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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아글라야 페터라니,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

아글라야 페터라니, 배수아 옮김,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Warum das Kind in der Polenta Kocht)⟫, 워크룸프레스, 2021.

 
 

 아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1인칭 소설을 쓴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아이는 많은 것을 경험해본 적이 없지만 많은 것을 경험해본 적이 있고, 살아가는 일에 대해 무덤덤한 듯 굴다가도 문득 생의 고통을 어른보다도 예민하게 느껴버린다. 가족을 증오하는 동시에 세상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섹스를 모르지만 또 알고 만다. 아이가 모르는 것과 아는 것, 모르지만 아는 것, 알지만 모르는 것을 자연스러운 언어 속에 녹여내야 한다. 이런 작업은 인위적인 공을 들인다고 해서 밀도와 완성도가 높아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경험이 필요하다. 어린시절에도 존재했던 내면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는 차우셰스쿠가 독재를 저지르던 시절의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가난한 고국을 탈출한 뒤, 서커스 곡예사들인 부모님 아래서 '서방세계'를 떠돌아다니던 페터라니의 자전적인 소설이다. 서사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주인공이 부모님과 함께 서커스를 다니던 유년기. 다음으로 숙박 비용이 부족해 언니와 단 둘이 종교시설로 보내진 시기. 마지막으로 부모님의 이혼과 어머니의 사고를 거쳐, 어린 나이에 성인을 위한 버라이어티 쇼 무대에 서면서 영화배우의 꿈을 키우(고 또 좌절하는) 사춘기. 그러나 토막난 단편들로 이루어진 이 책을 통일적인, 그럼에도 굉장히 완성도 높은 글로 만들어주는 것은 역동적인 서사보다 화자가 느끼는 정서의 깊이이다.

 I.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 열세 살 주인공의 아버지는 벌써 스크램블드 에그를 먹는 일에 익숙해졌지만, 그의 딸은 여전히 옥수수 가루를 죽이나 튀김으로 만든 음식인 폴렌타를 가장 좋아한다. "소금과 버터를 넣은 폴렌타. [...] 속을 채운 파프리카, 사워크림과 폴렌타. [...] 차가운 우유를 곁들인 따뜻한 폴렌타. [...] 염소 치즈를 넣은 폴렌타."(19-20) 폴렌타, 그리고 어머니가 호텔 욕조에서 몰래 도살해 요리하는 닭고기가 외국을 떠도는 그녀에게 자신의 뿌리를 알려준다. 그러나 그뿐이다. 그녀는 어디서든 명백한 외국인이다. 환경으로부터 소외되어있다는 정서와, 적응 비슷한 것을 하기도 전에 머물던 곳을 떠나게 만드는 삶의 가혹한 필연성, 그로 인한 타자와 세계에 대한 보편적인 불신은 소설 곳곳에 스며들어 결코 해소할 수 없을 것 같은 외로움의 냄새를 풍긴다. 그녀는 천국에 대해 상상할 때조차, 신이 외국어를 알아듣지 못할까 봐 "천사들이 작은 유리 칸막이 안에 앉아 통역해 주는"지 궁금해 한다(15).

 "우리 부모님은 [시설에] 오지 않는다. / 그들은 외국에 있다고 히츠 선생님이 말한다. / 그러나 여기도 외국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 얼마나 많은 외국이 있는 걸까?"(101, 강조는 원저자)
 "나는 집들의 위치, 거리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집들과 거리가 항상 철거되고 새로 세워진다는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147)

 

 하지만 고향에 대한 정서도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주인공은 루마니아로 돌아가길 희망하면서도, 고국의 참혹한 현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친척들이 보내오는 편지 속, 안부 전하기를 빙자해 생필품을 보내달라는 끊임없는 부탁은 어린 그녀에게조차 무거운 부담으로 다가온다. 주인공은 급기야 친척들의 편지에 답장하기를 거부한다.

 "루마니아의 아이들은 늙은 채 태어난다. 이미 어머니의 배 속에서부터 가난하고, 부모의 근심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 여기서 우리는 낙원에서처럼 산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더 젊게 만들지는 않는다."(41, 강조는 필자)
 "루마니아에서는 우리가 탈출한 후 부모님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 우리는 절대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그건 금지되어 있다. / 고향의 할머니는 슬픔과 그리움으로 죽었다. / 어머니는 여기가 뭐든 훨씬 낫다고 말하며 운다. 나는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우리가 남겨 두고 온 사람들은 우리가 부자가 되어 자신들도 여기로 데려와 주기를 바랄 것이다. 그들은 우리 모두를 사랑한다."(60-1, 강조는 필자)
  "하지만 나는 친척들의 이름을 모두 혼동해버린다."(75)

 

 그러므로 주인공은 서방세계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루마니아에 대해서도 진정한 향수를 느끼지 못한다. 역자 배수아는 이를 "이중의 소외"라는 표현으로써 적확하게 짚어낸다(213). 어디에도, 정말이지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감정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일까. 서커스의 화려함 이면에는 끝없는 유랑과, 투철한 직업정신으로서의 능동적 부적응이 자리한다.

 II. 소중한 이의 죽음에 대한 공포 이방인의 외로움만큼이나 짙게 배어있는 정서는 바로 곡예사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공포다. 그것은 '아이가 폴렌타 속에서 끓는' 근원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머리카락으로 천장에 매달리는 곡예를 펼치는 어머니가 추락할까 봐 공연 때마다 빠짐없이 무서워한다. 그때 주인공의 언니가 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어머니가 원형 천장에 머리카락으로 매달려 있는 동안 언니는 나를 진정시키려고 폴렌타 속에서 끓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폴렌타 속에서 끓는 아이가 얼마나 아플지 상상해보라고, 그러면 어머니가 언제라도 천장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불안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언니는 말한다."(38)

 

 위로의 의도로 건네기엔 상당히 끔찍한 이야기다. 주인공은 이 이야기를 듣고도 불안을 진정시키지 못한다. 하지만 꽤 오랫동안 폴렌타 속에서 끓는 아이를 생각한 듯 보인다. 나중에 소중한 강아지 밤비에게도 폴렌타 속에서 끓는 아이에 대해 말해주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을 폴렌타 속에서 끓는 아이와 동일시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그러나 밤비는 주인공의 실수로 죽게 되고, 그에 대한 죄책감은 그녀의 악몽이 된다. 그녀는 밤비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밤비의 시체를 상자 안에 넣어 냉장고 속에 보관한다.

 III. 서커스세계 바깥의 삶에 대한 갈망 어머니가 사고로 더 이상 공연을 하지 못하게 되자 그녀는 딸인 주인공에게 집착하기 시작한다. 이로써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그녀의 집념에 대한 공포로 뒤바뀐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미성년자인 딸이 알몸에 가깝게 공연하는 것을 기꺼이 허락한다. 책을 읽지 않도록 저지하며, 자신 대신 곡예를 부리고 공연을 열도록 주인공을 조종한다. 그렇게 주인공은 "공연마다 열네 번이나 무대에" 서고, "시즌 중에 [...] 장마다 행사장에서 하루에 여섯 번이나 공연한다."(186)

 "페피타는 내가 알몸으로 공연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므로, 다리 사이에 털이 달린 삼각형 천을 붙인다. 그건 어머니의 아이디어다. [...] 어머니는 예전에 자신의 의상을 직접 재봉질해 만들었던 것처럼, 내 의상을 만들어준다."(153)
 "나는 내 자식을 위해서만 살아요. 아이가 떠나 버리면 나는 죽어요! 루마니아의 가족은 항상 다 함께 지낸답니다. 얼마나 좋게요!"(170)
"어머니는 내 안에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한다. / 나는 사진 속 어머니를 닮았다. / 나는 나 없는 나와 같다."(187)

 

 그러나 주인공은 서커스 곡예사가 아닌 영화 배우가 되고 싶어 한다. 극중에서는 연기학교 입학 시험에 불합격하지만, 작가 페터라니의 실제 연보에는 합격했다는 문장이 적혀있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IV. 신에 대한 양가감정 주인공은 끊임없이 신과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그 덤덤한 어조로 인해 그녀가 실제로 천상과 지상의 지배자를 믿는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확실한 것은 그녀에게 신이 유능한 동시에 가차없으며 또 그 자신이 애수로 가득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녀가 버라이어티 쇼의 직전, 마리 미스트랄과 달리 성호를 긋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방인은 신조차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는 신 자신이 신뢰를 거부하고 불허하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신은 폴렌타를 먹는다. 신 자신이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다니는 외국인이다. 신은 슬프다. 이제 곧 다시 먼 길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202)

 


 한 자리에 앉아서 단숨에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렸다. 며칠동안 심적 내용 외재주의와 관련된 철학 백과사전 엔트리들만 눈알 빠지도록 찾아보다가 소설을 읽으니 숨통이 트인다. 언젠가 소설가가 된다면 가끔씩 읽는 철학서가 도리어 내 발코니가 돼줄까? 하지만 평생 등단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아주 설득력 있는 생각을 되뇌다 보면 속이 메스껍다.

 그러나 등단에 성공하든, 성공하지 않든 나는 평생 소설을 읽고 쓸 것이다. 이런 결심에 도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비록 한국의 문학인으로 등재되지 못할지라도, 그 자체로 문학적인 존재는 이미 된 것이라고 자위하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