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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이나 소회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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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5 철학함에 대해 철학이 나를 구원해줄 것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사상이, 이념이, 개념이, 그리고 개념들이 조사들 사이로 수려하고 우아하게 앉아 있는 문장들이 나를 구원해줄 것이라고. 그랬기 때문에 복수전공을 했고 대학원까지 왔다. 그러나 막상 제대로된 공부를 시작하고 나니 더 이상 철학이 생명의 밧줄을 내려주리라고는 믿지 않게 됐다. 나를 구원해주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 철학함에 가깝다. 대책없이 난해한 책을 만나 당황하는 표정을 짓기. 당황한 마음을 뒤로 하고 입문서를 사서 잉크가 다 마르도록 형광펜을 긋기. 지루하기 그지없게, 반복적으로 요약하고 또 요약하기. 그리고 다음 날 또 다시 대책없이 난해한 책을 만나… 눈을 게슴츠레 뜨면 하얀 바닥 검은 벽의 미로처럼 형상화되는 활자들과 씨름하는 행위 자체가 나를 구원한..
20200119 젊음 딱 1년 전에 쓴 일기인데 지금이랑 생각하는 바에 별반 차이가 없다. “젊음은 불리하고도 유리한 벽이라고 생각한다. 그 벽은 꽤나 자주 내가 원숙해지는 것을 막아섰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들의 막다른 길로 나를 몰아넣었다. 하지만 그 똑같은 벽 뒤로 나는 숨기도 했다. 앞날이 어둡다고 느껴져 도전을 꺼릴 때면, 또는 저 너머의 세상에는 내 빈틈만을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우글거린다는 편집증에 시달릴 때면, 그래도 나는 아직 젊으니까, 이 생각을 곱씹었다. 아직 시작하지 않아도 늦지 않고, 괜히 시작했다가 망해도 회복할 시간은 충분하고, 언제든 뭔가를 새로 시작할 수 있으니까, 라는 식으로 날 위로했던 것이다. 아직 시작하지 않아도 늦지 않다, 이 명제의 손아귀가 특히 내 마음을 감싸쥐어줬고, 그 폐쇄됨을 향..
20201219 맥없지만 2015년부터 2020년 사이. 나는 진심으로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진심으로’라는 말은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말을 단지 장황하게 만들 뿐인 것 같다. 소설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 중에서 진심이 아닌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소설가는 매력적인 직업이다. 매력은 그의 능력에서 온다. 소설가는 늘 시간에 쫓겨 위태로운 의식을 고요하고 견고한 물질 속에 보존해준다. 감각적인 성격을 잃어 죽기 쉬운 상상을, 소생시키는 동시에 박제하고, 박제하는 동시에 소생시킨다. 내밀하기 짝이 없는 정신을 상호주관적인 실재로 데뷔시킨다. 실은 어떤 말로도 이 모든 힘들을 정확히 묘사하고, 그리하여 묘사해야 할 남은 힘이 없도록 고갈시킬 수 없다. 소설은 소설로써도 해명될 수 없다. 그 해명될 수 없음에 매력..
20200912 희망과 불안에 대해서 희망으로 가득찰 땐 미래라는 자유를 사랑하게 되지만 불안이 엄습해오면 미래로부터의 자유를 사랑하게 된다. 슬픔은 희망보다 불안이 우리의 삶에 훨씬 흔하고 잦다는 데 자리한다. 희망은 삶의 순간들과 단지 우연히 병존하지만 불안은 모든 순간들이 그에 속박되는 삶 그 자체에 깃들어있다--라고 써놓고는 과연 확실한 말인지를 곱씹는다. 그 반대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거의 비슷한 확실성을 내세우면서, 불안이야말로 삶의 우연이고, 희망이 필연의 육화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삶의 운명 같은 것은 정해질 수 없으며, 정해진다 한들 무한히 해석돼버릴 수 있고, 그 수많은 해석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삶이 본래 지녀야 하고 지닐 수밖에 없는 내용 같은 것은 희석되다 못해 자취를 감춘다. 나는 내가 내 삶에서 희망을 가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