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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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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하인리히 뵐, 김연수 옮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민음사, 2008 제목에 굉장히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단순히 조금은 바보 같고, 위태로운 사랑에 빠졌을 뿐인 카타리나 블룸이 언론에 의해 테러리스트, 창녀, 체제에 위협적인 공산주의자 등으로 낙인 찍히면서 명예를 실추 당하고, 조금의 죄의식도 없이 자신의 아픈 어머니와 자신을 문자 그대로 죽음 또는 적어도 죽음에 가까운 억울한 처지로 내몬 기자 퇴트게스를 살해한다. 황색 저널리즘에 대한 작가의 분노가 거의 투명하다시피 한 인물들과 서사를 곧장 통과해 독자에게 아무런 매개도, 해석의 여지도 없이 전달된다. 아무리 이 글이 '소설'보다는 '이야기' 또는 '팸플릿'으로 의도..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 지성사, 1981. 몰입하기가 힘에 부치는 시집이다. 요즘의 일부 시들처럼 암호 같아서도 아니고, 외국의 몇몇 시들처럼 숨은 뜻이 지나치게 깊어서도 아니다. 이 시들의 화자는 불행하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새마저 비행하는 것이 아니라 "푸른 하늘에 / 투신"('새', 78)하는 존재로 보는 화자의 시선은 세계로부터 희망을 읽어내는 데 철저히 무능하다. 세계로부터 희망을 읽지 못하는 병, 그것을 우리는 우울증이라고 부른다. ⟪이 시대의 사랑⟫은 우울에서 시작해 우울로 끝난다. 우울은 사람마다 그 깊이는 다를지언정 몹시 흔한 감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괴로움 / 외로움 / 그리움"이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이라고 화자가 단언할 때, 나를 비롯한 ..
구병모, <바늘과 가죽의 시> 구병모, ⟪바늘과 가죽의 시⟫, 현대문학, 2021 경장편소설이 현실적인 목표로서 삼을 수 있는 모든 최선들의 육화. 신화와 역사가 교차하고, 무한자와 유한자가 마주치며, 철학과 서사가 조화되어있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한국어 표현들에 길을 잃을 뻔도 하지만, 고요하면서도 흥미진진한 플롯이 나른해진 독자를 다시 일으켜세운다. 구두를 짓는 구체적인 일상에 대한 치밀한--소설가적 양심에 따라 상당한 연구와 취재가 이루어졌음에 분명한--묘사가 자극하는 이미지적 상상력이 고갈될 즈음에는, 이해하기 전혀 어렵지 않은 말로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존재론적 성찰이 전개된다. 쑥스러운 고백이지만 내가 소설가가 되기를 꿈꾸면서 쓰고 싶었던 소설이 이런 소설이었던 것 같다. 줄거리를 줄줄 읊는 식의 독후감은 이 책의 품위에 ..
장이지, <레몬옐로> 장이지, ⟪레몬옐로⟫, 문학동네, 2018. 논문을 쓰고 있기 때문에 '여유'를 부려선 안 된다고 생각해서 당분간 문학을 손에 쥐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능률이 더 오른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공허해진 마음에 가만히 누워만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억눌려있던 무엇인가를 분출하듯, 굳이 가던 길을 틀어 역내 서점의 문학 코너를 뒤졌다. 밝고 맑은 이미지를 주는 표제어에 이끌려 이 시집을 집어들자마자 왠지 마음이 놓이는 것처럼 느꼈다. 문학은 마치 저녁밥처럼, 내가 생업으로 가장 바쁠 때조차 시간을 내서 향유해야 하는 일종의 생필품이 된 것인가 하고 생각해본다. 나에게 철학은 노동이고, 문학은 노동의 이유 같다. 블로그에서 시집에 대한 독후감을 쓸 때마다 앵무새처럼 덧붙이지만, 나는 시를 잘 모른다. 전..
윤고은, <밤의 여행자들> 윤고은, ⟪밤의 여행자들⟫, 민음사, 2013 윤고은 작가의 소설은 두 번째로 읽는다. 먼저 읽은 소설은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이라는 단편이었다. 그 소설 또한 현대 사회의 경제적 생태계에서 생존하고자 분투하는 개인들의 욕망과 그것을 동력 삼아 없는 길도 개척해 나아가는 자본주의 사이의 역학을 묘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밤의 여행자들⟫이 동일한 주제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심화라고 말해야 한다. 사람들의 모험심과 연민을 자극하는 재난지역 패키지 여행을 주선하는 회사 '정글'에 다니는 주인공 고요나는 '무이'라는 베트남의 섬마을에 낙오된다. 무이는 한때 그곳의 땅을 두고 경쟁했던 두 부족 간의 싸움 때문에, 그리고 종국에 가서는 사막의 ..
배수아, <부주의한 사랑> 배수아, ⟪부주의한 사랑⟫, 문학동네, 1996. 배수아-유니버스의 첫 번째 장편소설. 제목대로 두 세대에 걸쳐진 부주의한 사랑들을 다루는데, 다만 장소가 시골에서 도시로 바뀔 뿐이다. 물론 이것은 작은 차이가 아니다. 왜냐하면 "도시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바람이 어느 편에서 불어오거나 아니면 아버지를 모르는 아이를 낳는다거나 지나간 일들이 꿈속에서 보이는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기 때문이다(112). (도시적 삶에 대한 문제적 시선은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2003)⟫에서 발전된다.) ⟪뱀과 물(2018)⟫에 실린 단편소설 '1972'에서 어린시절은 존재하지 않으며, 기억은 망상일 뿐이라고 단언했던 배수아였기에 소설의 전반부가 아기의 시선에서 언니 연연, 사촌들의 어린시절과 엄마 모..
임승유, <그 밖의 어떤 것> 임승유, ⟪그 밖의 어떤 것⟫, 현대문학, 2018. "조용하고 안전한 나만의 세계"(16)에 대한 갈망과, 그 세계를 이루는 사물들과의 친연성이 돋보이는 짧은 시집이었다. 여러 시들에서 화자는 마치 "없는 생활"(31)과도 비슷한, 다만 "하루도 빼먹지 않고 모든 게 거기[여기] 있"(18)는 평온한 고립을 꿈꾼다. 계속해서 등장하는 시어인 '외투'는 파괴의 위험이 없어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세계의 내부와 외부를 구분 짓는 기표이다. 화자는 외투를 입었다가 다시 벗고, 내부로 재진입하면서, "더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32)는 선택권이 온전히 자신에게 있다는 데서 실존적 위안을 얻는다. 불변하는 평온의 경계 내에서 화자는 사람보다도 사물을 더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나'가 일어나려면 먼저..
레오 페루츠, <심판의 날의 거장> 레오 페루츠, 신동화 옮김, ⟪심판의 날의 거장⟫, 열린 책들, 2021. 가벼운 언어로 그러나 인간의 욕망을 깊이 파고드는 추리소설이다. 단순히 연쇄적인 자살 사건의 비밀을 파헤치는 이야기로만 읽힐 수도 있지만, 그 표피 아래에는 재능의 한계에 부딪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 또는 처음부터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고자 하는 예술가들의 과욕이 묘사되어있다. 창조적 상상력에 대한 갈망은 예술가들로 하여금 일련의 의례를 거쳐--이 이상 스포일하고 싶지 않다--'심판의 날'을 맞이함으로써 모든 것이 새로운 이세계, 말하자면 완벽하게 타자적인 것을 만나 영감을 얻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그들이 심판의 날에 만나게 되는 것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 그것도 자기 영혼의 핵을 이루는 가장 내밀한 공포일 뿐이다. 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