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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이나 소회 같은 것

20230203 하마르티아

1. 오랫동안 일기를 쓰지 못한 이유는 그간 단 하루도 온전히 혼자로 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존재와 시간⟫ 세미나가 끝나자마자 다섯 개 정도 되는 세미나를 더 꾸렸고, 거의 하루씩 걸러 매일 철학과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있다. D오빠와 본능에 대한 후설의 유고를 읽고 있고, D씨와 사르트르의 ⟪상상계⟫를, 세 명의 J씨와 ⟪고르기아스⟫를 낭독한다. 한 달에 한 번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을 낭독한다. 이제 2월에는 ⟪목소리와 현상⟫과 프레데릭 바이저의 ⟪독일 관념론⟫을 요약 발제하여 통독하는 세미나가 예정되어있다. 내가 철학에 있어서만큼은 워커홀릭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많은 일을 벌인 적은 처음이다. 얼마 전 E씨가 농담조로 '하영 씨 분석철학 세미나는 안 하세요?'라고 물었는데, 진심을 담아 '자유의지는 좀 공부하고 싶어요...'라고 답했던 것이 떠오른다.

 왜 이렇게 바쁘게 살려고 하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이유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세미나를 여는 일만큼 공부에 동력이 되어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천성이 게으르기 때문에 일정을 잡지 않으면 삶의 엔트로피가 무한정 증가한다. 늘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다.

 둘째, 내가 많이 아끼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즐겁다. 연말이었던가 J가 불쑥 테라스에 나타나 말을 놓아도 되겠냐고 물은 직후 우후죽순으로 사람들과 반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때문일까, 하루도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식사를 함께하는 것은 기본이고 평소에도 시도 때도 없이 카톡으로 시답잖은 농담을 하고, 매일 밤 클래식 음악을 추천 받고, 매일 아침 오늘도 학교에 나오느냐는 물음을 주고받고...... 누군가 나의 현 뇌 구조를 그린다면 8할은 지금 속한 공동체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엔 mbti도 infj에서 enfj로 바뀌었다. 소중한 사람 몇몇과만 교통하던 학부생 시절을 생각하면 정말 이상한 일이다. 연애를 하고 있지 않은 탓도 큰 것 같다. 나는 연애를 시작하면 애인에게 거의 모든 에너지를 쏟는 편이다. 이를테면 오픈 릴레이션십에 거부감 같은 것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사랑이 기본적으로 폐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일주일에 서너 번 이상 만나면서 일상을 전적으로 공유하는 관계를 이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연애를 시작하기에 앞서 상대에게 나의 가족이 되어줄 마음까지 있는 것이냐고 묻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결핍감을 느끼거나 마찰에 이를 수도 있을 테니까. 여하튼 연애 상태에 놓여 있었더라면 애인에게 쏟았을 이 폭발적인 힘을 현재는 주위의 동료 분들께 나누고 있는 셈이다. 누군가는 부담을 느낄 법도 한데 그러지 않고 대부분은 사랑을 온전히 돌려주시고 계셔서 더없이 감사하다.

 셋째, 개인사적으로 생각하기에 괴로운 일들이 몇 있다. 짧은 시간 내에 계속해서 사고를 쳤고 사과하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미안한 일들이 생겼다. 맹목적인 자기혐오가 옵션이 아니라는 것은 이제 안다. 2019년에 ⟪사랑하지 못하는 자들의 사랑⟫을 쓴 게 저 메시지 하나를 전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무방하니까. 하지만 자책은 엄연히 필요한 상황이다. 동시에 나의 실수들에 대한 생각에 지나치게 골몰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속적으로 주의 전환이 필요하다. 철학에 집중함으로써 삶을 외면하고 있다고 말하니 철학과 삶이 유리되어 보여 싫지만 사실이 그렇다. 나는 최선을 다해 주석가의 길을 걷고 있는데, 주석을 다는 내용을 실제의 실존과 연결시키는 작업은 내가 하는 작업의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2. 잠재적인 유학처를 독일에서 벨기에로 돌렸다. 독일어의 벽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학원을 다니면서 '세 번째 문단에 이건 어떻게 고치죠?'라는 말조차 독일어로 못하는 나 자신을 보며 절망했다. 온갖 자격증을 따면 뭐하나 싶었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해온 영어 공부가 아깝기도 했다. 영어는 우리말처럼 구사할 수 있기 때문에 영어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에서라면 유능한 철학도로 살 자신이 있다.

 물론 독일에 가는 것이 취업에 더 유리하리란 생각은 든다. 얼마 전에는 안 그래도 여성이라는 핸디캡이 있는데 벨기에에 가서는 절대 취직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슬픈 조언을 들었다. 하지만 유학 기간동안 향유할 삶의 질은 나에게 무척 중요하다. 나는 내가 여러 의미에서 쾌락주의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행복의 총량이 어느 정도 약속되지 않는다면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지난 우울의 늪에 다시 빠질 것이다. 철없는 생각일 수 있지만 취직을 걱정하느라고 유학 시절의 행복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좋은 박사논문을 내고, 어떤 언어로든 계속해서 논문을 출간한다면 어딘가에서는 나의 진가를 알아봐주리라고 믿는다.

3. 다시 소설을 쓰고 있다. D씨와 친해지고 난 뒤로 계속해서 문학에 대한 대화를 나누게 되다 보니 나의 열정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마리라는 이름의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마루라는 이름의 소꿉친구에게 청혼을 했다가 거절을 당하는 이야기이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나 자신을 조금 더 깊게 성찰하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좀 혼자 있는 시간을 확보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그리고 세미나 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기는 하지만 연구실에 나가는 것을 자제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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