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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이나 소회 같은 것

20230702 흔들리면서도 나아가는 사람

2019년에 보았던 피에타상

1. 유학을 앞두고 최후의 여유를 즐기면서 감사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감사하느냐 물으면 목록에 끝이 없을 것이다. 실컷 늦잠을 자고도 할 일에 치이지 않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왜냐하면 닥쳐있는 데드라인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매일 같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서울의 이 거리 저 거리를 놀러다닐 수 있음에 감사하다. 이렇게 놀기만 하다가 과연 타지에 나가 매일 공부만 하는 삶을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다. 타지에 나가기 전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친구들, 한편으로는 유럽에 얼른 오라고, 보고 싶다고 말해주는 S가 있음에 감사하다. 우정은 내가 이 세상에 혼자 내버려져 있지 않다고 느끼게 해주며, 나 역시 그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싶다. 사려깊은 애인과 미래를 꿈꿀 수 있음에 감사하다. 그는 나에게 존재만으로도 선물인데, 나는 그를 위해 무엇을 더 해줄 수 있을까? 최근에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크게 티격거린 일이 있었는데, 먼저 양보하지 못한 것, 혼자서 불안해하다가 사태를 키운 것 등이 후회가 된다. 함께 살 대 살로 붙어있을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동안에라도 끊임없이 사랑을 표하고, 고마움을 전하고, 그의 삶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이미 행복하다면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다.

2. 무엇보다도 돈이 줄줄 새나가는 진로를 택한 딸을 걱정하면서도 끝내는 지지해주시는 부모님께 감사하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감사한 마음보다 죄송한 마음이 더 크다. 철학을 통해서 내가 안정적인 직업을 갖게 되리라는 보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인구가 줄어들 테니 대학의 수 자체가 감소할 것이고, 철학과가 없는 대학은 더더욱 많아질 것이다. 전임 교수가 되기는커녕 비전임 교수나 시간 강사가 되기 위해서도 경쟁을 뚫어야 한다. 단순히 똑똑하다고 해서 직업을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대학의 아주 구체적일 니즈와 나의 능력이 그리고 타이밍이 들어맞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맞기 위해 나는 하나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라 여러 분야를 미리 섭렵해두어야 하는데, 사실 하나만 잘하기도 쉽지 않다.

 학부와 석사 시절을 통과하면서는 현실적인 문제란 부차적인 무엇이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우선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철이 없었다. 하고 싶은 일로 밥 벌어먹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실력도 행운도 거머쥔 극소수에게 주어지는 무엇이다. 그런 거야말로 신의 은총이 아닌가 싶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가 너는 철학에 100퍼센트 확신이 있니? 라고 물었을 때 솔직하게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무제한적으로 노력할 테지만, 내가 임용이 되고 되지 않고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날카로운 현실 감각을 가지고도 이 일에 대해 순도 100퍼센트의 열정을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집안의 형편이 무척 넉넉해서 지원을 받으면서도 면목이 없어지지 않을 수 있거나, 노동하면서도 공부를 병행할 수 있는 초인이 아니라면 철학을 진로로 선택하는 일은 무모하다. 이상 비자 발급 준비에만 120만원을 넘게 쓰며 궁지에 몰린 사람의 넋두리.

3. 하지만 희망을 아예 저버릴 이유도 없다. 라이팅 샘플에 대해 어드미션스 커미티로부터 칭찬을 들었고, 내가 저명하다고 생각하는 해외 학술지에 투고한 원고가 보드의 승인을 받고 리뷰어들에게 넘어갔다. 철학이 나랑 밀당을 한다는 기분이다. 그러니 일단은 낙관하면서 이런저런 상황들에 온몸으로 부딪혀보고 싶다. 그러다가 내게 계속해나갈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면 그렇게 하고, 압력을 견디지 못하겠다면 여태까지 해온 모든 것을 매몰비용으로 간주할 생각이다. 누군가는 나의 커미트먼트가 약한 게 아니냐고 묻겠지만, 나는 오히려 모든 사정을 고려하고도 너무 강한 커미트먼트를 가지는 쪽이 더 수상하다고 생각한다. 흔들리면서도 나아가는 사람이 무빙워크 위를 걷는 사람보다 탁월하다고 믿는다. 탁월한 사람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