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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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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9권 마르셀 프루스트, 김희영 옮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9권, 민음사, 2020, 모든 강조는 필자. 알베르틴에 대한 마르셀의 사랑은 그녀가 다른 여성 혹은 남성과 성적으로 얽힐까 봐 전전긍긍해 하는 불안에 의해 지탱된다. 그러나 마르셀이 아무리 앙드레와 운전사를 감시자로 말하자면 고용하여 알베르틴에게 보낸다고 할지라도 그녀의 모든 사생활을 파악하고 통제하는 일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저 불안은 말소될 수 없고, 무한히 증강하는 성격을 띠게 된다. "배신의 가능성"으로부터 오는 저 끝없는 불안감으로부터 마르셀은 고통을 경험하지만, 그 고통만이 역설적으로 알베르틴에 대한 그의 애정을 지속시킨다(172). "나는 고뇌를 멈추든가 사랑을 멈추든가 선택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욕망으로 형성된 사랑..
안윤, <남겨진 이름들> 안윤, ⟪남겨진 이름들⟫, 문학동네, 2022. 인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나 따뜻해서 작가를 동경하게 되는 소설들이 있다. ⟪남겨진 이름들⟫은 아주 느린 속도로 한 간호사의 삶, 그녀가 간병하는 여자의 삶, 그리고 그 여자의 남편의 삶을 응시한다. 그 셋은 희망의 달인들이다. 주어진 삶의 과제들에 묵묵히 응하고, 햇살과 과일 그리고 주변인의 온기로부터 그 어떤 쾌락과도 비교할 수 없이 값진 행복을 찾아낸다. 좋은 삶이란 절망을 피해가는 데 성공한 삶이기보다 절망 앞에서 포기하지 않는 삶임을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절실하게 주장하고, 또 읽는 이에게 설득해내는 데 성공한다.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사, 2016. 슬픔을 쏟아내기에 바쁜 시들, 한없이 우울한 귀결로 치닫는 시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 희망도 없는 새드 엔딩은 아무리 사실적으로 보일지언정 놀랍게도 비현실적이고, 그렇기에 무책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추천 받거나 선물 받았던 시집들 몇 권에 대해, 그것들이 매우 인기있는 시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좋지 않은 평을 남겼었다. 그런데 허수경의 시들은 슬프고 우울한데도 불구하고 나를 사로잡았다. 시어들이 평이하되 아름답게 조합되어 있어서였을까? 운율 덕분이었을까? 곰곰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그녀의 시 속 애수는 자폐적인 것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와서 타인에게로 흘러가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허수경 시의 화자들은 자신..
배수아, <양의 첫눈> 및 <올빼미>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앙드레 지드, <반도덕주의자> 앙드레 지드, 동성식 옮김, ⟪반도덕주의자(L'immoraliste)⟫, 민음사, 2017, 모든 강조는 필자. 남편 미셸의 병이 낫고 생명력이 고양되는 가운데 아내 마르슬린의 병은 악화되어가는 서사를 기둥으로 갖는 이야기이다. 미셸은 건강해져감과 동시에 마르슬린의 표현을 빌리면 약자를 말살하는 반도덕주의를 개진해나간다. 하지만 정작 그 주의가 아내를 죽음으로 몰아가자 무력감과 허무주의에 빠져든다. 제목에 걸맞게 조금 더 뻔뻔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몰개성을 도덕으로 치부하는 사회를 삐딱하게 생각하는 메날크라는 인물만큼은 매우 좋았다. "처음에 나는 어떤 소설가나 시인 들에게서 삶에 대한 좀 더 직접적인 이해를 발견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이해가 있었다 해도, 솔직히 말해..
유희경,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 유희경,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 아침달, 2018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나의 몰락을 아주 구체적으로 상상해보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광기라면 광기다. 심리학에서는 '파국화'라는 딱딱한 용어로 부르곤 하는데 실제로도 아무 낭만 없는 불안의 난장판이 전부다. 나의 몽상은 특히 생리 직전에 심해지며 간혹 가다가는 침대를 벗어나기가 매우 힘들어지고 내가 나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리 없다는 생각에 누군가 아버지 같은 존재가 나타나, 나를 지켜줬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게 된다. 그러나 족히 몇 년은 반복된 일이며, 생리는 여성인 나에게 세계 행정의 일부로서 다달이 찾아오기 때문에 나에게도 나름의 대응체계가 마련되어있다. 이제는 몽상으로 인해 일상이 지장은 받아도 중단되지는 않는다. 내가 고안하는 데..
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 토마스 만, 홍성광 옮김, ⟪토니오 크뢰거⟫, 열린 책들, 2021. 진실하고 인간적인 감정 일체로부터 스스로가 유리되었음을 느끼고, 단지 시민 크뢰거가 되기를 꿈꾸는 시인 토니오. 시인은 이를테면 사랑 자체가 아니라 사랑에 대한 인식을 추구하느라, 단순하고 소박한 실재의 세계를 떠나 끝없는 사색에 지치게 만드는 정신의 자장 속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질서 잡힌 생활을 동경하는 예술가가 세상에 대해 쏟아내는 질투를 설득력 있게 그려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생활인들은 토니오의 삶을 동경할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고 만다. 그럼에도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꼭 읽어보고 싶게 되었다. 가장 좋았던 대목. "관능에 대한 혐오감과 증오심에 사로잡혀 순수함과 품위 있는 평화를 갈구하는 동안에도 그는 예술적인 ..
하성란, <크리스마스 캐럴> 하성란, ⟪크리스마스 캐럴⟫, 현대문학, 2019. 단숨에, 하루만에 읽어내렸다. 흡입력이 좋은 소설이다. 거의 문 닫은 것이나 다름 없는, 버섯 모양 지붕이 있는 리조트에 혼자 묵게 되는 여자가 낯선 곳에서 느끼는 모호한 공포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공간을 활용하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최은미 작가의 ⟪운내⟫가 떠오르기도 했다. 나도 언젠가 이런 헤테로토피아를 만들어볼 수 있을까. (단, 1부와 2부 사이의 단절은 조금 아쉬웠다. 그 자체로 완결성이 있는 2부와 달리, 1부는 2부의 도입을 위해 억지로 만들어진 느낌이다. 2부만 따로 중편소설화되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