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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라파와 줄리(2022.12)

배수아,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테오리아, 2022.

너무나 예쁜 책

 짧은 소설로 감상을 갈음한다.


라파와 줄리

 라파는 빈에 사는 스무 살의 소년으로, 키가 훤칠하고 몸은 아주 깡말랐다. 그는 레몬색 반팔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거리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여 버는 돈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관광객들이 빈에 대해 품어주는 환상의 덕에 그의 벌이는 불안정할 뿐 아주 나쁘지는 않은 편이다. 그의 특기는 아마추어답지 않게 깔끔한 더블스톱으로, 그가 두 현을 동시에 켜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지갑에서 하나둘씩 동전을 꺼내보인다. 동전이 짤랑거리는 소리는 라파에게 반가운 반주이다. 라파의 버스킹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12시까지, 오후에는 15시부터 17시까지 도시의 가장 더운 시간을 피해 진행된다. 12시부터 15시 사이에 라파는 카페 디글라스에서 점심을 먹고 휴식을 취한다. 그의 휴식은 주로 그에게 낯선 나라인 한국의 소설을 읽는 일로 이루어진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한국소설란을 발견한 후로 생겨난 작고 고유한 취미이다.

 줄리는 카페 디글라스의 웨이트리스로, 키가 훤칠하고 몸은 아주 깡말랐다. 그녀의 본명, 아니 첫 번째 이름은 '김주리'로,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에 오스트리아로 이사를 왔다. 집에서는 부모님 때문에 한국말을 쓰지만, 친구들과 대화할 때 그리고 바깥에서는 오스트리아식 독일어를 구사한다. 그것도 아주 유창하게. 관사나 어미 변화 같은 것에 겁을 집어먹었던 시기는 지난 지 오래이다. 거울을 볼 때, 아니면 타인의 은근하게 배타적인 시선을 받을 때를 제하면 자신의 인종이나 국적에 대해 그다지 의식하지 않는다. 그런 줄리는 오후 12시 10분 경에 라파의 주문을 받는다. 라파는 샌드위치와 커피를 시키자마자 가방에서 소설책을 꺼낸다. 샌드위치와 커피를 가져온 줄리는 라파가 자신의 모국어로 된 소설을 읽는 모습을 본다. 그것은 줄리에게 어느 샌가부터 낯설어진 언어이다. 줄리는 라파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뿐이다.

 어느 날 라파는 바이올린을 연습할 곳을 찾아 헤매다 어느 공터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줄리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줄리는 담배를 피우고, 라파는 바이올린을 켠다. 라파가 첫 번째 더블스톱을 시도한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라파는 줄리를, 줄리는 라파를 알아본다. '카페 디글라스의 동양인 종업원이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다니는, 내 모국어로 된 소설의 독자이다.' 줄리는 당장의 순간이 라파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이리라는 것을 예감한다. 그녀의 예감은 우연히 들어맞았는데, 라파는 버스킹을 그만두고 음대에 진학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파는 브람스의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을 제대로 연주해보고 싶다는 꿈을 버리지 못했다. 줄리는 담뱃불을 비벼 끄고, 손을 한 번 턴 뒤 라파에게 다가간다. 라파도 줄리를 바라보면서 현란했던 연주를 그만둔다.

 회색 공터에는 두 사람뿐이다. 원래는 스케이트보드를 연습하는 청소년 무리가 장악하는 곳이지만, 오늘만큼은 라파와 줄리 둘뿐이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질 대로 좁혀졌을 즈음, 줄리가 입술을 떼려고 한다. 안녕. 그 말을 독일어로 해야 할까, 한국어로 해야 할까. 줄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한다. 그때 두 사람 사이로 검정색 덩굴식물이 자라난다. 덩굴식물은 두 사람의 훤칠한 키를 훨씬 넘어서서 자라나 하나의 견고한 벽을 형성한다. 높이 솟아 하나의 견고한 벽을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옆으로도 구불구불하게 자라나 공터 전체를 덩굴식물 미로로 만들어버린다. 방금까지만 해도 서로의 곁에 있었던 라파와 줄리는 이제 가장 멀리 떨어져있게 되었다. 줄리는 미로의 출발지점, 라파는 미로의 도착지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