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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이나 소회 같은 것

20230428 무제

 울적한 밤이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추적하다 보면 내가 왜 지금 울적한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사실 둘 사이에는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을 것이다. 내가 느끼는 많은 슬픔은 선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특정한 경험에 의해 빚어졌으나, 나에게 너무나 커다란 충격을 안긴 나머지 어느 샌가부터 내가 나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가 되어버린. 모든 경험이 통과하는 필터 같은 것이 되어버린. 그래서 경험의 가능조건 따위로 굳어 하루하루 나를 거쳐가는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성립하게 된, 그런 슬픔들. 경험이 선험으로 변신해가는 나날을 보내왔기 때문에 나는 역사와 본질이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아침. 잠에서 갓 깬 채로 비몽사몽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는데, 엄마가 방 안으로 들어와 내 옆에 누우려 했고,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내가 그 일을 견딜 수 없다 판단해 바로 몸을 일으켜버렸다. 엄마는 좋은 사람이지만, 그녀를 신뢰하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이 내게는 아직 어렵기만 하다. 나는 무수한 반박거리들을 떠올려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만큼은 내게 부모님이 없다는 불경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용기를 내서 내 영혼의 가장 안쪽에 있는 내용을 꺼내보였으나 부정이나 몰이해, 심지어는 전적인 망각에 부딪혔던 순간들을 잊을 수 없다. 그런 동시에 최선을 다했을 것이 분명한, 그리고 매일 같이 내게 따뜻한 밥과 잘 곳을 내주는 부모님을 향해 이런 생각을 품는 나 자신이 가증스럽고 미워서 온전히 나 자신의 편을 들기도 쉽지 않다.

 엄마와는 나란히 눕는 대신 그냥 함께 방을 나왔고, 몸을 씻으면서 슬슬 생리를 할 때가 되었는데 아직 기미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점심. 학교에 가서 동아리 선배 M을 만났다. 그와는 2014년에 알게 됐으니까, 햇수로 치면 10년째인 인연이다. 느릿느릿한 말투가 듣기 좋고 자신이 하는 공부에 대한 사랑이 빛나는 사람인데, 곧 뉴욕으로 떠난다는 말을 듣자마자 왠지 모르게 그와 정말 잘 어울리는 도시라고 생각했다. 대화를 나누면서 햇살을 많이 받았고,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러고 나서는 분석철학 듀오와 우연히 마주쳤다. 서로 근황을 묻다 석사논문이 잘 풀렸다는 E의 이야기를 듣고는 안도했다. 철학을 그만두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도 자주 하기에, 이러다 평생 마주칠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닌지 내심 아쉬웠기 때문이다. 사람 놀리는 것을 좋아해서 몹시 얄미운 인간인 게 맞는데 언젠가부터 미운 정이 든 듯하다. 사랑스러운 동생 M과도 서로의 곁에서 각자 할 일을 하는 틈틈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스몰토크에 가까운 이야기부터 어찌 보면 무거운 이야기까지 두루두루 나눴는데, 나의 두서 없는 말을 경청해줘서 고마웠다.

 저녁. 구약과 신약의 차이에 대한 아퀴나스의 견해에 대해 헛소리 삼분지이짜리 과제글을 쓰고 프루스트를 조금 읽으니 하루가 다 가버렸다. E가 M과 나를 지하철 역까지 차로 태워다주었고, M과 코인노래방에 들어가서 블랙핑크의 노래를 불렀다. 목이 쉰 채로 동생과 헤어진 다음, 근처에서 애인이 술자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 일찍 파할까 싶어 연락을 기다리는 김에 번화가 산책을 좀 했다. 바로 전화를 해서 파하는 시각을 묻고도 싶었지만,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대화하는 데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메시지를 남기고 계속 걸었다. 같은 길을 서너 번 뱅뱅 돌면서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을 구경했다. 갑자기 비가 와준 덕에 더 운치가 있어진 산책이었다.

 하지만 아마 우산을 폈을 때부터 울적해진 것일 수도 있다. 혼자 술을 마시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에 들어갔고, 다시 프루스트를 펼쳤다가, 다시는 소설을 쓰지 못할 것 같은 강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절필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써도 된다면, 절필을 하네 마네 홀로 속앓이를 해온 것은 정말 오랫동안 반복된 일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몸에 전해지는 느낌이 달랐다. 절망감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예감이라는 것도 감정적인 충격보다는 이성적인 판단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덤덤한 울적함 가운데서조차 나도 S씨처럼 메일링 서비스나 시작해볼까, 소설이 안 된다면 유학일기 같은 것으로, 라고 생각한 것을 돌이켜보면 글쓰기에 대한 미련은 평생 버리지 못할 것 같다. 비극이다. 소설을 쓰면 자기혐오가 도지면서 외로워지고, 쓰지 않으면 삶 전체가 의미의 옷을 벗는 듯이 아쉽고 안타깝다. 어느 길로 새든 공포스럽다.

 밤. 애인과의 만남은 결국 불발이 됐고, 아쉬웠지만 미리 만날 약속을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덕분에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정처도 없이 빗길을 걷는 경험을 했다. 집으로 돌아와 S와 통화를 하는데 숨이 차다고 느껴 담배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울적한 밤이 울적했던 밤이 되어 저물어간다.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