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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현상학

에드문트 후설, ⟪프롤레고메나⟫ 서론, 1장 요약

Prolegomena to Pure Logic

Edmund Husserl, Trans. by J. N. Findlay, Logical Investigations Volume 1, Routledge, 2001, pp. 9-161, 모든 강조는 필자의 것, 모든 이탤릭체는 원문.

 정적 현상학에서는 메타바시스가, ⟪기하학의 기원⟫으로 대표되는 발생적 현상학에서는 근원적 명증을 재활성화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이 문제시된다. 문제 제기의 대상이 메타바시스든, 상실의 위기이든지 간에 학문이 스스로의 진정한 목적, 가치, 규범을 잘못 알고 있다는 주장의 뼈대는 그대로다. 다만 그 무지의 양상이 착각이냐, 망각이냐의 문제다. 발생적 현상학은 지식의 참됨과 타당성의 가능조건을 따짐에 있어 역사(적 아프리오리)의 차원을 고려한다.


서론

§1 논리학의 정의를 둘러싼 논란과 논리학의 교설들의 본질적 내용 [후설에게서의]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논리학의 정의 및 그 교설의 본질적 내용들에 대한 완전한 동의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심리학[적으로 논리학을 이해하는] 경향성이 형식적, 형이상학적 경향성에 비하여 우세한데, 그럼에도 논리학의 원칙[이 무엇이어야 하느냐]에 대한 논란—논리학의 정의에 대한 의견차에 반영된—은 끊이지 않고 있다. 심리학적 ‘진영’ 내부에서도 그 목표와 방법론에 대한 것을 제하면 의견차가 만연하다.

§2 원칙들에 대한 물음들의 새로운 논의의 필요성[필연성] 개별적 신념이 곧 보편적 진리로 미끄러지는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는 [논리학]의 원칙들에 대한 물음이 새로이 대두될 필요가 있다. 이는 논리학의 어떤 '경향성'이 바람직한지, 그리고 논리학의 정확한 경계가 어디까지인지와 관련해 중요하다. 심리학적 경향성의 우세는 논리학의 목표(ends, aims)가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음을 증거한다. 물론 한 학문의 경계 확정이 그것의 [구체적인] 작업들 및 발전에 선행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경계에 대한 이해가 반영된, 학문의 정의의 적절성은 학문의 발전에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The field of science is an objectively closed unity: we cannot arbitrarily delimit fields where as we like. The realm of truth is objectively articulated into fields: researches must orient themselves to these objective unities and must assemble themselves into sciences."(12) [이처럼 학문이 사태 자체 및 그에 상응하는 진리의 객관적인 구분에 스스로를 맞춰야만 할 때] 문제는 한 학문의 작업 범위가 너무 좁거나 너무 넓을 때, 혹은—이 경우가 정말 위험한데—영역들(fields)을 혼동할 때 발생한다. 이는 특히 한 학문의 "본질적 목표"에 해당하는 [고유한] 대상들이 오해되었을 때 발생하는 문제로, 메타바시스라 불릴 수 있다(13). 메타바시스는 학문의 목표, 방법론, 대상, 층위 설정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결과들"을 낳는다(13). 메타바시스는 외부적 자연에 대한 학문에보다 철학적 학문에 미치는 파장이 더 크다. 본 연구의 목적은 "심리학에 기반한 논리학"이 "이론적 원칙들에 대한 오해와, 그에 뒤따르는 영역들의 혼동을 통해 논리적 지식의 발전"을 어떻게 방해하는지 밝히고자 한다(13).

§3 논란이 되는 물음들. 들어서져야 [연구의] 논리학과 관련해 논란이 되는 전통적 물음들은 논리학이 첫째, 이론적인지 아니면 실천적인 분과 학문(기술)인지, 둘째, 타 학문 특히 심리학과 형이상학에 독립적인지, 셋째, 지식의 형식을 취급하는 형식적 분과학문인지 아니면 지식의 질료와도 관계하는지, 넷째, 아프리오리하고 지시적인(demonstrative) 분과학문인지 아니면 경험적이고 귀납적인 분과학문인지를 묻는다. 이 물음들은 서로 깊이 얽혀 있어서, 사실상 두 개의 진영만이 존재한다. "Logic is a theoretical discipline, formal and demonstrative, and independent of psychology: that is one view. For the other it counts as a technology dependent of psychology, which of course excludes the possibility of its being a formal, demonstrative discipline like the other sides' paradigm arithmetic."(13) "순수 논리학의 본질적 목표들의 해명"을 위해 본 연구는 오늘날의 논리학의 의미와 정당성을 논한 뒤, 논리학의 이론적 기초와 심리학 사이의 관계를 탐구함으로써 "지식의 객관성"에 대한 물음에 착수할 것이다(14). "The outcome of our investigation of this point will be the delineation of a new, purely theoretical science, the all-important foundation for any technology of scientific knowledge, and itself having the character of an a priori, purely demonstrative science."(14) 이는 궁극적으로 논리학의 그 본질상 어떤 내용을 취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산출할 것이다.


1 규범적인, 특히 실천적인 분과학문으로서의 논리학

§4 개별적 학문들의 이론적 불완전성 학문적 활동의 "궁극적 근거들", 다른 말로 "실천에 방향성과 질서를 처방하는 그리고 완성된 작업물의 완전성과 불완전성이 그에 의거해 평가되어야 하는 그런 가치의 기준들을 결정하는 이론적 지식"[에 대한 이해] 없이도 [구체적인] 성과는 산출될 수 있다(15). "We do not mean the mere incompleteness with which the truths in a field have been charted, but the lack of inner clarity and rationality, which is a need independently of the expansion of the science." 모든 학문의 이상으로 여겨지는 수학조차 예외는 아니다. 장인처럼 수학적 방법론을 동원하는 수학자들조차 작업의 "논리적 타당성과 [방법론들의] 정당한 사용의 한계에 대해 만족스럽게 설명하는 데 무능하다."(16) 개념들과 명제들의 기능, [숨은] 전제들은 [여전히] 불명확하다.

§5 형이상학과 학문이론을 통한 개별적 학문들의 이론적 완성 형이상학은 현실적(actual) 실재와 관련된 학문들의 간과되기 쉬운 전제들을 밝혀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를테면 외부세계가 존재하며 공간은 삼차원적, 시간은 직선적이고 모든 [자연적] 과정은 인과의 원칙을 따른다는 등의 전제들 말이다. 그러나 이 같은 형이상학적 기초들을 밝히는 것만으로는 앞서 언급한 "개별 학문들의 이론적 완성"을 이룩할 수 없다(16). 나아가 [형이상학적 해명]은 실재와 관련되지 않는 학문들, "실재적 존재 혹은 비존재로부터 독립적인 이념적 속성들의 한갓된 담지자들"을 취급하는 수학과 같은 학문을 완전하게 만들어줄 수 없다(16). 무엇이 학문을 학문으로 만들어주느냐를 [일반적으로 논하는 학문]은 "지식을 향한 우리의 추구의 필수불가결한 상정물(postulate)"이다(16). 그리하여 [본 연구는 형이상학이 아닌] 학문이론(Wissenschaftslehre), 곧 학문에 대한 학문에 해당한다.

§6 학문이론으로서의 논리학의 가능성과 정당성 이처럼 "학문의 이념과 관련된 규범적이고 실천적인 분과학문"의 "가능성과 정당성"은 다음을 고려함으로써 밝혀진다(16). 학문은 단순히 앎의 작용들만이 아니라 그로부터 발생하고 새로운 작용들을 산출하는 이라는 "외적 배열(external arrangements)"에 의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17). "학문은 지식을 목표로 하"는데, "앎의 작용들의 선제조건들(preconditions)", 달성 가능한 목표로서 "앎의 실제적 가능성들"을 제공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17). "In knowledge, however, we possess truth ["as the object of a correct judgment*"]."(17) 그런데 모든 정확한 판단이 "사태의 존재 혹은 비존재에 대한 지식"을 재현해주지는(represent) 않는다. 엄밀히 말해 지식은 (판단 이전에) 명증을 요구한다. "[…] it requires to be evident, to have luminous certainty that what we have acknowledged is, that what we have rejected is not, a certainty distinguished from blind belief, from vague opining, however firm and decided, if we are not to be shattered on the rocks of extreme scepticism."(17)

 그러나 일반적인 언어 사용에서는(common talk) ‘지식’이란 개념을 그 정도로 엄밀하게 사용하지 않으며, 이따금은 [증명을 거치지 않고도 증명의 완료되었음 및 그 결과에 대한 기억만으로도 지식이 성립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느 편에서든 지식은 “근거 없는(baseless) 의견”과는 구분되며 특정한 ‘징표(mark)’를 요구한다. “The most perfect ‘mark’ of correctness is inward evidence, it counts as an immediate intimation of truth itself.”(17) 그러나 “진리에 대한 그처럼 절대적인 지식”이 없는 대부분의 경우, 사태의 확률(probability, 개연성)에 대한 내적 명증[이 사태의 지적인] 가치 평가를 결정한다(17). “Ultimately, therefore, all genuine, and in particular, all scientific knowledge, rests on inner evidence: as far as such evidence extends, the concept of knowledge extends also.”(18) 그러나 “앎 또는 지식(knowing or knowledge)의 개념 속[에는] 이중성(duality)”이 잔존한다(18). 한편으로는 특정 사태와 관련해 S가 P이거나 P가 아니라는 데 대한 내적 명증이 지식의 가장 협소한 의미를 이루고, S가 P이거나 P가 아닌 것이 특정한 정도로 개연적이라는 데 대한 내적 명증은 적어도 사태 자체와 관련해서는 [명증성이 다소 떨어진다는 의미에서] 변양된, 넓은 의미의 지식을 이룬다. 이때 전자의 지식은 후자의 지식이 점근해가는 “절대적으로 고정된, 이념적인 한계”가 된다(18).

 “But the concept and task of science covers more than mere [totality of?] Knowledge. […] More is plainly required, i.e. systematic coherence in the theoretical sense, which means finding grounds for one’s knowing, and suitably combining and arranging the sequence of such groundings.”(18) 그러므로 학문의 본질은 파편적 지식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타당하게 만들어주는 작업(validation, 타당화)으로서의 이론들의 체계적 통일성을 요구한다. 학문은 발명이 아닌 [사물들 속에 현존하는 진리에 대한] 발견의 장이다. 그런데 “진리의 권역”은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통일”되어 있으므로 학문 역시 체계적이어야 한다(18). “진리들의 체계적 연결들"을 가리키는 내적 명증은 방법론상의 [인공적인] 기술을 요구한다(18). [이처럼 지식이 자연의 선물처럼 무매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학문들이 세워지는 것이다.] 나아가 특정 사태의 실제적 존재 또는 비존재[를 무매개적으로 증거하는] 내적 명증은 [매우 드물다.] 그러므로 방법적 절차 없이는 무수한 참된 명제들, 곧 지식이 산출될 수 없다는 점이 본질적이다. “학문이론, 논리학”도 예외는 아니다(19). [논리학 또한 숨겨진 또는 매개적으로만 달성 가능한 확실한 또는 개연적인 진리에 이르기 위해 다소 인공적인 방법론을 요구한다.] “That this is the case, that we need grounded validations in order to pass beyond what, in knowledge, is immediately and therefore trivially evident, not only makes the sciences possible and necessary, but with these also a theory of science, a logic.”(19)

*“affirmation or rejection of a state of affairs that accords with truth”(17)

§7 계속. 근거 지워진 타당화들의 가장 주목할 만한 가지 특이성들(peculiarities) ‘타당화’에 해당되는 생각의 계열들은 세 가지 특수성을 가진다. 첫째, 타당화는 “그것의 내용과 관련하여 고정된 구조”를 가진다(19). 달리 말해 타당화의 작업을 이루는 내용은 자의적으로(random), 의지에 따라(at will) 선택될 수 없다. 둘째, 타당화는 “변덕이나 우연이 아니라, 이성과 질서, 즉 규제적 법칙들에 의하여” 지배[되기에 일반화될 수 있는 특정한 유형에 속한]다(20). 특정한 진리들의 집합이 그 자체로는 내적 명증을 결여하는 명제 S와 결합되어 명제 S를 타당하게 만들어줄 때, 이 결합은 변덕에 의한 것이 아니다. “각 타당화는 그 내용과 형식 모두에 있어서 독특해야 한다”는 것은 언뜻 보기에만 그럴듯한 생각이다(20). 실제로 이런저런 [타당화의] ‘설립물들’(‘establishments’)은 이를테면 삼단논법적인 형식과 같은 것을 공유한다. 특정한 잠정적인 타당화의 작업을 그와 같은 형식을 따를 경우 그리고 전제들이 참일 경우 정확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아프리오리한 법칙 또한 존재한다. 달리 말해 어떤 명제를 타당하게 만드는 형식적인 절차 또는 방식은 공유되며, 이렇게 공유된 방식의 유형은 일반화될 경우 가능한 타당화의 무한한 사례들에 적용되는 “일반적인 법칙”에로 이어진다(20). 셋째, 타당화의 형식들은 서로 다른 지식의 영역, 서로 다른 학문들에 의해서도 공유[될 수 있다].* [삼단논법의 타당화 형식은 화학에서나 수학에서나 적용 가능하다.]

*수학의 경우 그에 상응하는 타당화의 전형적(typical) 형식이 모든 학문에 의해 공유되지만, 다른 학문의 경우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전형적 형식이 있을 수 있다?(cf. 22)

§8 이러한 특이성이 학문의 가능성 학문이론과 맺는 관계 타당화하는 논증들(validating arguments)이 특정한 형식과 법칙을 따르며, 그와 같은 형식 및 법칙이 [특정한] 주장군 전체(a whole class of arguments)를 지배하고, 이 주장군 전체의 참됨이 단지 개별 주장들이 공유하는 형식에 의해 보장되지 않는다면, 학문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21). “Talk about method, about a systematically regulated progress from one bit of knowledge to another, would be senseless, and all progress would be fortuitous(우연한, 행운의). […] It would be senseless to look for a proof of a given proposition.”(21) [주어진 명제의 참됨에로 이어지는 전제들을 어떤 법칙에 따라서 추적할 수 없다면, 달리 말해 전제와 결론이 되는 명제 사이의 관계가 법칙적이지 않고 우연적이라면, 방금 언급한 추적에 성공하기 위해 전제가 될 수 있는 모든 명제들을 전부 검토해야 할 텐데, 이는 불가능하다.] [한편] 특정한 명제가 갖고 있는 형식은 이전에 성공했던 타당화의 형식에 대한 기억을 연상시킴으로써 타당화의 작업을 훨씬 쉽게 만들 수 있다. “The trained thinker finds proofs more readily than the untrained one. […] In the general nature of the objects of each realm certain forms of factual connection are rooted; these in their turn determine typical peculiarities of forms of validation that predominate in this realm. […] If all this shows that it is regular form that makes possible the existence of sciences, so, on the other hand, it is the wide degree of independence of form from a field of knowledge that makes possible a theory of science. Were there no such independence, there would only be coordinated logics separately corresponding to the separate sciences, but no general logic. In fact both are needed: investigations into the theory of science concerning all sciences equally, and, supplementary to these, particular investigations concerning the theory and method of the separate sciences which endeavor to search into what is peculiar to them.”(22) 그리하여 [직전의 절에서] 밝혀진 타당화 작업의 특이성들[을 이해함]은 논리학[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기여한다.]

§9 학문들 절차의 방법적 양상들은 부분적으로는 검증적(validatory)이고, 부분적으로는 타당화를 향한 보조적 장치들(devices)이다 방법적 절차가 타당화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당화는 방법적 절차 가운데서 핵심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현실적인(actual) 타당화하는 논증”에 해당하지 않는 “모든 학문적 방법들”은 한편으로 그와 같은 논증들의 축약(abbreviation) 및 대체물이거나, 다른 한편으로 미래의 타당화를 준비하기 위한 “보조적 장치들”이다(23). 타당화는 언어와 같은 기호 체계를 통해 연구자의 생각이 충전적으로 표현되기를 요구하지만, 언어는 인공적 조심성을 기하지 않을 경우 [의미의] 애매성이라는 문제를 낳는다. 그리하여 정의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The definition of names we therefore see as a methodical auxiliary procedure towards ensuring validations, the latter being one’s primary, truly theoretical procedures.”(23)* 분류의 방법 또한 타당화의 보조적 장치 가운데 하나다. [한편] 타당화하는 논증의 축약 및 대체물의 예는 알고리즘, 계산기, 기계적 공식들 등이다. “Whatever marvels these methods may achieve, their sense and justification depends on validatory thought. […] Each such method represents a set of provisions whose choice and arrangement is fixed by a validatory context, which shows, in general, that such a procedure, even when blindly performed, must necessarily lead to an objectively valid individual judgment.”(24) 그리하여 “학문의 발전은 타당화의 작용 속에서 수행된다.”(24) 요지는 “방법의 이념” 하에 논리학이 타당화 외에 관심을 두는 방법적 절차들 역시 그 전형상(typicaly) 타당화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24).

*Q. Nomenclature, symbol의 사용에 대한 후설의 견해를 이해하지 못했다.

§10 이론에 대한 관념들(ideas) 학문이론의 문제들로서의 학문 “The theory of science, as here shown up, is not merely concerned to investigate the forms and laws of isolated validations, and the auxiliary devices which go with these. […] Science requires, as said above, a certain unity of validatory interconnection, a certain unity in the stepwise ascent of its validatory arguments, and this form of unity has itself a lofty teleological meaning in the attainment of the highest goal of knowledge for which all science strives: […] truth, i.e. not in the research into separate truths, but into the realm of truth or its natural provinces. The task of the theory of science will therefore also be to deal with the sciences as systematic unities of this or that sort in other words, with the formal features that stamp them as sciences, with the features that determine their mutual boundaries and their inner articulation into fields, into relatively closed theories, with the features which fix their essentially different species or forms etc.”(24) 방법들은 “그 자체로 양식화된(styled) 학문들”이다(24-25). [방법들에 대한 고려를 통해] 학문은 단순히 증명의 (비)타당성뿐만 아니라 이론이나 학문 자체의 (비)타당성을 따질 수 있으며 또 따져야 한다. 물론 전자의 과제가 후자의 과제에 선행되어야 마땅하다. “Research into the sciences as systematic unities is unthinkable without prior research into their validatory procedures. Both at least enter into the notion of a science of science as such.”(25)

§11 규범적 분과학문으로서 그리고 기술로서의 논리학 또는 학문이론 학문은 특정한 목적을 가진다. “Whether a science is truly a science, or a method a method, depends on whether it accords with the aims that it strives for. Logic seeks to search into what pertains to genuine, valid science as such, what constitutes the Idea of Science, so as to be able to use the latter to measure the empirically given sciences as to their agreement with their Idea […]”(25) 이와 같은 의미에서 논리학은 규범적 학문이다. [한 학문이 그것의 문화적, 역사적 부침이 어떠했는지와 독립적으로 타당한지 타당하지 않은지, 학문의 말하자면 이상형에 부합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평가하는 학문이 곧 논리학이기 때문이다.] 모든 규범적 학문은 가장 고차적인 목표 또는 특정한 이념을 규범적 기준으로 설립하며 그 기준의 내용물 또는 가능조건을 취급한다. 뿐만 아니라 규범적 학문은 그와 같은 기준이 준수되지 않는 경우가 어떤 경우들인지 역시 진술한다. 규범학이 제공하는 평가의 기준들은 일반적이거나 보편적이지 않고 특수[특별]한데, [이는 규범학이 이를테면 개별적인 방법론이 타당하거나 타당하지 않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이미] 목적인 또는 목적이 될 수 있는 규범에 대한 학은 기술(technology)을 발생시킨다. 학문이론도 예외는 아니다. 특정한 방법이 타당할 수 있는 조건들을 명시하고 학문적 절차가 따라야 할 규칙들[—진리를 방법에 따라 추적하고, 각 학문을 경계 짓고 구축하며, 방법의 발견 및 사용에 관여하는 규칙들—]을 마련함으로써 학문이론은 학문의 기술이 된다. 그리하여 논리학의 개념은 이 같은 기술의 의심 불가능한(unquestionable) 가치에 비추어보았을 때 확장되어야 마땅하다.

§12 논리학에 대한 유관한 정의들 논리학을 단순히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기술로 이해하는 전통적 정의는 너무나 협소하다. 학문적 지식의 목표가 무엇인지가 그로부터 따라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논리학에 대한 슐라이어마허의 정의는 보다 적절하지만, 여전히 논리학이 학문들의 구획 및 구조의 규칙을 세워주어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하지 않는다. 볼짜노의 학문이론 속 예비적인 접근들—그의 기이한 명시적 정의보다도—이 우리의 접근에 가깝다.


 '타당성 정초(grounding (begründen), founding (fundieren) of validity)'의 의미를 무엇으로 보느냐의 문제에서 나와 이전 지도교수님 사이의 견해가 갈리는 것 같다. 나는 타당성 정초가 타당성의 근거를 직접적으로 제공해주는 절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타당성 정초는 어떤 조건들 하에 타당성 일반이 확보될 수 있는지를 해명하는 절차, 즉 타당성의 가능조건을 제공해주는 절차에 가깝다. 석사논문에서 나는 이를 ('직접적 정당화'와 대비되는) '근본적 정당화'라고 표현했다. 이처럼 후설의 목표는 지식의 가능조건에 대한 학을 설립하는 것이며 현상학은 그런 의미에서 '초월론적(transcendental)'이다(⟪논리연구⟫에서는 아직 이 표현이 등장하지 않지만).

 타당성 정초의 의미를 이렇게 이해해야지만 어째서 후설이 학문은 학문이론으로서의 현상학 없이도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지가 이해 가능하다. 현상학 없이도 학문들은 충분히 타당한, 참된 주장을 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주장들이 왜 타당하고 참된 것인지, 어떤 조건 하에서 타당하거나 참되다고 말해질 수 있는지가 불가해할 뿐이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주장을 보다 참되게 만들어줄 추가적 근거가 아니라, 참됨의 의미에 대한 철학이다. 나아가 나는 발생적 현상학이 타당성 정초의 문제를 도외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참됨의 의미를 고려함에 있어 시간축, 역사의 차원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정적 현상학과 차이가 나는 정도다. 현상학에서 타당성의 문제와 발생의 문제는 상호배타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둘 사이의 필수불가결한 상호연관성이야말로 현상학의 핵심적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