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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이나 소회 같은 것

20230518 글이 너무 쓰고 싶어서 또 쓰는 일기

학회 발표문
달링의 생일 파티


1. 오랫동안 일기를 너무 자주 쓰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나 자신의 세부를 세상에 노출시키는 데 대한 두려움이 컸다. 왜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딱 잘라 설명하기 어려운, 비합리적인 자기혐오의 발로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요새는 글 쓰는 행위가 너무 그립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다. 본명을 걸든, 필명을 걸든, '바보바보' 같은 바보스러운 가명을 걸든 상관 없으니 뭔가를 내고 싶다. 그러려면 누군가 나의 글 그리고 글 너머의 나를 미워하면 어쩌지? 누군가 나의 글, 글 너머의 나를 미워한다면 그건 세계의 종말일 텐데, 라는 식으로 흘러가는 소위 자동적 사고의 흐름을 끊어야 한다. 나에겐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는 나의 못난 모습들을 보고 나서도. 무엇보다 문창과 나온 J씨가 내 일기 재밌다고 했다고!!!

2. 학회에서 발표를 했다. 놀랍지만 소감이 별로 없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돌발적인 상황이 일어날까 봐 걱정하면서도 내심 청중과의 즉흥적인 질의응답 시간을 기대했는데, 스케줄이 너무 빡빡하게 잡혀있어 논평자 선생님께 답변을 드리자마자 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내 논지의 결함들이 드러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면 불성실한 일일 테다. 그러나 여러 모로 감사한 자리이기도 했다. 구토기마저 느껴가면서 번역한 원고를 드디어 세상에 선보일 수 있었고, 공부를 아주 많이 하지는 못했어도 2월부터 이어져온 탐구가 결실을 맺는 기분이었다. 10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발표비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10만원보다 비싼 참치회를 애인에게서 얻어먹었다, 고마워 달링.

3. 달링 얘기가 나온 김에, 애인은 장발이다. 몹시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단발에는 없는 중후한 멋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은 머리를 한 애인의 옛날 사진들을 보면, 말하기 부끄럽지만, 우툴두툴한 질감의 질투심이 솟는다. 내가 보지 못한 애인의 모습들을 바라봤을 사람이 있었으리라 생각하니 그런 것 같다. 애인의 모든 모습을 소유하고 싶다, 라고 써보고는 나답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4. 지난 2월 '마리와 마루의 미로'라는 소설의 초안을 완성했는데, 창작모임의 사람들로부터 이런저런 피드백을 받고 나서는 퇴고할 엄두가 나지 않아 오래 묵혀두었다. 피드백의 핵심은 마리는 매력적인 반면 마루는 별 것 없어 뵈는데 대체 마리가 마루를 20년동안 사랑하는 동안 마루는 마리를 거들떠도 안 보는 이유가 뭐냐는 거였다. 나는 사랑의 권역에서는 개연성을 요구해선 안 된다고, 내 글을 실컷 변호하면서 영화 '지구 최후의 밤'을 떠올렸었다. 그런데 그때,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사랑의 시작에는 개연성이 없을 수 있지만, 사랑의 유지에는 개연성이 필요하다고. 나는 한 방 얻어맞은 기분으로 고개를 숙인 채 과자나 집어먹었다. 현명한 사람들과 함께 글을 쓸 수 있어 감사했다.

5. 애인이 고향으로 내려간 틈을 타 알차게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영어 수업을 들으러 가는 엄마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수다를 떨었고, 학교에 도착해 번거로운 서류 작업을 마쳤다. 며칠동안 나를 피 말리게 했었지만 우편을 보내고 나니 참 후련해져서 영화를 한 편 보기로 했다. '밀레니엄 맘보'라는 영화를 봤는데, 술 냄새가 진동하고 담배 연기가 난무하는 청춘 드라마 같은 것이었다. 아주 좋아하는 소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즐겁게 보지는 않았다. 사소한 지점에서 별로라고 느꼈는데, 여자 주인공이 자꾸만 브래지어를 찬 채로 자고 일어나는 게 현실감이 없어 싫었다. 그렇게 살다가는 답답해서 죽습니다. 아무튼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아이돌 음악을 들으면서 운동장을 서너 바퀴 뛰었다. 땀을 뻘뻘 흘리는 채로 정문 근처의 버스에서 쏟아져나오는 예비군들과 나란히 역까지 걸었다. 이십 분 정도 걸었을까, 다이어트식을 파는 식당이 있기에 들어가서 닭가슴살 샐러드를 먹었다. 요새 살이 부쩍 찌기도 했고 건강 검진 결과상으로도 과체중이 나와서 당황해하던 차였다. 지금은 (저녁을 다이어트식으로 먹었건만) 술을 마시면서 책을 읽고 개인 작업을 할 수 있는 곳에 와서 '마리와 마루의 미로'를 조금 고친 뒤 이 일기를 쓰고 있다. 포트 와인을 딱 한 잔만 마실 생각이었는데, 날벌레를 잡다가 첫 번째 잔을 깨고 말았다. 주인 분께 죄송스럽기도 하고 조금 더 취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 두 번째 잔을 시켜 홀짝거리고 있다. 가슴이 뜨끈뜨끈하고 기분이 참 좋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마음을 기억하고 간직해뒀다가 힘겨운 순간마다 꺼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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