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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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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 <불온한 검은 피> 허연, ⟪불온한 검은 피⟫, 민음사, 2014. 마치 여러 편의 느와르 영화들을 연속으로 시청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시집이다. 가난한 집에서 자란 남자들이, 언젠가는 서로 끌어안았음에 분명한데도 미친 듯이 싸우면서 피를 흘림으로써만, 죽어감으로써만 자신의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그들은 자신의 애인을 사랑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그녀들에게 소홀하기도 하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사랑에 자신의 전부를 바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맞닥뜨리고는 욕설을 뱉으며 사라진다. 이별의 아픔은 시간이 흘러 그것을 홀로 곱씹을 때 비로소 생생하게 느껴진다. "합성 인간의 그것처럼 내 사랑은 내 입맛은 어젯밤에 죽도록 사랑하고 오늘 아침엔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것 살기 같은 것 팔 하나 다리 하나 없이 지겹도록 솟구치는 것 // 불온..
임성순, <우로보로스> 그리고 포스트휴머니즘 임성순, ⟪우로보로스⟫, 민음사, 2018 기계-인간과 인간-기계 사이 “지도야말로 지배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O, 126).” 1. 들어가며 임성순의 장편소설 『우로보로스(2018, 민음사)』는 인공지능과 가상현실이 인간의 삶 속 깊숙이 침투해있는 시대를 그린다. 작중에서 이 시대는 인공지능의 능력이 인간의 능력을 추월한 ‘특이점’ 이후의 세상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또한 인간이 만물의 운명을 좌우하는 인류세(anthropocene)로부터 벗어난 그 이후의 세계이기도 하다. 더 구체적으로 서사를 이끄는 주요 행위자들이 인간이 아니거나, 자신의 인간됨을 부끄러워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휴머니즘 담론으로는 이 탈-인류세(post-anthropocene)의 세계를 읽어낼 수 없다. 이제 우리에게는 이 문자 그대로..
허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사드(Marquis de Sade), <미덕의 불운>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하인리히 뵐,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인리히 뵐, 홍성광 옮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Und Sagte Kein Einziges Wort)⟫, 열린 책들, 2011. 1952년, 가난한 중년 부부의 하룻밤. 독일의. 흔히 사랑은 명랑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표상된다. 무엇보다도 삶에 희망을 가져다주는 감정으로서 꿈꾸어진다. 그러나 사랑이 가난과 만나면 도리어 절망의 근원이 된다. 프레드 보그너와 캐테 보그너는 서로를 끔찍하게 사랑하기 때문에 더욱 괴롭다. 그들은 단칸방에서 세 명의 아이들과 함께 살다가, 프레드가 아이들을 때리기 시작하자 별거를 감행한다. 프레드가 아이들을 때리는 것은 노동에 지쳐 집에서라도 휴식을 취하려 하지만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때문에 그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들을 때리자마자 죄책감에 시달려 그들이 우..
배수아,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배수아,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난다, 2015. 배수아의 장편소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페이지가 '알타이의 목동처럼'이란 표현을 포함한다는 이유만으로 이 책을 구매했을 때, 나는 내가 이전엔 단 한 번도 여행기를 사서 읽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는 전형적인 여행기가 아닌 것으로 치자.) 직접 여행을 가기 전 실용적인 정보가 담긴 가이드북은 몇 권 구매했었지만, 일반적으로 타인이 여행에 가서 무엇을 느끼는지에 대해 별다른 관심 없이 살아왔던 것 같다. 다만 이번에는 그 타인이 내가 동경하는 작가였을 뿐이다. 그 동경을 계기로 스스로에게 묻게 됐다. 좋은 여행기의 기준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매우 애매하고 역설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믿는다. 좋은 여행기는 독자..
이탈로 칼비노, <반쪼가리 자작> 이탈로 칼비노, 이현경 옮김, ⟪반쪼가리 자작⟫, 민음사, 2014 (표지 디자인이 완벽하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의 원숙함은 아직 엿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칼비노의 젊음 그리고 좌파 지식인으로서의 정치적 고뇌와 연결지어 생각할 경우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수작이다. ⟪반쪼가리 자작⟫은 시작부터 풍자로 가득한 어른용 동화다. 사춘기의 문턱에 다가선 어느 소년의 시선에서 그가 속해있는 테랄바 가문의 자작의 굴곡진--문자 그대로 반토막난--생을 담고 있다. 메다르도 자작은 전쟁에 대한 별다른 두려움도 없이 호기롭게 십자군들의 전장에 나갔다가 정면으로 대포를 맞고는 몸의 반쪽을 잃는다. 반쪼가리가 된 자작은 공교롭게도 마치 하이드처럼 인간의 악만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의 본성을 따라 자작은..
페터 한트케, <어느 작가의 오후> 페터 한트케, 홍성광 옮김, ⟪어느 작가의 오후⟫, 열린 책들, 2010 '작가'라는 직업에 로망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가진 로망은, 모든 로망이 그렇듯 키치하지만 다음과 같다. 작가는 여유롭게 늦잠을 잔 뒤, 옥색의 커튼 사이로 서서히 드세지기를 준비하는 햇빛을 느끼며 하루의 첫 숨을 고른다. 기지개를 편 뒤 침실을 나서면 부엌에서는 이미 함께 사는 동료 작가, 또는 동료 철학자, 또는 애인이 아침 겸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나는 오전엔 식욕이 왕성한 편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먹는 부어스트를 한 덩이 그리고 오렌지를 두 슬라이스 뺏어먹는 것으로 만족한다. 잘근잘근 먹을 것을 씹으며 나는 주위를 둘러본다. 좁지만 아늑한 공간에 가구들이 정확히 자신들이 있어야 할 곳에 안정감 있게 붙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