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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이나 소회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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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08 Kamera 저번 주 토요일에 S가 자신의 카메라를 만질 수 있게 해줬다. 12월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1시간. 사진을 찍는데 뒤편의 바 자리에서 문청으로 보이는 어느 여자가 소설을 필사하고 있었다. 그녀가 가진 시간을 욕망했다.
20210729 께스끄 라 리떼라뜌? 사회학과 학부 동기인 S와 전화로 올해의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대해 주구장창 수다를 떨었다. 개별 작품들에 대해서 감탄하거나 비판하는 이야기가 주로 오갔지만 결국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채로운 변죽을 친 것 같다. 어째서 어떤 작품으로부터는 '문학성'이 느껴지고 어떤 작품으로부터는 느껴지지 않는가? 재미있기는 한데 '좋은 문학'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 작품은 어째서 그런 성격을 가지게 되는가? 똑같은 메시지를 담아도 어째서 어떤 작품은 '좋은 문학' 같고 어떤 작품은 심지어는 '비문학적'이라고까지 느껴지는가? 잠정적인 대답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이 좋을 물음들이었기에, 우리끼리 주고받았던 답변들을 간소하게나마 정리해두고자 한다. 1. 문학을 통해 특정한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전달하는 것 ..
20210619 강릉 탐방 며칠 간 서울을 떠나있었다. 에어비앤비를 빌려 강릉 바닷가에서 재택근무를 하고 있는 언니를 찾아서. 강원도는 학부 막바지에 문예창작 동아리 친구들과 춘천에 갔던 것 이후 처음이다. 영진의 해변에 머물렀는데, 날씨가 서울보다 쌀쌀했고 바람도 대차게 불었다. 그런가 하면 해가 비칠 때만큼은 그렇게 따스할 수가 없었다. 여건이 되지 않아서 해수욕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바다는 실컷 보았다. 시간 순으로 남기고 싶은 기억들을 기록한다. 밤 열차를 탔는데, 바깥 풍경을 보려고 아무리 열심히 눈을 치떠도 이따금 새빨간 십자가 사인들만 보일 뿐이었다. 터널을 지나고 있지 않았을 때에도 세계가 어둠으로 뒤덮여서 창은 내 지루한 얼굴만을 되비쳐주었다. 섬뜩한 느낌이 들어 거울 보기를 중단하고 수업 과제를 위해 읽어야..
20210520 다채로운 5호선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나는 빠르지만 환승을 해야 하는 공항철도를 탈지, 환승이 없는 대신 느릿느릿한 5호선을 탈지 고민했고 결국 후자를 택했다. 제주도에 가져간 책을 모두 읽고 싶었는데 허연의 시집을 절반 정도 남겨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5호선 플랫폼에 도착해 노선도를 확인하자마자 내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눈대중으로만 봐도 김포공항역과 우리 집에서 그나마 가까운 역 사이에 무려 스물 네댓 번 남짓의 정차가 예정되어있었다. 그래도 시집은 다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회한을 달래야 했다. 그런데 시집을 다 읽은 것 외에도 색색의 보석 같은 체험들을 몇 개 더 통과한 것 같아, 이렇게 무언가를 끼적여본다. 첫 번째는 철저히 시각적인 체험이었다. 5호선의 상징색이 보라색인 줄은 알고 있..
20210506 기도와 작약 연구실에 앉아서 공부를 하는데 문득 너무나 갑갑하고 부자유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덧 내 머릿속은 온갖 비관적인 시나리오들과 잠재적 갈등들로 가득 차올랐다. 이유는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테라스로 나가 믿지도 않는 하나님께 꽤 오랜 시간 기도를 드렸다. 우선 저의 모든 비관을 멈춰주시고, 어떤 경로로든 내가 행복해질 수 있게 해달라고. 매 순간 최선의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시고, 어떤 불행 가운데서도 나의 버팀목이 되어줄 선함과 희망을 달라고. 이기적이고 기복적인 부탁을 드렸다. 눈을 뜨니 나뭇잎들이 단박에 내 좁은 시야를 메웠다. 벌써 단풍이 돋은 나무가 있었고, 앞으로도 청록빛을 간직할 소나무도 보였으며, 초여름을 맞이하는 푸르른 잎들이 잔잔한 바람에 흔..
20210411 호캉스 친언니와 함께 호캉스를 다녀왔다. 오랜만에 활자중독 상태로부터 벗어나 로비의 예쁜 꽃도 보고, 커피와 음식, 논알콜 칵테일을 즐기는 등 오롯이 감각적인 시간을 보냈다. 커피는 '로즈 프롬 비엔나'라는 이름의 장미 크림이 올라간 아인슈패너를, 저녁은 탕수육과 설탕 입힌 바나나가 인상 깊었던 중식 코스 요리, 밤에는 밤 맛이 나는 깔루아 밀크 비슷한 것을 마셨다. 언니와 나 모두 술을 못 마셔서 논알콜로 부탁드렸는데, 즉흥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요구를 눈앞에서 바로 들어주셔서 바텐더 님의 노련함에 감탄했다. 게다가 바쁘신 와중에 서비스로 마지막 사진에 나온 파인애플 베이스의 칵테일을 하나 더 만들어주셨다. 죄송하고 머쓱한 만큼 너무나 감사했다. 실은 너무 바빠 보이셔서, 원래 손을 저렇게나 빨리 움직여야 ..
20210410 내게 쓰는 일의 의미? 상담 선생님께서 글 쓰는 일이 두려울 때면 어째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이 나에게 소중한지 곱씹어보라고 하셨다. 그러고 보니 나는 늘 단지 본능적이고, 따라서 기계적으로 '소설이 좋아, 쓰는 게 좋아'라고만 되풀이했을 뿐, 이 기호를 정초하거나 근거 짓기 위해 고민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런 고민이 없었기 때문에 소설을 생각하면 심지가 굳어지기는커녕 비관주의가 앞서고, 열정이 차오르기보다 가슴이 아프기만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부터라도 내가 왜 쓰는지, 왜 써야만 하는지, 손목이 영구적으로 손상될 것을 걱정하고, 불특정 다수 앞에서 이름을 내거는 공인이 된다는 것을 감수하고, 무한한 독해 가능성을 품을 내 글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무감 가운데서조차 어째서 쓸 것..
20210325 가위 돌리던 아이 9시 40분 셔틀버스를 타고 학교를 나왔는데, 술집의 영업이 끝나는 시점과 겹쳐서 그런지 2호선도, 3호선도 지하철이 만원이었다. 이곳저곳을 조심스레 비집고 다니다가 운 좋게 자리를 잡았다. 가방 끈을 풀고, 어깨 위의 무게감이 갑자기 줄어든 데 안도하고 있는데 지하철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딱 들어도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자신은 신입 차장인데, 구파발행 열차를 몰 때마다 대화행 열차가 아니어서 실망하는 고객님들을 스쳐지나간다고. 그 분들을 생각하면 죄송스럽다고. 그래서 대화행 열차가 더 많이 운행될 수 있도록 자기가 힘 닿는 데까지 노력하겠다고. 그에게 직접적으로는 아무것도 해준 게 없음이 거의 분명한데도, 손님들께 늘 감사드린다고. 단어가 하나하나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강 이런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