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

(77)
프란츠 카프카, <소송> 프란츠 카프카, 권혁준 옮김, , 문학동네, 2010 자신에게 너무나 중요한 문제에 대해, 스스로 관여해서 뭔가를 개선시킬 수 있다는 희망과, 아무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무력감을 함께 느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인공 요제프 K에게 공감할 수 있다. 만일 그토록 마음을 쓰는 동시에, 사실은 해당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조차 감이 잘 오지 않아서 자신의 노력이 의미에 투자되고 있는지, 아니면 무의미를 위해 탕진되고 있는지 헷갈려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무의미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할애하고 생을 망가뜨리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을 것이므로, 나는 이 작품을 비극으로 읽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거대한 조직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고한 사람들을 체포하고, 그들을 상대로 무의미하며 ..
김혜진, <불과 나의 자서전> 김혜진, , 현대문학, 2020 "그쪽으로는 아예 발길도 마라(140)." "그러게. 내가 남일동에 가지 말라고 했잖니. 그 동네는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남일동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동네야(169)."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세세하게 묘사하기보다 홍이('나')의 내면을 따라가는 데 더 집중하는 서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읽는 내내 남일동의 풍경이 내 마음의 눈 앞으로 스쳐지나갔다. 남일동은 재개발 계획이 몇 차례나 무산되고, 산사태가 산 아래 집들을 덮치기도 하며, 바로 옆동네인 중앙동 사람들의 무시의 대상이 되는 허름한 동네다. 남일동의 주민들은 서로에게 정을 기대하고 실제로 어느 정도는 온기가 있는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지만, 다른 주민을 대함에 있어 세간의 편견이나 억측을 넘어설 만큼의 사랑은 품고 있..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김연경 옮김, , 2019, 민음사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될 테지만, 악이 없다면 아무런 인간적 사건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비극적인 통찰이 빛나는 책이다. 아래는 감상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위대한 책에 대한 어느 잡념꾸러미. 1. 신앙이 제거된 이성을 독주시킨 끝에 둘째 아들 이반 카라마조프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가공할 명제를 발견하지만, 본인은 7000년 인류의 습관인 양심을 버리지 못해 자신의 발견을 체득하지 못한다. 그의 말로는 섬망증 환자의 길이다. 그러나 이반의 발견을 온몸으로 수용한 스메르쟈코프 역시 스스로 파멸한다. 인간은 파멸하지 않으려면 신을, 적어도 신적인 것을 믿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2. 하지만 신의 섭리는 평생을 선에 봉사한 조시마 ..
엘프리데 옐리네크, <피아노 치는 여자> 엘프리데 옐리네크, 이병애 옮김, 『피아노 치는 여자』, 문학동네, 2009 내가 읽은 그 어떤 소설의 여성인물보다도 비참한 인생을 산 피아노 선생, 에리카 코후트의 이야기다. 아래의 내용은 스포일러로 충만함을 미리 알린다. 에리카는 평생 어머니의 강압적인 교육 방식과 집착 아래서 자랐다. 그 반작용으로 그녀는 타인을 지배하겠다는 권력욕을 품는 동시에,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일, 즉 복종으로의 강력한 회귀본능을 지니고 있다. 문하생 발터 클레머에게 마조히스트적인 성행위를 요구하면서도 - 굴종하는 쪽이 오히려 주도권을 쥐는 종류의 섹스라는 점에서 그녀와 어울리고, 단 한 번도 타인에게 지배당해 본 적 없는 남성 클레머의 빈틈을 파고들어 그를 당황시킨다 -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적인 형태의 소위 ‘부드러운’ ..
배수아,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 배수아,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 워크룸프레스, 2019 한 번 읽는 것만으로 성공적인 리뷰를 남길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리뷰라기보다 읽은 책을 기록하기 위한 아카이빙에 가까울 것이다. 배수아의 는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주인공 ‘나(=우루)’와 검은 모자를 쓴, 그녀의 일행이 무녀를 찾아가 그들의 과거 또는 이름을 알아내는 여정을 묘사한다. 2부는 ‘나’와 동일인물로 추정되는 여성이 손님과 마주해 마치 준비의례처럼 식사를 한 뒤 자신에게 일어난 범상한 사건에 대해 낭송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3부는 우루가 한때 사랑했던 MJ를 떠나, 자신에게는 어린 시절이 없음을 더욱 더 선명하게 깨닫고 신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우루는 불현듯 자신 안에서 저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