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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이나 소회 같은 것

20230503 근황과 즉흥적인 메모


 한 편의 소설을 위한 즉흥적 메모: 로마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잠에서 깨어난다. 눈을 뜨자마자 새까만 딱따구리 한 마리가 가슴에 내려앉은 듯 찌릿한 흉통이 인다. 램프가 올려진 침대가의 테이블 위에 약 봉지가 있다. 하지만 물이 없기 때문에 부엌으로 나가야 한다. 부엌에서는 로마와 이미 8년을 만났으며 서로 사실혼 관계에 있는 애인 하명이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고 있다. 로마는 물 대신 하명의 커피로 약을 집어삼킨다. 뭐 읽어? 하고 물으니 하명이 프루스트의 소설책을 내민다. 로마는 프루스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시선이 언제나 지나치게 예민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명에게 굳이 이야기하지는 않는데,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명이 소포 하나를 가리키며 말한다. 네게 우편이 왔어. 소포는 아주 살짝만 부풀어있다. 갑자기 생상스가 작곡한 죽음의 무도가 로마의 머릿속에 울려퍼지기 시작한다. 생상스의 음악은 로마의 의지에 반해 소포를 뜯는 내내 그녀의 의식을 장악한다. 소포 속에는 청첩장과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호텔의 남색 카드키가 들어있다.

 - 로마에게, 잘 지내니? 오랜만이야, 그동안 나는 호텔 로망스의 주인과 사랑에 빠져 곧 결혼을 하게 되었어, 그는 쌍꺼풀이 없고 살짝 처진 눈에, 입술이 나뭇잎으로 된 책갈피처럼 생긴 미남이야, 옛날에 네게 말해줬던 내 이상형과 똑같지? 네가 내 결혼식에 와줬으면 좋겠어, 너도 내 남편을 좋아할 거야, 하지만 오지 못할 것 같다면 카드키를 반송해주겠니? 반송할 거라면 거절의 편지 같은 건 동봉하지 않아도 좋아. 너의 옛 친구 미오가. 

 - 미오라는 이름에 로마는 숨이 가빠오고 다시 흉통에 휩싸인다. 미오는 온점을 찍어야 할 곳에 반점을 찍는 습관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하명이 만류하지만 로마는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운다.

 - 미오는 고등학교 시절 로마를 구원해준 적이 있다. 도움이 아니라 구원이었으며, 미오는 친구가 아니라 신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로마는 미오가 신이 되어 자신을 구원한 적이 있다는 공허한 사실 딱 한 가지만을 기억하고 있으며, 자신이 정확히 어떤 곤경에 처해있었고 미오가 그 곤경을 왜 그리고 어떻게 제거해주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미오에 대한 감사와 숭배의 마음 그리고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운 부채감은 이미 서른이 된 로마의 마음속에 아직까지도 자리하고 있다. 이유 없는 감정. 그러나 강한 감정. 너무 강해서 무시할 수 없는. 너무나 견고한 형식이어서, 그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차든지 간에 사실 상관이 없으며 어차피 반드시 준수되어야 하는. 로마는 미오의 결혼식에 가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다. 참석은 과거의 신을 향한 뒤늦은 예배 같은 것이며, 가지 않았다가는 지옥불에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는 강박적인 생각이 로마의 흉통을 더욱 극심하게 만든다.

 - 며칠 뒤 로마는 9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호텔 로망스에 간다. 로마가 기차 안에서 케루악을 읽는 사이 하명은 로마의 동생 라만을 집으로 불러 함께 에로 영화 따위를 보고 나란히 누워 낮잠을 잔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접촉이 없다.

 - 애인이 자신의 동생과 숨결을 맞대고 있는 사이, 로마는 케루악에 지쳐 잠을 청한다. 꿈 없이 잠을 자고 깨어난 다음 식사를 주문한다. 시금치가 들어간 걸쭉한 감자 스튜를 말 없이 먹는데 왠지 호텔 로망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미오와 로마 두 사람이 모두 대학생이 되어 주고받은 편지에서 미오가 단 한 번 언급한 대학 동기. 어마무시한 부잣집의 아들로, 아마 집안의 여러 사업들 중 하나를 물려받을 것이라던. 길고 긴 술자리의 끝에 미오는 부잣집 아들의 스튜디오에서 잠을 자게 됐는데, 술에 취한 그가 갑자기 자기 삶의 역사와 숨 막힐 것 같은 집안의 분위기에 대해 털어놓더니 자살을 하고 싶은 것 같다고 고백했단다. 그래서 있지 로마야, 나는 부엌으로 걸어가서 칼을 하나 꺼내왔어, 그러고 나서는 그를 죽이려는 척 연기를 했어, 칼을 마구 휘두르고 아주 말도 아니었어, 엄청나게 놀라면서 뒤로 물러서데, 나를 제압하려고도 하고. 손목이 잡혔을 때 얘기했지, 너는 죽고 싶지 않은 모양인데, 그러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더라고, 그런 것 같다고. 칼을 내려놓고 서로를 부둥켜 안았어. 로마는 미오의 편지를 읽고 그녀가 극도로 무서워져서 답장하지 않았다. 미오에 대한 감사와 숭배의 마음 그리고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운 부채감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그것이 미오에게서 들은 마지막 소식이었다.

 - 로마는 호텔 로망스에 도착한다. 로비에 장미가 지나치게 많았는데, 그것들이 교체되기 전에 모두 시드는 상상을 하다 로마는 우울감에 빠진다. 체크인을 기다리면서 받은 웰컴 드링크를 마신 뒤 흉통이 심화되었지만, 약을 집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명과의 전화 통화. 여보세요. 누군가 코를 고는 소리가 배경에 깔린다. 로마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만, 괜히 따졌다가 하명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무서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 객실에서 담배를 피우며 무료하게 누워있다 이튿날 결혼식이 진행될 야외 정원에서 혼자 산책을 한다. 술에 취한 채 마찬가지로 혼자 산책을 하는 호텔 로망스의 주인을 우연히 마주쳐 대화를 나눈다. 쌍꺼풀이 없고 살짝 처진 눈에, 입술이 나뭇잎으로 된 책갈피처럼 생긴 미남이다. 그는 미오가 자신을 구원해준 것만 같은 감각이 있는데, 정확히 어떤 상황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미오에게 맥락을 물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숭배하는 심정이라고 블러디 매리를 마시면서 털어놓는다. 결혼을 앞둔 신랑의 얼굴이 붉다 못해 흑색이다.

 - 결혼식 당일, 로마는 자신이 신부 측의 유일한 하객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미오와 호텔 로망스의 주인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사이, 로마는 호흡이 곤란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흉통과 어지럼증 가운데서 헛구역질을 하다 의식을 잃는다. 응급차에 실렸지만 결국 사망하기 직전, 그녀는 미오가 어떤 상황에서 자신을 구원했었는지 상기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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