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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이나 소회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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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5 희망 반 절망 반 프랑스어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공부해야 할 범위가 넓다 보니 어차피 모든 것을 마스터하고 시험장에 들어갈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오히려 마음이 여유롭다. 시험을 앞두고 긴장하거나 결과를 걱정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다. 잘 보면 잘 보는 대로, 못 보면 못 보는 대로 괜찮을 것 같다. 어떻게 되든 공부하는 동안 즐거웠으니 그것으로 됐다. 외국어를 공부하는 행위는 내 자의가 끼어들 수 없는, 나에게 순수하게 외부적인 권위를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머독이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확실히 철학 공부와 다르게 외국어 공부는 창의성보다는 끈기를 요구한다. 법칙이 보이지 않더라도, 예외가 난무하더라도 인내심과 호기심을 잃지 않고 문법이든 어휘든 끈덕지게 암기해내는 것이 관건이다. 처음엔 끝이 없어 보여도 외우고..
20231124 십일월 힘겨운 한 달이었다. 매일 같이 내리는 비를 보며 울적함을 넘어 우울했고, 담배를 끊었음에도 불구하고 호흡 곤란과 흉통이 느닷없이 찾아와 일상을 괴롭게 만들었다. 어느 밤에는 내게 남아있는 미래의 나날들 가운데 단 하루도 행복한 날이 없을 것만 같아 엉엉 울기도 했다. 잠을 도피처로 삼아 매일 열두 시간 이상을 잤는데, 그러다 깨어나면 반드시 두통에 시달렸다. 금요일마다 읽는 ⟪선의 군림⟫이 그래도 희망이 되어줬다. 자아의 환상과 도취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정의롭고 사랑 가득한 눈길로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네 주의를 돌려야 한다는 머독의 주장에 종종 울컥했다. 리딩 그룹 사람들과 함께하는 점심식사도 나를 불행에서 꺼내준다. 커리 한 그릇에 5유로밖에 받지 않는 태국 음식점에 항상 가는데, 사..
20231014 오밤중의 생각 오밤중의 어지러운 생각. 논문 한 편을 쓰는 데 너무 많은 품이 든다. 석사논문이나 박사논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저널 아티클에 실리는 7000 단어 정도의 글을 쓰는 데 1년이 걸린다고 해도 이제는 별로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기존의 문헌을 소화하고,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정리하고, 가능한 반박들에 대비하고, 세련된 글로 표현해내는 각 과정이 하나 같이 험난하다. 또 직관을 단순히 표현하는 일과 그것을 다수에게 설득력 있게 만드는 일, 그러니까 철학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은 전혀 다른 수준의 무엇이다. 나 자신의 한계가 느껴지고 힘에 부친다. 이 페이퍼 도대체 완성이나 할 수 있을까? 물론 고작 6월부터 준비했으니 4개월만에 구시렁거린다면 끈기 부족이다... 최근에 쓴 소설의 첫 문단을..
20230924 중간점검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묶어둔 돈이 계좌에 들어오는 10월 초까지는 긴축재정이다. 장을 보기조차 부담스러운 상황이므로 이미 있는 것으로 야무지게 먹고 살아야 한다. 현재 냉장고 속에 있는 식재료는 다음과 같다. 식당에서 남기고 싸온 마르게리타 세 조각, 파프리카, 양상추, 파, 당근, 버섯, 고추, 양파, 아보카도, 김치 두 통, 베이컨 두 통, 치즈, 오이 반 개, 사과, 포도, 방울토마토, 언 닭고기, 우유, 주스, 달걀 6알 일기를 쓰고 싶은 기분이라 간단히 오늘의 하루를 되짚어본다. 네 시간밖에 자지 못해 죽을 듯이 피곤했던 아침, 언니를 공항까지 배웅해줬다. 마지막으로 서로를 포옹하면서 잘 챙겨먹고 살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만 한다. 돌아와서는 80년대 일본 음악을 들으며 볶음밥을 만들..
20230914 살림살이, 타자성 새 집에 살림살이를 들이다 감기에 걸렸다. 그래도 하우스홀드라고 부를 만한 무언가가 완성되어간다. 잘한 일은 수건과 침대보 따위를 미리 주문해 입주가 가능한 날짜에 곧바로 입주한 것이고, 못한 일은 접시에 돈을 너무 많이 쓴 것이다. 길을 가다 우연히 발견한 상점에서 무려 82유로어치 도기들을 구매했을 때, 나는 이미 아마존에서 꿀 색 접시 세트를 주문한 상태였다. 대신 외식과 카페 나들이를 하지 않고 있으니, 언젠가는 과지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구청에서 레지던스 퍼밋을 신청했고 같은 날 은행 계좌도 개설했다. 남은 큰 일은 핸드폰을 개통하는 것뿐이다. 사실 무엇보다도 학기가 시작되기 전 한국에서 써두었던 소설을 탈고하고 어딘가에 투고하고 싶다. 그런데 피드백들을 체계적으로 모아뒀음에도 불..
20230702 흔들리면서도 나아가는 사람 1. 유학을 앞두고 최후의 여유를 즐기면서 감사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감사하느냐 물으면 목록에 끝이 없을 것이다. 실컷 늦잠을 자고도 할 일에 치이지 않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왜냐하면 닥쳐있는 데드라인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매일 같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서울의 이 거리 저 거리를 놀러다닐 수 있음에 감사하다. 이렇게 놀기만 하다가 과연 타지에 나가 매일 공부만 하는 삶을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다. 타지에 나가기 전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친구들, 한편으로는 유럽에 얼른 오라고, 보고 싶다고 말해주는 S가 있음에 감사하다. 우정은 내가 이 세상에 혼자 내버려져 있지 않다고 느끼게 해주며, 나 역시 그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싶다. 사려깊은 애인과 미래를 꿈꿀 수 있음에..
20230606 나의 첫 번째 필름
20230518 글이 너무 쓰고 싶어서 또 쓰는 일기 1. 오랫동안 일기를 너무 자주 쓰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나 자신의 세부를 세상에 노출시키는 데 대한 두려움이 컸다. 왜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딱 잘라 설명하기 어려운, 비합리적인 자기혐오의 발로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요새는 글 쓰는 행위가 너무 그립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다. 본명을 걸든, 필명을 걸든, '바보바보' 같은 바보스러운 가명을 걸든 상관 없으니 뭔가를 내고 싶다. 그러려면 누군가 나의 글 그리고 글 너머의 나를 미워하면 어쩌지? 누군가 나의 글, 글 너머의 나를 미워한다면 그건 세계의 종말일 텐데, 라는 식으로 흘러가는 소위 자동적 사고의 흐름을 끊어야 한다. 나에겐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는 나의 못난 모습들을 보고 나서도. 무엇보다 문창과 나온 J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