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werp
루프트 교수님과의 면담, 그로만 교수님 수업에서의 발표를 모두 마치고 가뿐해진 마음으로 떠났다. 스스로에게 보상을 준다는 생각을 정말 오랜만에 했는데, 자기연민처럼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무척 즐거운 1박 2일이었다. 혼자였지만 많이 웃었고, 어쩌면 혼자였기 때문에 많이 웃을 수 있었다. 타지살이를 하면서 놀라운 점은 내가 외로움을 많이 타는 편이고, 지금도 조금은 쓸쓸하게 느끼지만 그런 것치고는 혼자서 상당히 잘 논다는 사실이다.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며칠을 보낸 뒤, 새삼스럽게 오, 며칠동안 입을 안 열고도 그냥저냥 지냈네, 레벨업,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게 된다. 기차를 타고 산 하나 없는 플랑드르의 평원을 지나는 중, 바로 앞에 앉은 장발의 남자가 너무 험악하게 생겨서 쫄았다. 그렇게 움츠린..
2025년 1월의 독서
1. Nikhil Krishnan, A Terribly Serious Adventure: Philosophy and War at Oxford 1900-60, Random House, 2023. 오늘날 '분석철학'이라 불리는 전통을 개시하고 탄탄하게 정비한 철학자들--Moore, Wittgenstein, Ayer, Ryle, Austin, Anscombe, (arguably) Murdoch, Williams, Strawson etc.--이 몸담았던 옥스포드 대학에서 20세기 전반에 철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개괄하는 역사서이다. 저자 자신이 전공자여서 그런지 철학적인 내용도 상당히 깊이 있고, 무엇보다 끝장나게 재미있다. 헤겔 식 관념론과 불가해한 형이상학에 맞서, 각 철학적 개념이 도대체 무엇을 의..
우다영,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우다영,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문학과지성사, 2023. 우다영의 세 번째 소설집에 실린 다섯 편의 글은 모두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인간성의 본질, 혹은 (본질주의의 언어가 부담스럽다면) 조건이라고 불릴 수 있는 그것은 그 개념상 선험적으로 성립하는 것으로서, 한낱 경험적인 변화에 불과한 문명의 발달이나 지구적 사건에 의해 좌우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하지만 SF라는 장르는 인간적 삶의 선험적 구조를 극적으로 시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한다. 여기서 '극적으로'란, 인간의 조건 가운데 하나를 과감히 삭제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에서는 자아의 단일성을, 에서는 한 번의 탄생과 한 번의 죽음으로써 규정되는 삶의 유한성을, 에서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에서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