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잡담이나 소회 같은 것

(36)
20230702 흔들리면서도 나아가는 사람 1. 유학을 앞두고 최후의 여유를 즐기면서 감사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감사하느냐 물으면 목록에 끝이 없을 것이다. 실컷 늦잠을 자고도 할 일에 치이지 않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왜냐하면 닥쳐있는 데드라인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매일 같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서울의 이 거리 저 거리를 놀러다닐 수 있음에 감사하다. 이렇게 놀기만 하다가 과연 타지에 나가 매일 공부만 하는 삶을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다. 타지에 나가기 전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친구들, 한편으로는 유럽에 얼른 오라고, 보고 싶다고 말해주는 S가 있음에 감사하다. 우정은 내가 이 세상에 혼자 내버려져 있지 않다고 느끼게 해주며, 나 역시 그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싶다. 사려깊은 애인과 미래를 꿈꿀 수 있음에..
20230606 나의 첫 번째 필름
20230518 글이 너무 쓰고 싶어서 또 쓰는 일기 1. 오랫동안 일기를 너무 자주 쓰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나 자신의 세부를 세상에 노출시키는 데 대한 두려움이 컸다. 왜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딱 잘라 설명하기 어려운, 비합리적인 자기혐오의 발로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요새는 글 쓰는 행위가 너무 그립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다. 본명을 걸든, 필명을 걸든, '바보바보' 같은 바보스러운 가명을 걸든 상관 없으니 뭔가를 내고 싶다. 그러려면 누군가 나의 글 그리고 글 너머의 나를 미워하면 어쩌지? 누군가 나의 글, 글 너머의 나를 미워한다면 그건 세계의 종말일 텐데, 라는 식으로 흘러가는 소위 자동적 사고의 흐름을 끊어야 한다. 나에겐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는 나의 못난 모습들을 보고 나서도. 무엇보다 문창과 나온 J씨..
20230503 근황과 즉흥적인 메모 한 편의 소설을 위한 즉흥적 메모: 로마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잠에서 깨어난다. 눈을 뜨자마자 새까만 딱따구리 한 마리가 가슴에 내려앉은 듯 찌릿한 흉통이 인다. 램프가 올려진 침대가의 테이블 위에 약 봉지가 있다. 하지만 물이 없기 때문에 부엌으로 나가야 한다. 부엌에서는 로마와 이미 8년을 만났으며 서로 사실혼 관계에 있는 애인 하명이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고 있다. 로마는 물 대신 하명의 커피로 약을 집어삼킨다. 뭐 읽어? 하고 물으니 하명이 프루스트의 소설책을 내민다. 로마는 프루스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시선이 언제나 지나치게 예민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명에게 굳이 이야기하지는 않는데,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명이 소포 하나를 가리키며 말한다. 네게 우편이 왔어. 소..
20230428 무제 울적한 밤이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추적하다 보면 내가 왜 지금 울적한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사실 둘 사이에는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을 것이다. 내가 느끼는 많은 슬픔은 선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특정한 경험에 의해 빚어졌으나, 나에게 너무나 커다란 충격을 안긴 나머지 어느 샌가부터 내가 나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가 되어버린. 모든 경험이 통과하는 필터 같은 것이 되어버린. 그래서 경험의 가능조건 따위로 굳어 하루하루 나를 거쳐가는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성립하게 된, 그런 슬픔들. 경험이 선험으로 변신해가는 나날을 보내왔기 때문에 나는 역사와 본질이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아침. 잠에서 갓 깬 채로 비몽사몽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는데, 엄마가 방 안으로 들어와 내 옆에 누..
20230301 Es geht so. 1. '스킨스' 시즌 3를 이어서 보는데, 프레디와 쿡 모두 나름의 이유로 매력적이다. 쿡은 나의 이상형에 가깝고(160 후반 정도 되어보이는 키에 장난 많게 생긴 얼굴, 배드 보이, 무엇보다 퇴폐미) 프레디 역시...... 나의 이상형에 가깝잖아?(마른 팔다리, 뚜렷한 이목구비, 내려놓고 놀기를 좋아하지만, 스케이트보드 타기 같은 건전한 취미도 가짐) 그 외에도 틈틈이 문화생활을 한다. 며칠 전엔 차이밍량 감독의 '애정만세'를 보았다. 하루키의 '스푸트니크의 연인'이 많이 생각 났다. 세상은 왜 이렇게 고독한 곳인지. 인물들이 죄다 담배를 지독하게 피워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연기를 들이마시는 순간만큼은 공허가 채워지는 듯한 환상을 가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나 역시 팔할은 같은 이유로 담배를 피우는..
20230203 하마르티아 1. 오랫동안 일기를 쓰지 못한 이유는 그간 단 하루도 온전히 혼자로 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존재와 시간⟫ 세미나가 끝나자마자 다섯 개 정도 되는 세미나를 더 꾸렸고, 거의 하루씩 걸러 매일 철학과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있다. D오빠와 본능에 대한 후설의 유고를 읽고 있고, D씨와 사르트르의 ⟪상상계⟫를, 세 명의 J씨와 ⟪고르기아스⟫를 낭독한다. 한 달에 한 번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을 낭독한다. 이제 2월에는 ⟪목소리와 현상⟫과 프레데릭 바이저의 ⟪독일 관념론⟫을 요약 발제하여 통독하는 세미나가 예정되어있다. 내가 철학에 있어서만큼은 워커홀릭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많은 일을 벌인 적은 처음이다. 얼마 전 E씨가 농담조로 '하영 씨 분석철학..
20221204 그간의 사진들 뗀뚜댕이 J씨께서 생일선물로 플라톤의 ⟪뤼시스⟫를 주셨다. 언젠가 어디 동굴 같은 곳에 소울메이트와 함께 들어가 얼굴을 맞대고 플라톤의 대화편을 정독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철학을 좋아하면서 플라톤과 마음이 맞지 않기는 어려울 테니까. (그렇지만 외로운 건 또 싫으니까, 꼭 소울메이트와 함께.) 엄마와 매주 화요일 필라테스를 다닌다. 아침에 일어날 때는 정말 지옥 같지만 막상 하고 나오면 더없이 뿌듯하다. 필라테스라도 하지 않으면 내 몸은 석고상처럼 단단히 굳어 책장조차 넘기지 못할 것이다. 꾸역꾸역, 정말이지 꾸역꾸역 프루스트를 읽고 있다. 비유가 복잡하고 악명 높은 만연체인지라 정보를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때가 많다. 하지만 가끔씩 정말 보석 같은 표현들을 만날 때마다 아, 이런 게 대작가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