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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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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진, <몽 카페> 신유진, ⟪몽 카페⟫, 2021, 시간의 흐름. 저자가 파리에 머물렀던 시절 다녔던 카페들에 대한 기록이다. 파리의 카페를 지나치게 낭만화하지 않으면서도 실감 나고 두근거리는 이야기들을 만나 즐거웠다. 저마다 커다란 가방을 들고 나란히 창가에 앉아 다른 파리지앵들과 함께 세탁방을 건너다 보며 세탁과 건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이야기(정확히 말하면 세탁물을 도난당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이야기), 노숙자 크리스틴에게 맥도날드의 커피를 사줬던 이야기가 특히 재미있었다. "함부로 외롭지 않겠다."(122)는 말도 인상 깊었다. 나도 저자처럼 카페에 가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카페에 가서 30분 이상 앉아있는 것 같다. 웬만하면 프랜차이즈보다 개인 카페를 선호하고, 아늑함보다는 바우하우스 스타일의..
토마스 베른하르트, <몰락하는 자>와 니체의 생리학 토마스 베른하르트, 박인원 옮김, ⟪몰락하는 자⟫, 문학동네, 2011. 어쩌다 보니 이 한 소설만 네 번을 읽었다. 구매한 날짜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2018년 6월 20일 북페어에서 구매해 처음 읽었고, 책을 덮자마자 공허해진 마음에 다시 읽었고, 2019년에 ⟪사랑하지 못하는 자들의 사랑⟫을 쓰면서 또 꺼내봤고, 이번엔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를 강독하는 수업에서 리포트를 쓰기 위해 재독했다. 그러나 읽을 때마다 새롭고 흥미로운 점들이 돋보이는 책이다. 베른하르트의 문학적인 역량에 오늘도 감탄한다. 글의 작은 일부는 내가 기존에 니체의 저서들을 요약하면서 썼던 문구들을 옮겨온 것으로 이루어져있다. 아주 마음에 드는 글은 아니지만 데드라인 내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9학점..
조지프 콘래드, <어둠의 심연> 조지프 콘래드, 이석우 옮김, ⟪어둠의 심연(Heart of Darkness)⟫, 을유문화사, 2008. 소설 전체가 하나의 심연과도 같이 모호했다. 아프리카 내에서 벨기에가 식민통치를 하고 있는 어느 강 유역이라는 것만 유추할 수 있을 뿐 배경이 어디인지도 모호하고--작가의 전기를 통해서만 그곳이 콩고 강임을 알 수 있다--인물들의 행적 또한 마치 그림자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처럼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이 소설에서 모호하지 않은 것, 확실하고 견고한 것은 모든 것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지만 그 차분한 존재의 무게만으로 결국은 자신을 정복하러 오는 모든 이를 내리누르는 빽빽한 정글뿐이다. 야생에 둘러싸인 백인들은 열악한 환경과 고독감으로 미쳐가면서도 자신의 이익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급기야 ..
알라 알아스와니, <야쿠비얀 빌딩> 알라 알아스와니, 김능우 옮김, ⟪야쿠비얀 빌딩⟫, 을유문화사, 2011 한참 소설가 김영하의 팟캐스트에 빠져 살던 때가 있었다. 그가 했던 말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정확한 워드 초이스까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좋은 소설에는 오히려 밑줄을 칠 곳이 없고 밑줄을 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쳐야 하게 된다'는 것이 골자였다. 표현이 아름다운 탓 또는 충격적인 탓으로 두드러져서 흐름을 끊는 부분들이 산재해있기보다, 그리하여 밑줄을 통해 해당 부분을 전체 흐름으로부터 절단시킬 수 있기보다 이야기 자체가 통째로 하나의 유기체로서 온전한 소설이 곧 좋은 소설이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알라 알아스와니의 ⟪야쿠비얀 빌딩⟫이 내게는 바로 그런 소설이었다. 이 소설에는 화려한 비유도, 일상을 뒤집는 매혹적인 환상도 ..
오에 겐자부로, <개인적인 체험>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아글라야 페터라니,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 아글라야 페터라니, 배수아 옮김,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Warum das Kind in der Polenta Kocht)⟫, 워크룸프레스, 2021. 아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1인칭 소설을 쓴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아이는 많은 것을 경험해본 적이 없지만 많은 것을 경험해본 적이 있고, 살아가는 일에 대해 무덤덤한 듯 굴다가도 문득 생의 고통을 어른보다도 예민하게 느껴버린다. 가족을 증오하는 동시에 세상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섹스를 모르지만 또 알고 만다. 아이가 모르는 것과 아는 것, 모르지만 아는 것, 알지만 모르는 것을 자연스러운 언어 속에 녹여내야 한다. 이런 작업은 인위적인 공을 들인다고 해서 밀도와 완성도가 높아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경험이 필요하다. 어린시절..
허연, <불온한 검은 피> 허연, ⟪불온한 검은 피⟫, 민음사, 2014. 마치 여러 편의 느와르 영화들을 연속으로 시청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시집이다. 가난한 집에서 자란 남자들이, 언젠가는 서로 끌어안았음에 분명한데도 미친 듯이 싸우면서 피를 흘림으로써만, 죽어감으로써만 자신의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그들은 자신의 애인을 사랑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그녀들에게 소홀하기도 하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사랑에 자신의 전부를 바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맞닥뜨리고는 욕설을 뱉으며 사라진다. 이별의 아픔은 시간이 흘러 그것을 홀로 곱씹을 때 비로소 생생하게 느껴진다. "합성 인간의 그것처럼 내 사랑은 내 입맛은 어젯밤에 죽도록 사랑하고 오늘 아침엔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것 살기 같은 것 팔 하나 다리 하나 없이 지겹도록 솟구치는 것 // 불온..
임성순, <우로보로스> 그리고 포스트휴머니즘 임성순, ⟪우로보로스⟫, 민음사, 2018 기계-인간과 인간-기계 사이 “지도야말로 지배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O, 126).” 1. 들어가며 임성순의 장편소설 『우로보로스(2018, 민음사)』는 인공지능과 가상현실이 인간의 삶 속 깊숙이 침투해있는 시대를 그린다. 작중에서 이 시대는 인공지능의 능력이 인간의 능력을 추월한 ‘특이점’ 이후의 세상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또한 인간이 만물의 운명을 좌우하는 인류세(anthropocene)로부터 벗어난 그 이후의 세계이기도 하다. 더 구체적으로 서사를 이끄는 주요 행위자들이 인간이 아니거나, 자신의 인간됨을 부끄러워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휴머니즘 담론으로는 이 탈-인류세(post-anthropocene)의 세계를 읽어낼 수 없다. 이제 우리에게는 이 문자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