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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7 Ce n'est pas des sushis 모든 일은 아니어도 많은 일이 잘 풀려간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이 일치한다는 감각을 매일 느낄 수 있어 감사하다. 행복을 자랑하는 일은 쑥스럽지만, 나누면 두 배가 된다는 생각으로 끼적인다. 2월 중순에 본 프랑스어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평균보다 30점 높았음을 생각하면 유럽 친구들 사이에서 꽤나 잘 본 셈이다. 무엇보다 공부를 충분히 해두고 나니 강의를 따라가기가 수월해져서, 프랑스어 수업 시간이 너무 재미있다. 그래도 역시 재미의 핵심은 리디아 그리고 훌리안과 소곤소곤 수다 떠는 데 있다. 오늘은 'Je vais acheter du pain'을 고통 사러 간다고 번역하면서 낄낄거렸다. 리디아와는 깨어 있는 거의 모든 시간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메시지의 대부분이 헛소리와 드립인데, 덕분에..
2024년 2월의 독서 1. Van Hooft, Stan. (2006). Understanding Virtue Ethics, Routledge. 덕 윤리를 의무론과 스무 가지 정도 되는 기준에 의거해 대비시키는 1장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를 요약한 2장을 읽었다. 학부생도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쓰여있고 내용도 실하다. 다만 인용이 그다지 철저하지 못해 아쉬웠다. 2. Crisp R. & Slote M. (Ed). (1997). Virtue Ethics, Oxford University Press. 보석 같은 논문들만 들어간 책이다. Anscombe과 Stocker의 글을 골라 읽었다. 인트로덕션에는 얼마 전 읽은 ⟪선의 군림⟫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칸트적 자유의지관은 외부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
20240215 희망 반 절망 반 프랑스어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공부해야 할 범위가 넓다 보니 어차피 모든 것을 마스터하고 시험장에 들어갈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오히려 마음이 여유롭다. 시험을 앞두고 긴장하거나 결과를 걱정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다. 잘 보면 잘 보는 대로, 못 보면 못 보는 대로 괜찮을 것 같다. 어떻게 되든 공부하는 동안 즐거웠으니 그것으로 됐다. 외국어를 공부하는 행위는 내 자의가 끼어들 수 없는, 나에게 순수하게 외부적인 권위를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머독이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확실히 철학 공부와 다르게 외국어 공부는 창의성보다는 끈기를 요구한다. 법칙이 보이지 않더라도, 예외가 난무하더라도 인내심과 호기심을 잃지 않고 문법이든 어휘든 끈덕지게 암기해내는 것이 관건이다. 처음엔 끝이 없어 보여도 외우고..
2 다섯 시면 해가 져버리는 데다 해가 떠있어도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날씨를 보상하기 위해 도시 전체가 조명을 휘감았다. 다른 도시에 가도 마찬가지다. 주황색 불빛 아래를 걸어 식당과 마트, 무엇보다 세탁방에 도착한다. 열흘에 한 번 세탁방 안에 가만히 앉아있는 일이 주는 위안은 크다. 세탁방 안에서 당신은 스스로를 정당화할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당신의 목적은 세탁뿐이고, 그 일은 군말없이 물을 뿜고 세제를 삼키는 기계들이 대신하고 있다.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순간 당신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세탁--을 반드시 완수하게 된다. 실수가 끼어들 틈도 거의 없다. 필연적인 성공을 느긋하게 기다리는 당신은 책을 읽어도 좋고,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셔도 좋으며 어떤 이유에서인지 세탁기보..
1 유학일기 같은 것을 정기적으로 쓰고 싶다는 생각에 새 카테고리를 파게 되었다. 서울대입구역 3번 출구 근처에 내가 정말 좋아하는 분위기의 술집이 있다. 지난 해 봄에 쓴 ⟪바다 망령의 숨⟫에서 주인공이 모르는 남자와의 사랑에 마음을 의지하려다 그와 같은 행위의 절대적 무의미함을 깨닫고 관둔 술집의 이미지는 그곳에서 따왔다. 철학과의 동료이자 친구들을 그곳으로 이끌고 갈 때마다 나는 그곳이 혁명을 모의하기 좋을 만큼 음습해서 맘에 든다고 말하곤 했다. 저녁에 들어가 새벽까지 머무르기도 하고, 타임킬링에 불과했던 수다에서부터 진지한 대화까지 모두 나눌 수 있었던 곳으로, 내 대학원 생활을 한 개의 장면으로 집약해야만 한다면 그곳 구석의 이미지를 나는 택할 것이다. 어느 날의 새벽, 그곳에서 술을 마시다 내가..
후설과 머독에 대한 메모 명증에 기반한 후설의 행복론이 현실(reality)의 직시를 중시하는 머독의 윤리학과 상통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던 중 그래도 두 철학 사이의 차이들에 대해서 역시 민감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유하는 생각들을 언젠가 체계적인 글로 옮겨 투고하고 싶다. 우선 이번 학기에 제출할 페이퍼에 각주로 넣어볼 수 있을 것 같다. '[]' 속의 언명은 나의 해석이 짙게 들어간 부분들. ① 후설에게 윤리적 쇄신(renewal, Erneuerung)을 담당하는 기관은 의지, 구체적으로 말해 자신이 절대적으로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바를 일관적으로 따르고자 자유롭게 스스로를 규정하는 의지이다(see Cavallaro & Heffernan 2019:365). 반면 ⟪선의 군림⟫ 속 머독에게 의지, 더욱이 자유로운 의지란 [..
에드문트 후설, ⟪프롤레고메나⟫ 서론, 1장 요약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20231124 십일월 힘겨운 한 달이었다. 매일 같이 내리는 비를 보며 울적함을 넘어 우울했고, 담배를 끊었음에도 불구하고 호흡 곤란과 흉통이 느닷없이 찾아와 일상을 괴롭게 만들었다. 어느 밤에는 내게 남아있는 미래의 나날들 가운데 단 하루도 행복한 날이 없을 것만 같아 엉엉 울기도 했다. 잠을 도피처로 삼아 매일 열두 시간 이상을 잤는데, 그러다 깨어나면 반드시 두통에 시달렸다. 금요일마다 읽는 ⟪선의 군림⟫이 그래도 희망이 되어줬다. 자아의 환상과 도취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정의롭고 사랑 가득한 눈길로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네 주의를 돌려야 한다는 머독의 주장에 종종 울컥했다. 리딩 그룹 사람들과 함께하는 점심식사도 나를 불행에서 꺼내준다. 커리 한 그릇에 5유로밖에 받지 않는 태국 음식점에 항상 가는데,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