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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충분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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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시면 해가 져버리는 데다 해가 떠있어도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날씨를 보상하기 위해 도시 전체가 조명을 휘감았다. 다른 도시에 가도 마찬가지다. 주황색 불빛 아래를 걸어 식당과 마트, 무엇보다 세탁방에 도착한다. 열흘에 한 번 세탁방 안에 가만히 앉아있는 일이 주는 위안은 크다. 세탁방 안에서 당신은 스스로를 정당화할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당신의 목적은 세탁뿐이고, 그 일은 군말없이 물을 뿜고 세제를 삼키는 기계들이 대신하고 있다.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순간 당신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세탁--을 반드시 완수하게 된다. 실수가 끼어들 틈도 거의 없다. 필연적인 성공을 느긋하게 기다리는 당신은 책을 읽어도 좋고,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셔도 좋으며 어떤 이유에서인지 세탁기보다 두 배는 큰 건조기들을 응시해도 좋다. 어떤 존재의 양태를 선택하든 당신은 참 잘 살고 있다. 빨래가 알아서 돌아가고 있고, 머지않아 뽀송뽀송하게 말려 나올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세탁물을 가득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부터 정당화의 부담은 재개된다. 당신은 쉬거나 노동할 수 있으며, 그 선택이 과연 최선인지 생각해야 한다.


 "비록 내가 진흙으로 완전히 변해버릴지언정 결코 그 어떤 것도 훼손하지 않기를. 생각 속에서조차 아무것도 훼손하지 않기. 내 최악의 순간들 속에서조차 나는 그리스의 조각상이나 조토의 프레스코화를 파괴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무언가는 왜 파괴하겠는가? 왜, 이를테면, 한 인간의 삶 속 한 순간, 그가 행복했을 수도 있는 그 순간을?" (Simone Weil, Trans. by Emma Crawford and Mario von der Ruhr, Gravity and Grace, Routledge, 2002, p.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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