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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손 나름의 의지 어렸을 때 하농이 너무 싫어서 한 번만 치고도 포도송이 세 알 채우고 그랬는데 뒤늦게 후회가 된다. 후설이 피아노를 쳤더라면 절대 스스로 의지하는 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운동감각의 모토로 잡지는 않았을 것이다. 머리로 알고 바라는 것을 건반 위에서만큼은 도저히 손이 못 따라간다. 손으로 이미 건반을 치고 있는 와중 ‘곧 새끼 손가락으로 다음 음을 쳐야지’ 따위의 생각을 삽입할 수는 없다. 그런 생각에 의식을 할당했다가는 박자를 놓치기 때문에 정신이 아니라 무조건 손만으로 익혀서 넘겨야 하는 구간들이 있다. 그렇다면 중간에 말고 사전에라도 음을 숙지하면 되겠지? 같은 생각도 안 통한다. 아무리 사전에 머릿속으로 되뇌고, 원하고, 의지하고 무슨 거창한 마음을 먹든 내게 어려움을 안겨주는 음을 ..
Preyssac 2025년 6월 초의 기록. 어쩌다 보니 미유키네 할머니 데데의 집에 와서 지내게 됐다. 파리에서 인파에 떠밀려 모나리자의 정수리를 본 것이나, 꺄시의 유명한 만들을 구경한 것이나 모두 소중한 경험이었지만 데데 할머니네 집은 내 마음대로 올 수 없는 곳이기에 더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정원과 1층, 2층, 그리고 다락으로 이루어진 이 집은 1806년에 누런 돌로 지어졌다. 모든 창문은 하늘과 똑같은 파랑 색으로 최근에 다시 칠해졌다고 한다. 원래는 초록색이었다고 들었다. 정원에서는 야생 딸기가 하찮은 크기로 한껏 자라나 그 자리에서 바로 따먹을 수 있다. 도시에서는 알려고 해봐야 알 수가 없는 시큼함, 약간의 텁텁함이 느껴지지만 삼킨 뒤에도 입안에 불순한 단내가 남는다. 체리와 자두, 배, 포도 등도 ..
20250614 병리화와 낭만화 사이 5일 간의 현상학적 정신병리학 학회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코딱지만하지만 그래서 더 아늑한 공항에서 역시나 코딱지만할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코딱지 얘기에 이어서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면세 코너에서 맛있어 보이는 엄브리아산 와인, 향신료, 초콜릿 등을 지나쳤다. 결국에는 ‘포켓 커피’를 두 개 집어오는 것 정도로 만족했다. 페레로 로쉐를 만든 회사의 제품인데, 초콜릿 속에 에스프레소 한 개가 통으로 들어있다고 한다. 커피를 마시기는 해야겠는데 너무 바쁠 때 부시럭부시럭 꺼내 먹으면 좋겠지? 하나는 내가 없는 동안 내 식물 론 위즐리를 보살펴준 루난에게, 다른 하나는 한국에 돌아가면 애인에게 주려고 한다. 모든 것을 기억할 필요는 없지만, 기억하면 좋을 생각들을 많이 통과했다. 우선 소위 ‘해..
아이리스 머독, <도덕 속 시선과 선택> 요약 Iris Murdoch, 'Vision and Choice in Morality' in Existentialists and Mystics: Writings on Philosophy and Literature (ed. by Peter Conradi), London: Chatto & Windus, 1997, pp. 76-98."대강 무어(G. E. Moore) 이후로, 우리가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을 서로 구별할 수 있다고 가정되어왔다. [바로] '내가 따를 도덕(my morality)은 무엇인가?'와 '도덕 그 자체(morality as such)란 무엇인가?' [사이의 구별이다. 윤리학과 메타윤리학 사이] 이 구별에 대한 최초의 열광의 시기가 지난 후, 윤리학은 서서히 그것을 덜 자명한(simple) ..
9 자아는 세계를 지각하고 지각되지 않는 바는 재현하거나 상상하는 구성의 중심이지만, 구성의 과정에서 세계의 실상을 어떤 식으로든 변형시키고 만다. 그리하여 모든 풍경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아가 있음으로써만 비로소 그 풍경이 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자아가 없을 때만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에드문트 후설과 시몬 베유의 철학 사이의 긴장이 여기에 있다. 전자는 자아를 세계로 하여금 의미와 진실을 담지할 수 있게 해주는 조건으로, 후자는 자아를 폭력의 원천으로서 신과 세계의 진실 사이 소통을 방해하는 방해물로 이해한다. 한 개의 화산, 아니 한 톨의 화산재를 위해 나는 사라져야 하는가? "정화란 좋음과 탐욕 사이의 분리이다(La purification est la séparation du bien et de..
2025년 4-5월의 독서 1. 에밀리 카스파, ⟪명령에 따랐을 뿐!?⟫, 동아시아, 2025. 카스파에 따르면 (전적으로 자발적으로 행위를 규정할 수 있는 경우에 비해) x 또는 y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명령이 내려질 경우 뇌의 특정 부분의 활동이 유의미한 수준으로 둔화돼 행위자성이 생물학적으로 약화된다. 대중서이지만 전문적인 지식을 깊이와 명료도 모두를 갖춰 담고 있다. 다만 제노사이드의 가해자 집단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를 자료로 활용하고 있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읽기가 힘에 부친다. 그들을 이해하기만 하고 정당화는 결코 하지 않으려는 저자의 고군분투를 읽어낼 수 있는데, 아주 깨끗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는 것 같다. 죽이지 않으면 당신을 죽이겠다고 말하는 정권 하에서* 인간의 양심이 과연 어디까지 살아있기..
20250429 바질 먹을 자격 쉽게 잠 들고 한 번 잠에 들면 꿈도 없이, 마치 새벽이 존재하지 않는 양 잠에 빠져드는 나날들. 전반적으로 기쁘고, 때로는 (이를테면 햇볕을 맞을 때, 브로콜리 따위를 데쳐 먹을 때) 황홀해진다. 그리고 고통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외롭다. 부스스한 머리칼로 아홉 시쯤 일어나, 아침을 먹는 동시에 정신없이 점심 도시락을 싸는 내 오전을 이루는 모든 몸짓과, 몸짓이 표현하는 행위, 행위가 표현하는 기획, 기획이 표현하는 가치관 모두에 대해 몇 자씩 적고 싶지만, 나의 모든 것을 적어내야 한다는 생각조차 저 외로움의 발로이며, 무엇보다도 은밀한 나르시시즘이라는 생각이 나를 막아선다. 나르시시즘: 자주 자기지시의 충동—‘내가’ 무엇을 하고 있다, ‘내’ 의견이 어떠어떠하다, 라고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인다는..
20250406 시간이 마치 별빛 흐르듯 봄날의 햇살, 꽃, 식사. 자목련과 아네모네, 데이지, 벚꽃은 벌써 져버렸다. 동명이인인 언니들을 초대해 오픈 샌드위치를 대접했다. 과카몰레에 석류알, 구다 치즈에 연어, 고르곤졸라 치즈에 구운 바나나, 마지막으로 비트 훔무스에 소고기 안심을 올렸다. 의외로 손이 많이 갔고 장도 왕창 봐야 했지만 내가 그동안 받아온 정신적인 지지에 비하면 작기만 한 보답이었다. 그리고 더 많은 식사들. 필리핀 음식이라는 코코넛 우유 아도보, 닭갈비, 콩나물 해장국 등. 요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고 미각도 그다지 세련되지 않다 보니 그냥 혼자서 빠르게 먹을 수 있는 일품 요리가 대부분이지만, 레퍼토리를 늘려가는 재미가 있다. 다음 장 보는 사이클에서는 각 언니가 추천해준 연어 오챠즈케와 셀러리볶음에 도전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