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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hony Steinbock, Moral Emotions : reclaiming the evidence of the heart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바다 망령의 숨(2022.4) 추위. 크리스마스가 지나자마자 불쑥 찾아왔다. 크리스마스 당일에도 날은 좋지 않았다. 거리가 쓰레기로 가득했기 때문에, 실내에 한참 박혀 있었다. 축제를 벌이지 않은 몸으로 한겨울을 맞았다. 그렇게 지금에 이르러서 불현듯,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의견에 지나지 않은지 의심했다. 나는 의견이다, 하고 말을 내뱉어 보았다. 내가 지금, 여기 있음은 진리가 아니라고. 오늘 내 말 상대는 차디찬 공기였으며, 입김이 마스크 너머로 퍼져 허공에 짧은 자취를 남겼다. 나는 일을 마치고 직장을 나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두껍지는 않았다. 보풀이 많이 일고, 주머니가 양 옆으로 큼직하게 달린 못생긴 코트였다. 겨울 내내 이것으로 버텼다. 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옷을 사..
최근에 읽은 것들에 대한 기록 이 도시에는 허구한 날 비가 내린다. 테라스에 나가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구름 사이로 햇살을, 적어도 그것의 흔적이라도 찾아보려고 고개를 들면 머지않아 빗방울이 내 콧등을 때린다. 약하지만 끈덕지게 이어지는 빗줄기야말로 이 도시의 상징이다. 모두가 사진기를 꺼내게 만드는 고딕 양식의 오래된 시청 건물은 사실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이 도시의 음습한 기운을 진실되게 반영하지 못한다. 도처의 음기를 겨우 상쇄시켜주고 있는 것은 대학생들의 다채로운 옷차림과 특히 밤거리에 은근하게 퍼져있곤 하는 담배 냄새, 돌길에 떨어져 깨진 초록색 맥주병, 카페로부터 새나오는 묘령의 여자의 웃음소리 정도다. 하지만 단 하루, 모두가 새까맣게만 입고 금연, 금주를 하고 웃음을 삼가도 좋으니 햇빛이 났으면 좋겠다. 해가 보고 싶..
20231014 오밤중의 생각 오밤중의 어지러운 생각. 논문 한 편을 쓰는 데 너무 많은 품이 든다. 석사논문이나 박사논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저널 아티클에 실리는 7000 단어 정도의 글을 쓰는 데 1년이 걸린다고 해도 이제는 별로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기존의 문헌을 소화하고,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정리하고, 가능한 반박들에 대비하고, 세련된 글로 표현해내는 각 과정이 하나 같이 험난하다. 또 직관을 단순히 표현하는 일과 그것을 다수에게 설득력 있게 만드는 일, 그러니까 철학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은 전혀 다른 수준의 무엇이다. 나 자신의 한계가 느껴지고 힘에 부친다. 이 페이퍼 도대체 완성이나 할 수 있을까? 물론 고작 6월부터 준비했으니 4개월만에 구시렁거린다면 끈기 부족이다... 최근에 쓴 소설의 첫 문단을..
W. Scott Cleveland, The Emotions of Courageous Activity W. Scott Cleveland, "The Emotions of Courageous Activity", Res Philosophica, Vol. 92, No. 4, October 2015, pp. 855-882. 용감한 행위의 전개를 세 국면(상황 해석 및 반응 - 선택지의 숙고 - 행위의 집행)으로 나누어 각 국면의 성공적인 실현을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고유한/적절한(proper) 감정—두려움 - 희망 - 불굴(daring)—이 있다고 주장하는 논문이다. 신경과학적인 근거를 끌어와 두려움이 제거 혹은 극복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용기의 발현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주장이 새롭다. 다만 너무 많은 주장이 로버츠와 아퀴나스의 감정론에 기대고 있어 아쉬운 점도 있었다. 논문과의 내용 중첩을 방..
Stefano Micali, Phenomenology of Anxiety Micali, Stefano. (2022). Phenomenology of Anxiety, Springer. '다성학(polyphony)'의 방법론으로써 정신분석과 현상학, 문학 등 다양한 영감의 원천으로부터 불안의 특질(trait)들을 분석하는 책이다. 미래의 자아의 자율성을 주장한 사르트르에 반대해 불안 가운데서 과연 미래의 자아가 그만큼 견고한 것인지 물었던 2장의 비판이 특히 인상 깊었다. 5장에서는 불안에 대한 저자 자신의 현상학적 분석을 심화시키는데, 불안이란 자기의 타자화 가능성에 대한 불안일 수 있다는 통찰이 빛난다. 저자에 따르면 "불안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변화에 대한 집착을 가리키며 그러므로 [우리가] 급진적인 변화를 겪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포함한다. 우리는 이 (열린) 미래 속..
20231005 진자운동 오랜만에 모국어로 된 책을 펼쳐 읽었다. 내가 좋아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작가의 수필집이다. S가 슈투트가르트에서 보부아르 입문서, 울프의 ⟪올랜도⟫와 함께 가져다주었다. 정제된 한글의 미로 속, 그것도 문학의 권역에 다시 발 디디는 기분은 황홀한 동시에 끔찍했다. 내가 떠나온 곳의 아름다움을 조금의 완충 작용도 없이 상기 당했기 때문이다. 한동안 나는 소설을 읽지도, 쓰지도 않았다. 용기에 대한 논문을 진척시켰지만, 소설의 세계로 회귀할 용기는 없다. 가장 진솔하게 쓴 소설의 초고를 탈고했지만, 퇴고할 기분은 들지 않는다. 스무 살에나 지금이나 나는 매일 기분과 싸워 이겨야만 무언가를 해낼 수 있고, 지금은 지는 중이다. 소설에 대해 내가 품고 있는 두려움은 과거에 사뭇 구체적인 것이었다. 그..
Douglas N. Walton, Courage, a philosophical investigation Douglas N. Walton, Courage, a philosophical investigation, University of Califoria Press, 1986. Walton (1986)에게 용기에 대한 정의는 ⓐ실천적 추론(practical reasoning)의 기반(matrix)과 ⓑ윤리학적 기반으로 나뉜다. 용기는 행위자 a가 ⓐB를 [결과로] 가져오기 위해(bring about) 행위 A가 필수불가결하다고 정당하게 생각하여(consider=justifiably believe), 그러지 않을 수 있었는데도 A를 실천하는 가운데 ⓑB를 가치 있는 것으로 그리고 A를 매우 위험하거나 어려운 것으로 정당하게 생각할 때 발생한다(see p. 86 for a fuller definition). 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