인[distinct] 자연적이거나 실재적인 현존을 가진다"고 생각한다(90). 그러나 이 생각은 모순이다. 감각적 대상들은 우리가 감각을 통해 지각하는 사물들인데,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감각과 관념만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지각되지 않고 현존하는 것은 없다. ★지각되지 않은 현존은 (경험적으로 없을 뿐만 아니라) 모순이다.

§5 위의 생각은 "추상적 관념들의 교설"에 '의존'한다(90).* 이 교설은 감각적 대상의 현존으로부터 그것의 지각됨[being perceived]을 구별해낸다. 그러나 사실은 감각, 개념(notion), 관념일 뿐인 "빛과 색, 열과 냉기, 연장과 모양들, 한 마디로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들"로부터 그것들의 지각됨을 구별해내는 일은 불가능하다(90). 물론 나는 장미로부터 장미의 향기를 '추상해' 그것만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여전히 지각의 영역[내 관념의 영역] 내에서 이루어지는 상상이다. "내가 나의 생각들[thoughts] 속에서 그에 대한 감각 또는 지각으로부터 독립적인 그 어떤 감각적 사물 또는 대상을 사고하는[conceive] 것은 불가능하다."(91)

*Rickless(2012): 추상적 관념의 교설 비판이 관념론의 근거인 것이 아니라(유명론/순환논증에 빠짐), 관념론의 결과로 추상적 관념의 교설이 널리 퍼지는 것이다. 관념론 자신은 지각과 존재를 구분할 수 없는 정신의 직접적인 무능함에 의해 정당화된다. ➔ Q. 그 무능 자체가 추상적 관념 교설을 비판해주는 것이 아닌가? Rickless(2012) 자신은 순환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추상적 관념의 교설 비판과 관념론은 순환적 정당화보다는 상호정합적인 관계인 것이 아닐까?

**Rickless(2012)는 이 문제에 이미 대응을 하고 있다. 그 무능이 (1)추상적 관념 교설 비판과 (2)관념론으로 공통적으로 이어지는 것이지, (1)이 (2)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p. 731).

§22 반성의 능력을 갖춘 모두에게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입증된다(demonstrate). 1차 성질이든, 2차 성질이든, 그것들의 복합체이든 그것이 지각되지 않는 채로, 정신(과의 결부) 없이(without the mind) 현존하는 것을 상상하는(conceive) 것은 모순이다(➔the existence of anything unperceived is inconceivable). 그 어떤 "관념 또는 관념과 유사한 무엇"도 그것을 지각하는 마음 속이 아닌 곳에 현존할 수 없다(97).

§23 혹자는 아무도 그 안을 들여다보고 있지 않는 장롱 속에 책이 놓여있을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장롱 속 책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는 것이며, 적어도 관념을 형성한 자에게 그 책은 지각된다. "상상되지 않거나 생각되지 않은 채로 그것들이 현존하는 것을 상상한다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다."(97) 자신의 관념에 대해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물질적 실체는 현존하지 않는다는 것이 명확하다(➔inconceivability entails impossibility).

§48 감각의 모든 대상은 관념이며, 관념은 지각되지 않은 채로 현존할 수 없다. 내가 지각하고 있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도 다른 정신(spirit)이 그것을 지각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물체들[bodies]이 매 순간 소멸했다가 창조된다거나,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없는] 사이에 아예 현존하지 않는다"는 것이 (관념론으로부터) 따라나오지 않는다(107).

§97 형이상학적 추상화는 시간, 공간, 운동과 같이 일상에서는 특수한 실천 및 관념들과 관련하여 너무나 쉽게 이해되는 것들도 난해한 철학적인 문제로 만들어버린다.

§99 그 어떤 연장이나 운동도 감각적 성질들로부터 추상될 수 없으며, 지각됨으로부터도 추상될 수 없다.*

*Q. "archetype"로서 버클리는 무엇을 지칭하는가?

§100 구체적인, 특수한 행복이나 선을 떼내고 행복 자체, 선 자체를 탐구하려고 하면 너무 난해해진다. 정의나 덕의 관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추상의 교설은 유용한 지식들을 오염시켰다.

§121 추상적인 수학에 골몰하는 일은 무용하다. 수는 언어처럼 구체적인 상황에서 선 등을 대리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그런 구체자로 이해되어야 한]다.

§122 "산수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사물들(things)이 아니라 기호들(signs)과 관계맺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호들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사물들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그리고 어떻게 사물들을 올바르게 사용할지를 감독해주기(direct) 때문이다."(138) 이는 언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이 기호들이 특수한 사물이 아닌 추상적 관념을 대리한다고 이해될 때 발생한다. 그러므로 추상적인 수에 대한 학으로서의 수학에 골몰하는 것은 "원래의 의도 또는 진정한 사용 그리고 언어의 공헌(subserviency)을 무시"하는 행위이다(139).

§123 수만이 아니라 기하학의 대상인 연장도 마찬가지다. '유한한 연장의 무한한 분할가능성'은 수학과 기하학의 의심되지 않는 전제이지만, 상식에 반하며 수학을 난해하게 만드는 수많은 역설을 낳는다. 그 어떤 연장도 무한한 부분들을 가지지 않는다.

§124 특수한 연장 역시 "정신 속에만 존재하는 관념"이기 때문에, 그것이 무한하게 분할 가능하다면 각 부분이 모두 분간되어 지각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139).* 그러나 이는 불가능하므로 해당 전제는 그릇됐다. 유한한 관념이 아닌 유한한 연장의 개념은 불분명하다.

*Q. 버클리는 내성의 신화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관념을 투명하게 이해하고 있는가?

§125 추상적인 일반 관념의 교설에 개입하는 사람이라면 연장을 추상화시켜 무한하게 분할 가능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감각 대상이 정신과 무관하게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기하학자들이 이를 믿어도 이는 (구체적으로 생각했을 때) 모두 오류이다.

§136 정신의 모든 수용능력은 그것이 실체에 대한 것이라 하더라도 감각적 관념에 대한 감각함이다. (한편?) 정신(spirit)의 관념을 상상할 수 없다고 해서 우리의 능력에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모순을 상상할 수 없는 것과 이치가 같기 때문이다.

§143 추상적 관념에 대한 교설은 정신적 사물에도 영향을 미쳐, 정신의 힘과 작용들이 (특수한) 정신 바깥에서 생각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이는 형이상학과 윤리학에 논쟁을 낳는 애매한 개념들을 불러들이게 되었다.

cf. De Motu(Of Motion) §4 우리는 이성으로써 감각경험의 원인 또는 원리로서 중력을 추론해낸다. "그러나 무게를 가진 물체들의 낙하의 원인은 보이지 않고 알려지지 않으므로, 그렇게 사용되는 [']중력[']은 감각적 성질이라고 적절하게 양식화될 수 없다. 이것은, 그러므로, 불가해한(occult) 성질이다."(256) 불가해한 성질이 아닌 감각할 수 있는 결과들에 집중해야 한다. 추상적인 용어들을 과학에 사용해선 안 되고, 정신은 특수한 것과 구체적인 것, 즉 사물들 자체를 겨눠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력'의 개념은 유용하다(⟪알키프론⟫). 따라서 버클리는 과학에 대해 도구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cf2. Philosophical Commentaries 293a 지각하는 정신은 지각되지 않아도 현존한다. "그러나 이 현존은 현실화되어있지 않다."(338) / 408 존재에 대한 통속적인 이해는 지각함 및 지각됨과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