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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미완 - 부쉬 드 노엘(2021.2)

지난 크리스마스


부쉬 드 노엘

"이와 관련해서, 추측하건대, 우리들 중 대부분은 우리에게 무엇이 쾌감과 고통을 가져다주는지 퍽 감을 못 잡는 것 같다. 당신은 정말 크리스마스를 즐기는가?" (Eric Schwitzgebel, The Unreliability of Naive Introspection, The Philosophical Review, Vol. 117, No. 2, 2008, p. 250)


 사랑은 과자 같은 것이다. 바삭하거나 달콤하다. 그리고 없이 살 수 있다, 라고 썼다. 그리고는 가슴을 네 번 쓸어내렸다.


 연구실에서 지선은 문득 자신이 살아가는 방법을 까먹어버렸다고 털어놨다. 천천히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저 한순간에 바보가 된 것마냥, 갑자기 까먹어버렸다고. 그녀는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최근 보라색으로 염색을 했는데, 색깔이 빠져 가면서 솔직히 말해 조금씩 흉해지고 있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지선이 나와 탕비실에서 마주치자마자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흉하지 안서야, 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고는 자기 커피를 내렸고, 내 머그잔을 보더니 내 것도 같이 내려주겠다고 하면서, 삶은 어떻게 사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너 잘 살잖아.

 나도 별 수 없어.

 그래도 혼자 잘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내가 어제 가슴을 네 번 쓸어내리는 의식을 수행했다고 고백할지 말지 고민하다가, 지선이 환상에 빠져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옆에서 같이 힘들어한다고 해서 뭔가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요즘에도 연락 없어?

 응.

 지선이 나에게 머그잔을 돌려줬다. 그녀가 내린 커피는 유난히 진해 보였다.

 우리는 복도로 돌아와 말 없이 몇 걸음 걸었다. 연구실에 들어가기 전, 지선이 나에게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문을 말 상대 삼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나지막히 바쁜가 봐 많이, 하고 속삭였다. 그 사람은 바쁜 게 아니라고 항변하는 듯, 문고리가 무척 뻑뻑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짐을 풀었지만, 지선은 한동안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로 가득한 자신의 책꽂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도 그렇게 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는 보통 아, 내가 이걸 다 읽었어, 같은 뿌듯함을 느끼거나 아, 내가 이걸 다 읽어야 돼? 같은 막막함을 느끼거나 둘 중 하나였다. 대학원 생활은 그런 식이었다. 내가 이걸 다 읽었어, 에서 내가 이걸 다 읽어야 돼? 로 갔다가 다시 내가 이걸 다 읽었어, 로 돌아오는 생활의 반복. 솔직히 말하면 행복한 구석이 없지 않았다. 생활은 무척 단순했고, 나와 마찬가지로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살 수 있었다. 가끔은 성취도 있었다. 지선도 얼마 전에 석사 논문을 제출했고,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만 먼저 프랑스로 떠난 그녀의 애인이 한동안 연락에 소홀하다가, 얼마 전부터는 아예 소식이 없어졌을 뿐이었다. 나 역시 수업을 재미있게 듣고 있었고, 자신감도 붙어가고 있었는데, 진부한 일에 휘말렸을 뿐이었다.

 내가 그에게 사랑에 빠지는 데 너무나 짧은 시간이 걸렸다는 것, 그것이 그 사랑을 난센스로 만들었다. 그래서 처음에 나는 그 사랑을 단순히 동경이라고 불렀다. 그에 대한 나의 동경은 말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얼굴색과 이목구비의 구조, 풍성한 머리칼, 말을 할 때 종종 그러나 불규칙한 리듬으로 입술을 앙다무는 습관밖에 보지 못했다. 그런 것들은 이를테면 캔버스 위나 컴퓨터 화면상으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사랑에 빠질 만한 충분조건이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그와 함께 보내는 상상을 했다.


 그 다음 주에 그는 용담꽃 색의 파란 니트를 입고 왔다. 실이 굵고 꽈배기 무늬가 커서 입은 사람의 덩치도 커 보이게 만드는 니트였다. 저번 주엔 분명 체구가 작았는데, 같은 생각을 하고는 혼자 웃었다. 나는 은근슬쩍 그의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평생 공부만 한 사람이 가질 법한 흰 피부 위로 주근깨가 귀엽게 몇 알 박혀있었다. 그의 보송한 피부 위로 솜털이 레몬제라늄처럼 자라있는 것도 보였다. 우리는 1주일에 1번씩 열리는, ‘문학도를 위한 유럽사’라는 이름의 세미나에 함께 참여하고 있었고, 자기 소개 시간에 그는 스스로를 한국 문학을 더 좋아하는 독문학도로 소개했었다. 100년만 늦게 태어났어도 배수아를 전공했을 텐데요. 그가 말했다. 배수아가 누군지 아는 사람들이 웃었다. 나는 배수아가 누군지 몰랐기 때문에, 그 다음 한 주 동안은 전공 공부를 집어치우고 배수아만 읽었다. 그의 전공이 괴테라니 믿기 어렵다고 생각하게 됐다. 차라리 카프카였으면 좀 더 개연적이었을 것이다.

 내가 한 주 동안의 벼락치기의 성과를 시험하기라도 하듯 그런데 초기작이 좋으세요, 2000년대 작품이 좋으세요, 요즘 작품이 좋으세요? 라고 물은 것은 무척 충동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처음 보는 사람이 말을 거는 일이 거북한 것인지 몇 초간 얼어있다가 이내 표정을 녹였다. 아, 고를 수 없어요, 라고 말하면서 그가 웃었다. 나는 내가 장편 데뷔작인 ⟪부주의한 사랑⟫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가 그 책은 유일하게 자신이 읽지 않은 장편이라고 답했다. 그러다가 세미나가 시작됐기 때문에 대화는 끊기고 말았다. 건너편 책상에서 나의 대학원 동기 마루가 프랑스 혁명에 대한 발제문을 읽고 있었다.

 마루와는 학부 때부터 알던 사이였는데, 그때도 그는 프랑스 혁명에 단단히 심취해 있었다. 마루는 장 자크 루소의 책이 혁명에 미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번역투로 말했다. 그러면서 현대에는 그 어떤 책도 그때만큼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심지어는 아무리 신통한 예언서라고 해도 유튜브 알고리즘을 타지 않는 이상 주목을 끌지 않을 것이라고... 그 지점에서 나는 웃음이 터졌는데, 웃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다들 책으로 먹고 살려고 하니까 심란해졌나, 하지만 책을 읽는 일이 드물어져서 그 덕에 오히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더 끈끈해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어줍잖은 우월의식만 생기지 않는다면 나름대로 괜찮은 일 같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도 드문데, 하물며 같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얼마나 찾기 어려울까? 나는 내심 그가 나의 급조된 취향으로부터 운명의 향기를 맡고 있기를 희망했다. 세미나가 끝날 무렵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마루가 말을 거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새파란 등의 이미지가 기나긴 복도의 끝을 향해가며 소실되었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발제 이야기를 하던 마루가 화제를 돌렸다.

 저 사람 알아?

 너는 저 사람 알아?

 아니, 네가 말 걸었잖아.

 나도 몰라.

 마루는 나의 시원찮은 대답에 김이 샜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오늘 왜 그래, 이상하네. 근데 지선이 연구실에 있어?

 나는 발제 이야기도, 내 옆자리에 앉은 남자에 대한 이야기도 모두 지선이 연구실에 있는지 묻기 위해 그가 건너온 돌다리들임을 바로 알았다.


 새로운 수요일을 기다리면서 나는 ⟪부주의한 사랑⟫을 여러 번 정독했다. 책을 읽기 위해서보다는 그후의 짧은 대화가 줬던 짜릿한 기분을 최대한 생생하게 되살리기 위해서였다. 그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다음 세미나에서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을 때, 그리고 진갈색의 가죽 가방에서 배수아의 첫 번째 장편소설을 꺼냈을 때 가슴이 정말 터지는 줄 알았다. 


  김안서, 거기 안 서?


 그는 유부남이었다.


 예전에는 나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소설을 쓰고, 날 완전히 이해해주는 자비로운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고, 좋은 음악을 들으며 맛있는 커피를 마시는 게 삶을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자기표현이 수치심의 근원이 되고, 나를 완벽하게 이해해달라는 요구라는 게 충족되기 불가능한 환상일 뿐 아니라, 타인에게 부당한 요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 그러니까 그게 사랑받는 자의 ‘권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거야….. 아무리 리스트의 ‘사랑의 꿈’ 같은 것을 흥얼거리며 커피를 마셔도, 마음이 안정돼있지 않으면, 여전히 방황하고 있으면...

 그 사람이랑 너 사이에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 내가 잘못한 걸 그 사람 탓을 했어. 이렇게나 이기적인데 다시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

 나는 마루를 생각했다.

 사랑받는 일 생각보다 안 어려울 걸.

 그건 나에게 거는 주문이기도 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지선과 함께 마루의 집에 찾아갔다. 지선은 샴페인을, 나는 빨강색 체크무늬 식탁보를 챙겼다.


 아, 나는 의견일 뿐이다.

 쟤 왜 저래.

 마루야, 술 좀 더 줘.


 우리는 나란히 앉아 에드워드 양의 타이페이 3부작을 보았다. 세 영화 모두 폭력적인 구석이 있었다. 도시인들의 구질구질한 일상 이야기가 좋았다. 사람 속이 어두운 줄도 모르고 네온사인이 화려한 것이 좋았다. 네온사인이 빛나는 줄도 모르고 자기 속을 태우는 사람들이 좋았다.


 우리 부쉬 드 노엘을 한 번 만들어보자, 재료는 다 준비해놨어.

 나는 마루가 먼저 앞치마를 두른 뒤 지선의 앞치마 리본을 매주는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았다. 아, 사랑스러운 내 의견들아. 마침 마루의 강아지가 달려와서 내 발목을 포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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