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349) 썸네일형 리스트형 2024년 늦가을과 초겨울의 독서 힘 나는 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가장 필요한 것 하나조차 얻지 못한 계절이었다. 적이 없는 생활의 불행을 자유로 뒤바꾸어 생각할 수 있는 용기를 다질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여전히 공부가 즐겁냐고 묻는다면 단적으로는 즐거운 게 맞지만, 즐거움이란 생각보다 복잡하며 불순하기 쉬운 현상이라 덧붙이고 싶다. 연구를 통해 내가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는 감각, 그간의 체계적인 노력에 대한 승인(인정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레퓨테이션과 미래의 임용에 대한 아주 최소한의 자신감 등이 뒷받침되지 못했을 때에 공부의 순수한 즐거움이란 불안과 자기비하로 얼룩지기 쉽다. 수요 없는 인문학 공부를 하는 주제에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걸까? 지금 가진 것은 거의 논리적인 가능성에 가까운 희망 정도인데, 그것이라도 미역 불리듯.. 20241125-7 비관주의 컨퍼런스에서 하하호호한 썰 철학적 생각이 아닌 일상의 사실을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망설인다. 기억할 가치가 있는 사건은 무엇이며, 기억할 뿐만 아니라 표현할 가치까지 있는 사건은 무엇일까?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사건이 표현돼야 마땅하고—한트케 소설의 치졸한 디테일링을 생각하면—어떤 의미에서는 그 반대기 때문이다. 그 어떤 사건도 딱히 표현될 가치가 없다. 무게의 부덕함, 가벼움의 미덕. 그 사이의 균형을 찾느라 애를 먹고 있는 내 아이클라우드 메모장은 빵 터져버리기 일보 직전이다. 그래도 처음으로 국제 학회에 다녀온 일은 이야기할 만하지 않을까? ‘Edmund Husserl’s Troubled Quest for Eudaimonia’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했다. 발표 자체보다도 Q&A 세션에서 즉흥적으로 대답을 할.. Leipzig 에드문트 후설은 자아에 의한 구성* 이전의 비자아적 존재자를 근원질료(Urhyle)라 일컬었다. 구성에 논리적으로 앞서기에 'Ur'가 붙고, 구성에 의해 형상(morphē)이 그처럼 아직 부여되지 않았기에 질료라 불린다. 후설에 따르면 세계가 우리에게 현재 경험되는 이 모습으로 경험되는 이유는 자아가 저 구성적 성취를(Leistung, accomplishment) 통해 근원질료에 질서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국역에서는 종종 '작업수행'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성취'라는 표현이 무척 중요하다. 세계가 저 홀로, 레디메이드로서, 원래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의 성취를 통해 비로소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 주관 없이는 세계가 아예 없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렇게' 우리가 잘 아는 방식대로 세계가.. 6 일반적으로 죄책감이 행위에 부과되는 감정이라면, 수치심은 존재에 부과된다고들 배운다. 내가 무엇을 하거나, 말거나 대 내가 누구이냐 아니냐 사이 구분이 작동한다. 하이데거는 그 어떤 프로젝트나 커미트먼트를 선택해서 얼마나 탁월하게 처신하든 결코 해당 기투가 요구하는 바를 충분하게 해낼 수 없다는 데 따르는 존재론적 죄책을 말했다. 같은 논리로 우리는 존재론적인 수치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어떤 존재의 가능성을 선택하든, 그 언제든 도대체가 충분히 '있을' 수 없다는 감각.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런 개념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아마 존재론적 죄책은 보편적인 사정이지만, 존재론적 수치는 감각에 불과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전자는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태고, 후자는 실존적으로 취약한 몇몇에게만 체험된다. 사실 존.. 20241122 틴탑위곤롹킷드뢉핏탑잇헤이돈스탑잇팝잇 고등학교 3학년 때 엑소의 '늑대와 미녀'가 발표됐다. 일요일 저녁 때마다 어차피 주말에는 그다지 인기가 없는 교실 문을 쾅 닫고, 불을 끄고, 친구들과 모여서 한 주의 음악 방송을 몰아본 기억이 있다. 후속곡 '으르렁'의 컨셉은 음악이나 의상이나 너무 뻔하게 느껴졌고, '늑대와 미녀' 쪽이 차라리 세련됐다고 생각했었다. 무대의 시작에 열두 명이나 되는 멤버가 백댄서도 없이 생명의 나무였나, 아무튼 뭐시기 마법적인 식물을 형상화하는 춤이 얼마나 심미적이고 파격적으로 여겨졌던지. 그 와중에 혼자서는 어느 누군가를 어렴풋이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온유를 좋아했었다. 학교 구석구석에서 샤이니의 무척 키치한 댄스곡을(이를테면 아미고) 들으며 수능특강 등등을 공부했다. 돌이켜보면 전 학교의 누구도 온유와 비슷하게 생.. 음산한 땅(2024.8) 동쪽 나라의 사람들에게 서역 크라메타는 음산한 땅이었다. 아득한 국경 너머로는 여행은커녕 통행도 금지되어있었기에, 누군가는 그곳을 오아시스 하나 없는 사막으로, 누군가는 대륙의 모든 썩은 물이 모여 고이는 늪으로 상상했다. 확실하게 알려진 단 한 가지는 그곳에도 사람이 산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이 넓은 대륙에 고대로부터 줄곧 살아온 원주민이. 기록된 역사에 따르면 원주민들은 본래 대륙 동녘의 비옥한 땅에 살았으나, 농사를 지을 줄 알면서도 식인 풍습을 즐기고 글자를 몰랐으며 쌀과 함께 흙을 집어먹었다. 어린이마저 온몸을 문신으로 뒤덮고 있는 야만인 무리를, 바다를 건너온 왕가의 선조들이 몰아낸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천 년 전 일이었다. 여전히 문명이 있을 리 만무한, 현재 그들의 삶의 모습과 터전을 직.. Firenze 부주의하다면 부주의했고, 억울하다면 억울했다. 단 하루만에 비행기 한 편과 기차 세 편을 내리 놓쳤다. 갑작스러운 데다 상당한 추가 지출이 있어 그로써 마치 내 존재의 무게라도 감해진 듯, 하루종일 허했다. 목구멍에서 신 맛이 나도록 실컷 뛰어가놓고 세 번째 기차를 놓쳤을 때는 로마 도심의 잿빛 정류장에 주저앉았다. 훌쩍거리면서 여행함이라는 실존의 양태를 저주했다. 하지만 마침내 피렌체 역에 도착해, 거리의 식당으로부터 스며나오는 누런 빛깔과 끊이지 않는 말소리에 맞닥뜨리자 스르륵 긴장이 풀렸다. 마음을 다스리고 시뻘건 플로렌타인 스테이크를 뜯었다. 또 먹고 싶다. 이번 여행의 큰 수확은 내 죽음 이후의 시간성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얻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시간이 있으리라는 것 정도야 당연히 알고 .. 버나드 윌리엄스, <가치의 충돌(Conflicts of Values)> 요약 Bernard Williams, ‘Conflict of Values’ in Moral Luck: Philosophical Papers 1973-1980,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 pp. 71-82. 가치들이 [문자상에서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다수(plural)인 데다 서로에게로 환원이 불가능해(irreducible) 갈등하는 상황에 대해 성찰한 글이다. 문제시되는 여러 가치들 중 어떤 하나의 (또는 그 이상의) 가치는 반드시 상실할[=희생될] 수밖에 없는 이 같은 가치들 사이의 갈등은 병리적인 것, 그리하여 이론이나 역사적 과정을 통해 극복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그 같은 견해에 반해 윌리엄스는 가치 간 충돌을 필연적일[불가피할] 뿐 아니라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적 삶.. 이전 1 2 3 4 5 6 ··· 4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