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베른하르트, <모자>
토마스 베른하르트, 김현성 옮김, ⟪모자⟫, 문학과지성사, 2020. "결국 지쳤어, 피로뿐이야, 그리고 시간표에 따라 정시에 출발하는 기차에 대한 공포. 정신적 공포. 그리고 극도의 무자비함, 극도의 무자비함, 하고 형은 말했습니다."(211) 베른하르트의 글을 음미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이미지를 다채롭고 입체적으로 영상화하는 능력이 아니다. 그의 인물들은 개성적인 이목구비나 주의할 만한 눈빛, 특별한 머리 색 등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다만 후줄근하고 종종 불길하기까지 한 옷차림 속에 지나치게 쉽게 파묻힌 채, 나쁜 공기에 의하여 육체를 용해 당한 상태로 유령처럼 이승에 대한 저주의 말을 퍼부을 뿐이다. 인물의 처지에 공감하면서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능력 또한 발휘할 기회가 마땅치 않다...
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김화영 옮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문학동네, 2019. 기억상실증에 걸린 기 롤랑이 전화번호부와 사교계 카드들, 빛 바랜 사진, 어느새 노인이 된 사람들의 안개 같은 기억 속에 웅숭그리고 있는 자신의 과거를 찾아나선다.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는, 나는 누구였느냐는 물음을 타인들에게 물어가며 오직 행운에 의지해 파리 곳곳을 뒤지는 그는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자신이 다녔(다고 들었)던 학교가 문을 닫았음에 실망하고, 끝끝내 애인 드니즈의 행방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기억의 파편들을 하나둘씩 손에 쥐게 되면서 자신의 이름과 친구들의 이름, 무엇보다 오래된 감정과 재회한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삶의 덧없음과 성스러움, 둘 모두에 대한 충전한 인식이라는 모순 위에서..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김남주 옮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2008 "'오늘 6시에 플레옐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시몽에게서 온 편지였다.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구절이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그것은 열일곱 살 무렵 남자아이들에게서 받곤 했던 그런 종류의 질문이었다. 분명 그 후에도 그런 질문을 받았겠지만 대답 같은 걸 한 적은 없었다. 이런 상황, 삶의 이런 단계에서 누가 대답을 기대하겠는가?"(59) 서른 아홉 살의 폴은 외롭고, 로제는 작고 남성적인 자유에 취해 폴을 봐주지 않으며, 스물 다섯 살의 시몽은 연민과 욕망에 휩싸여 폴과 사랑에 빠진다. 그런 시몽은 잘생겼고, 맹목적일 정도로 순진무구하며, 결..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김이섭 옮김, ⟪수레바퀴 아래서⟫, 민음사, 2001 "학교 선생은 자기가 맡은 반에 한 명의 천재보다는 차라리 여러 명의 멍청이들이 들어오기를 바라게 마련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선생에게 주어진 과제는 무절제한 인간이 아닌, 라틴어나 산수에 뛰어나고, 성실하며 정직한 인간을 키워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더 상대방 때문에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게 되는가! 선생이 학생 때문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학생이 선생 때문인가! 그리고 누가 더 상대방을 억누르고, 괴롭히는가! 또한 누가 상대방의 인생과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더럽히는가!"(142, 강조는 필자) 마을의 수재였던 소년이 모두의 기대를 받으며 엘리트 신학도로서의 길에 오르지만, 신경이 쇠약해진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