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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이나 소회 같은 것

20230301 Es geht so.

토니오 크뢰거
ⒸD씨
최우람 작가의 '작은 방주' 전 중에서
파마하기 전
파마 마친 후
차이 티 라떼와 함께하는 데리다


1. '스킨스' 시즌 3를 이어서 보는데, 프레디와 쿡 모두 나름의 이유로 매력적이다. 쿡은 나의 이상형에 가깝고(160 후반 정도 되어보이는 키에 장난 많게 생긴 얼굴, 배드 보이, 무엇보다 퇴폐미) 프레디 역시...... 나의 이상형에 가깝잖아?(마른 팔다리, 뚜렷한 이목구비, 내려놓고 놀기를 좋아하지만, 스케이트보드 타기 같은 건전한 취미도 가짐) 그 외에도 틈틈이 문화생활을 한다. 며칠 전엔 차이밍량 감독의 '애정만세'를 보았다. 하루키의 '스푸트니크의 연인'이 많이 생각 났다. 세상은 왜 이렇게 고독한 곳인지. 인물들이 죄다 담배를 지독하게 피워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연기를 들이마시는 순간만큼은 공허가 채워지는 듯한 환상을 가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나 역시 팔할은 같은 이유로 담배를 피우는 것이고.

 그나저나 메이는 아정을 좋아한 걸까, 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줄곧 남았다. 영화 자체가 그것을 의도한 것 같지만 두 사람 사이엔 대화가 별로 없다. 거리에서 눈빛을 몇 번 교환한 뒤 바로 서로를 애무하는 장면으로 넘어가고, 두 번째이자 마지막 만남도 우연히 만나 꼬치 몇 개를 사먹은 다음 섹스를 하는 것으로 끝맺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는 잠자는 아정을 두고 먼저 방을 나선 뒤 공원의 빈 벤치에 앉아 5분이 넘도록 오열한다. 바람에 휘날린 머리칼이 얼굴을 뒤덮어도 울고, 머리칼을 정리하고 담배를 피우다가도 울고, 바로 앞에 다른 사람이 있는데도 엉엉 운다. 눈물의 이유는 무엇일까, 자문해보면 아정이 애정을 되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라는 대답도 떠오르고 어차피 아정만으로는 애정에 대한 욕망을 모두 채울 수 없기 때문에, 라는 대답도 떠오른다. '애정만세'라는 영화의 신비는 서로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저 두 대답 사이의 경계를 흐린다는 것이다. 메이에게는 아정이 아니었어도 상관이 없었겠다는 인상을 주는 무언가가 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애인이라는 일반자 같다. 반면 소강에게서는 왠지 모르게 아정이라는 특수자에 대한 배타적인 열망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소강이 메이보다 아정에게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다. 아정은 그토록 잘생긴 미소라는 기표 뒤로 본심이 될 만한 아무런 기의도 숨겨놓지 않은, 그런 인물이기 때문이다. 엇갈리는 마음들을 지켜보면서, 관객의 가슴은 내려앉는다.

2.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말이 많아 심란하다. 소위 '할많하않'의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그냥 확 화를 내버릴까 싶은 순간들이 있지만, 성인이 된 후로 감정이라면 뭐든 삼키고 보게 된 성격 탓에 그럴 수가 없다. '이거 내 쪽에서 뭔가 잘못한 건가?'부터 묻는 습관도 문제고. 한편 나 자신은 누군가를 부담스럽거나 불편하게 만든 적이 없는지 반성하게 된다. 그런 적들도 분명 있었으니까.

3. 요즈음의 플레이리스트: 보수동쿨러의 '죽여줘', Men I Trust의 'Numb', 허성현의 'MBT', 동경사변의 '사생활', 김사월의 '일회용품', Portishead의 'Glory box', Glen Check의 'French Virgin Party', 섹후땡의 'You're the Only Good Thing In My Life'. 

4. 가끔씩 머릿속으로 감사일기를 쓴다. 현재의 내가 감사히 여기는 바들을 쭉 나열해보는 것이다. 오늘 아침, 악몽에서 일찍 깨어났음에 감사하다(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떠났던 옛적 애인이 사실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 탓에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았던 것임을 당시로 돌아간 내가 알게 되는, 그런 시대착오적인(?) 꿈을 꿨다). 날씨가 풀린 것에 감사하다(조금 있으면 트위드 자켓을 입을 수 있을 것 같아 들뜬다). 오늘이 유학 지원 마감일이 아니냐고, 응원한다고 메시지를 주신 J씨가 계셔 감사하다. 저녁식사로 먹은 소고기와 파김치가 맛있었음에 감사하다. 얼마 전 개봉한 포도 맛 액상담배가 맛있음에 감사하다. 오늘 ⟪상상계⟫를 50쪽이나 읽어냈고, 논문도 반 편 가량 살펴볼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 빗소리 활동을 같이 했던 오빠와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음에 감사하다. 살이 좀 찌긴 했지만 그래도 건강함에 감사하다. 배울 점이 많은 선배님과 내일 함께 세미나를 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고맙게 생각할 수 있는 일들이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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