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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오에 겐자부로, <개인적인 체험>

오에 겐자부로, 서은혜 옮김, ⟪개인적인 체험⟫, 을유문화사, 2020

 

 용모뿐 아니라 마음까지 새를 닮아버린. 그래서 무거운 책임은 질 줄 모르는 남자 버드의 생활 며칠이 그려진다.

 버드는 아직 스물일곱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체력은 이미 마흔 살의 그것이나 다름없다. 아내와는 희미하다 못해 곧 끊어질 듯한 유대감만을 가졌으며, 그도 그럴 것이 심약한 데다 늘 최악만을 생각하는 비관주의자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첫 아이가 머리에 거대한 혹을 매달고 태어났음을 알게 되자 아내 몰래 아이의 죽음을 바라고 점점 적극적으로 그것을 사주하게 된다. 신생아에게 분유 대신 설탕물이 제공되도록 의사에게 부탁하기도 하고, 아이가 쇠약사했다는 소식을 듣기 위해 전화 벨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손을 곧잘 더럽혀온 의사에게 직접 아이를 맡기기 직전까지 간다. 그러면서도 버드는 수치심과 자기혐오로 몹시 괴로워한다. 자신이 처하게 된, 아무도 이해할 수 없으리라 저 홀로 단정 지은 이 '개인적인 체험'을 견디기 위해 그는 한때 대학을 함께 다녔던 히미코를 찾아가 함께 술을 마시고 몸을 섞으며 영혼의 도피처를 찾는다.

 "그는 자신이 아기의 죽음 쪽에 걸었다고 하는 사실을 의식의 표면에 확실히 고정시켰다. 그는 지금 자기 아기의 진짜 적, 생애 최초이자 최대의 적이었다."(177)
 "수술이 가능해지기 전에 쇠약해져서 죽는다. 다시 말하자면 수술 후의 식물인간 아기를 끌어안을 일도 없고, 또 자기 손을 더럽혀 갓난이를 죽일 것도 없고, 그저 아기가 근대적인 병실에서 청결하게 쇠약사하는 것을 기다린다. 더구나 그동안 아기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것이 버드가 할 일이다. [...] 깊고 어두운 수치심의 감각이 되살아나서 그에게 온몸이 굳어지는 듯한 기분을 맛보게 했다."(157)

 

 버드가 악의와 수치심 사이에서 동요하는 사이, 히미코는 어느새 아프리카에 가겠다는 버드의 오랜 꿈을 자신의 꿈으로 내면화한다. 그녀는 여러 남자들과의 섹스를 통해 최대한 다양하고 '제뉴인'한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 그리고 밤마다 중고 스포츠카를 타고 위험한 속도로 드라이빙을 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목적도 루틴도 없던 자신의 생활을 청산하고 버드와 함께 아프리카로 도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아이의 죽음을 함께 방조했다는, 자기 손으로도 아이를 죽였다는 죄를 짊어지겠다는 결심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실제로 아이를 죽여줄 의사에게 아이를 맡기고, 버드의 동창생이 운영하는 게이 바에서 위스키를 마시던 도중 버드는 며칠 간 자신의 행보가 모두 삶 앞에서의 도피이자 기만에 불과했음을 깨닫는다. 그는 그 즉시 히미코와 여행을 떠날 수 없겠다고 선언한다. 히미코는 그것을 슬프지만 차분하게 받아들인다. 그렇게 버드는 수술실로, 히미코는 버드보다도 더 어리숙한 남자와 아프리카로 떠나 서로 갈라서게 된다. 다행히 아기의 병은 뇌의 내용물이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 단순한 육종이었고, 수술이 무사히 끝나면서 소설 역시 끝을 맺게 된다.

 "여기서 버드는 그 길었던 하루의 첫 위스키를 한 모금 삼켰다. 몇 초 후 돌연 그의 몸 깊은 곳에서 실로 견고하고 거대한 무엇인가가 벌떡 일어섰다. 버드는 지금 막 위장으로 흘려보낸 위스키를 아무런 저항도 없이 토해 냈다. 기쿠히코는 재빨리 카운터를 닦아 내고 물컵을 내밀었지만, 버드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나는 아기 괴물에게서 수치스런 짓들을 무수히 거듭하여 도망치면서 도대체 무엇을 지키려 했던 것일까? 대체 어떤 나 자신을 지켜 내겠다고 시도한 것일까? 하고 버드는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기가 막혔다. 답은 제로였다."(269-270)
 "버드는 잠깐 눈을 감고 며칠 전 아프리카의 잔지바르 행 화물선을 탄 히미코 곁에 그 소년 같은 남자 대신 아기를 죽인 버드 자신이 서 있는 충분히 매혹적인 지옥도를 그려 보았다. 히미코의 이른바 또 다른 우주에서는 그런 현실이 전개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나서 버드는 그 자신이 선택한 이쪽 우주의 문제로 돌아오기 위해 눈을 뜨고 [...]"(275)

 

 이상이 많은 것을 생략한 이 소설의 줄거리다. 명암이 굉장히 뚜렷한 소설이라고 느꼈다. 좋은 이야기부터 하자면 오에 겐자부로의 비유와 묘사 능력은 가히 전설적이다. 그의 문학적인 재능을 의심하는 일은 불합리하다. 거기에 인생의 고통을 정면에서 받아들인다는 평생의 주제의식과 실제 삶에서의 정치적 행보가 더해져 1994년 그에게 노벨 문학상의 쾌거가 안겨졌던 것이리라. 개인적으로 오에 겐자부로의 문체는 나(의 무척이나 발전된 버전인 존재)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내 만연체, 수식과 구체화에의 과도한 욕망을 무조건적으로 억눌러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오에 겐자부로를 롤모델로 삼아서 미학적으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일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요즘 같은 시대에도 먹히는 문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지만.

 그러나 오에 겐자부로가 자신의 주제의식을 관철하는 방식은 윤리적인 시각에서 여러 모로 불편감을 자아낸다. 먼저 소설 내내 버드의 장애아는 흉측한 괴물로 비유되고 필연적인 비극의 원천으로 묘사된다. 물론 그것은 아직 책임감을 배우지 못한 버드의 시선에서 기술된,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체험'의 일부라는 맥락에서 자비롭게 독해될 여지가 있겠으나, 실제로 비슷한 장애를 가진 사람이나 그의 가족--설령 작가 자신이 그에 속할지라도--을 극단적으로 소외시키는 언어라고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눈치 보기 시작하면 한 자도 못 써' 식의 마인드는 특히 오늘날의 한국에선 구시대적인 것이다. 둘째로 ⟪만엔원년의 풋볼⟫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성의 성적 대상화, 그리고 남성 인물의 정신적 성장을 위해 여성이 이용되고 버려지는 서사가 한 번 더 몰입을 방해했다. ⟪만엔원년의 풋볼⟫에서는 지적 장애를 가진 여동생을 강간했던 다카시가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 위해 자살을 감행하는 선택이 '고통을 직면했다'는 이유로 미화된다. 사실 ⟪만엔원년의 풋볼⟫을 읽었을 당시엔 다카시의 만행이 알려지기 전 열한 챕터 정도가 정말이지 빈틈 하나 없이, 내 기준에서 완벽하게 전개된 데다가, 다카시의 자살이 소설에서 묘사된 대로 순수한 속죄행위에 해당할 경우 강간이 서사에 활용된 것을 어느 정도 자비롭게 보아줄 여지가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역시나 주인공 네도코로의 정신적 성장을 위해 다카시의 여동생이 희생되었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었지만, 적어도 강간이 비판적으로, 그에 대한 마땅한 속죄는 자살 자체 또는 그에 버금가는 것이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배경에 깔린 채, 다만 가해자의 시선에서 그려졌던 것이다. (가해자의 시선에서 강간이 문학적으로 묘사되는 일은 설령 그가 반성하는 상태라고 해도 결코 발생해선 안 된다는 주장도 물론 있을 것이고, 나는 그 주장에도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바다.) 그러나 ⟪개인적인 체험⟫에서는 히미코의 역할이 거의 섹스를 통해 방황하는 버드를 위로하는 것으로 지극히 제한되어있다. 심지어 그녀는 대학시절 버드에 의한 강간으로 처음 성을 경험했던 인물이다. 아무리 20대 후반에 접어든 히미코만큼은 버드와의 섹스를 즐기는 것으로 묘사되어있다고 해도, 그녀를 '버드와 지속적으로 성관계를 맺음' 그리고 '혐오스러운 버드를 끝없이 이해해줌' 외에는 별다른 정체성을 가지지 않는 인물로 평면화시켜버린 데 대해선 반발하지 않을 수 없다. 1960년대 일본 소설의 한계인 걸까? 왠지 ⟪노르웨이의 숲⟫의 미도리가 겹쳐보이기도 했다. 어째서 섹스를 즐기는 여자는 섹스만 즐기는 여자로 묘사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주체로 그려지는 일은 고무적이지만, 성욕이 왕성하고 그에 대해 솔직한 것 외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여성 인물은 남성 작가의 시선에서 가공된 것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페미니즘 비평을 하기 위해서는 어줍잖은 직관만으론 부족하고,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왔기에 이런 글을 쓰기란 내게 몹시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독자로서 자연스럽게 느꼈던 바들을 더듬어가며 당장의 솔직한 생각을 기록하기로 결심한다. 무한에 가까운 공부가 끝날 때까지 모든 비평을 미뤄야 한다면 나는 표현의 자유를 잃고 말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