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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허연, <불온한 검은 피>

허연, ⟪불온한 검은 피⟫, 민음사, 2014.

 마치 여러 편의 느와르 영화들을 연속으로 시청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시집이다. 가난한 집에서 자란 남자들이, 언젠가는 서로 끌어안았음에 분명한데도 미친 듯이 싸우면서 피를 흘림으로써만, 죽어감으로써만 자신의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그들은 자신의 애인을 사랑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그녀들에게 소홀하기도 하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사랑에 자신의 전부를 바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맞닥뜨리고는 욕설을 뱉으며 사라진다. 이별의 아픔은 시간이 흘러 그것을 홀로 곱씹을 때 비로소 생생하게 느껴진다. 

"합성 인간의 그것처럼 내 사랑은 내 입맛은 어젯밤에 죽도록 사랑하고 오늘 아침엔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것 살기 같은 것 팔 하나 다리 하나 없이 지겹도록 솟구치는 것 // 불온한 검은 피, 내 사랑은 천국이 아닐 것('내 사랑은', 82)"
"[...]그대는 아는지 자취방에 누워서야 떠오르던 자꾸만 멀어지던 너무나 당연한 사랑의 방법들을. [...] 이제 그만 장미와 안개를 섞은 내 사랑은 꿈속에도 없을 것('나를 가두지 마', 80)"
"바람 한가운데 / 섬처럼 서 있다가 / 지나는 자동차와 눈이 마주치면 / 그냥 웃어 보이려고 한다 / 돌아오는 길엔 / 공중전화에 동전을 넣고 / 수첩을 뒤적거리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 싱거운 취객이 되고 싶다 / 붐비는 시간을 피해 / 늦은 지하철역에서 / 가슴 한쪽을 두드리려고 한다 / 그대가 전부가 아닌 나를 / 사는 일에 소홀한 나를 / 그곳에 남겨 놓으려고 한다('저녁, 가슴 한쪽', 66-67)"

 

 어쩌면 이 모든 과오 또는 서투름, 그리고 그에 따르는 고통은 어린 시절 가족의 사랑이 부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한한 결핍에 대한 자기의식이 시집 전체를 관통한다. 시적 화자는 늘 철로변에서 어머니를 기다린다. 반면 아버지는 어머니를 자식에게서 밀어내는, 가정으로부터 주변화시키는 폭력적인 존재로 표상된다. 지극히 전형적이어서 불쾌한 지점도 있지만 익숙한 서사만이 능숙하게 전달할 수 있는 감정들도 있다고, 자비롭게 해석하려 한다.

"우리는 늘 그리워했으므로 / 그리움이 뭔지 몰랐고('그 거리에선 어떤 구두도 발에 맞지 않았다', 59)"
"점심때 기차역엔 낯선 사람들이 많이 / 내렸다는데 / 오늘도 엄마는 / 오지 않았다 소년은 풀이 죽었다('그해 폭설', 98)"

 

 그리고 이 모든 사정들의 배경엔 비가 있다. 오죽하면 가장 첫 번째로 실린 시의 제목도 '지옥에서 듣는 빗소리'다. 비는 남자를 춥게 만들고, 남자로 하여금 은신처를 찾아 헤매게 만들며, 가난과 이별과 결핍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동시에 비는 희망의 전달체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마치 깃털이 젖듯 손쉽게 파괴될 때, 그 파괴 이후의 폐허를 재건 가능한 진공으로 상상하는 능력이야말로 희망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여름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칠월', 76-77)"
"그날 새벽 팔색조의 깃털 같은 세상으로 비가 내렸고 사라진 이름들을 불러 대는 건 내가 아니라 한기 같은 빗소리였습니다. 이내 섞여 길이 되어 버리는('별곡 1', 71)"

 

 늘 이야기하지만 나는 좋은 시와 나쁜 시를 구별할 심미안도 멋진 비평문을 써낼 재간도 없다. 그러나 허연의 시가 내 취향에 맞는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나는 이해할 수 있는 시가 좋다. 난해한 구절이 없어야 한다는 뜻도, 해석의 다양성이 제한돼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그처럼, 낯선 언어로 쓰였기 때문에 오히려 사태 자체로 직행하는, 독자로 하여금 모든 것을 한 번 더 곱씹게 하는, 나아가 언어의 한계를 언어로써 뛰어넘는 기적을 목도하게 하는 소위 '어려운' 구절은 한 시 내에 한두 개, 최대 세 개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나머지 구절들은 비범한 기적의 포석으로 평범하게 이용되어도 좋은 것이다. 오히려 그 경우에 비로소 기적이 기적다운 것으로서 정확하게 인식된다.

 또 나는 형식적인 언어실험보다 내용의 깊이와 밀도가 중시되는 시가 좋다. 이것은 내가 시를 읽는 목적과 유관하다. 나는 서사에 대한 갈망이 지독한 와중에 소설을 읽을 현실적인 여유가 없을 때 시를 읽는다. 시집은 끊겨서 쓰인 만큼 끊어 읽을 수 있고 끊어 읽도록 편집돼 있기 때문이다. 시 자체의 고유한 지위에는 몰지각한, 소설보다 시를 열위에 놓는 태도로 비춰질 수 있겠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다. 우선 어떤 태도로 읽든지 간에 아예 안 읽는 것보다는 낫고, 시에 대한 나의 취향이 바른 것이든 그릇된 것이든지 간에 나는 앞으로도 내 나름의 방식으로 시를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소설과 무관한 동기로 시를 향유하는 날이 올 것이며, 그때는 내 취향을 이렇게 방어적으로 소개할 필요도 사라지겠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구절을 소개하며 장황했던 감상문을 마친다.

"결국 오늘도 / 꿈이 피를 말린다 / 그 꿈이 나한테 이럴 수가('목요일',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