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

김성중, <이슬라>

김성중, ⟪이슬라⟫, 현대문학, 2018

 수려한 한국어로 된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는 기분이었다. 학교로 가는 지하철에서부터 읽기 시작해, 결국 해야 하는 과제들을 제쳐두고 하루만에 끝까지 읽어내고 말았다. 그만큼 이야기가 나를 매료시켰고 몰입도가 강했다. 몇 달만에 집어든, 그만큼 마음을 굳게 다진 뒤에 꺼내든 한국 소설이었는데, 용기를 내길 정말 잘했다고 느낀다.

 김성중 소설가의 작품은 사실 단편소설 '쿠문'과 '정상인'을 읽어본 것이 전부였다. 그 둘은 너무 다른 내용과 주제의식을 담고 있었기에 이 작가가 소화할 수 있는 이야기의 스펙트럼은 어디까지인가, 불현듯 놀랐던 기억이 있다. 젊은 나이 탓인지 내 마음에 더 든 쪽은 환상적 요소가 강했던 '쿠문'이었는데, ⟪이슬라⟫는 감사하게도(?) '쿠문'에 가까운 중편소설이었다. ⟪이슬라⟫는 '죽음을 낳는 자궁', 즉 사람들의 죽음을 통제하는 신인 이슬라가 슬픔에 젖어 자신의 할 일을 저버린 뒤 진동하는 세계의 모습을 그려낸다. 죽음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간 바깥의 물리적 시간 일체가 흐르기를 중단했다. 임종을 눈앞에 둔 노인은 죽지 못해 죽음을 흉내 내고, 자신을 죽여달라 애원하고, 급기야 아들을 선동해 마을의 자연유산에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죽일 수 있는 독이 배어있다고 속이기에 이른다. 출산을 기다리고 있던 여자는 만삭의 상태를 견디다 결국 집을 뛰쳐나간다. 주인공 '나' 또한 아이도, 어른도 아닌 생각 많은 열다섯 살인 채로 백 년을 산다. 그는 함께 미쳐버린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뒤로 하고 마을을 떠나 '아야'라는 소녀를 만나는데, 죽음이 다시 만연하기를 고대하는 '나'에게 아야는 천진하게도 이렇게 묻는다. "넌 성장을 하는 대신 세상을 돌며 모험을 할 수 있어. 생각만 해도 신나지 않아? 아무도 죽지 않으면 슬퍼할 이별도 없는 거잖아. 각자 원하는 방식대로 살면 되고.(67, 강조는 필자)"

 그러나 일반 사람들의 '살기 원하는 방식'은 퇴폐적으로, 자극으로 가득하지만 결국은 권태와 절망을 낳는 방향으로 흐른다. 약물중독, 고문 체험, 유사죽음 놀이, 맹목적인 거리 시위 등, 내용적으로 무의미한 만큼이나 효과 없는 건강의 소모가 유행한다. 물론 중세 수도사들처럼 루틴화된 공부와 노동을 통해 광기를 막아내려는 '학교'의 사람들도 있고(83), 차분하게 자연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숲의 사람들도 있으며(74), 애초에 죽음의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아 무엇이 달라졌는지 모르는 채, 그저 놀이와 애정의 갈구만을 반복하는 어린아이들도 있다(114). 아야의 말마따나 세계의 정지를 기회로 생각하고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그때그때마다 자유롭게 설정하는 에디/애슐리라는 인물도 인상깊다(98). 물론 이들 가운데는 수영에, 독서에, 여행에 희열을 느끼다가도 가시로 된 부메랑 같은 우울감에 반복적으로 빠져드는 우리의 '나'가 있다. ⟪이슬라⟫의 주된 재미 중 하나는 이처럼 죽음과 시간이 소멸한 세계에 인간이 저마다 대처하는 방식들에 대한 다채로운 상상들이다.

 잠시 줄거리를 읊어보면, 아야와 '나'는 함께 시간을 보내다 아야는 여행을, '나'는 학교에 머무르기를 택하면서 한동안--실제론 몇 해 이상을--헤어져 있게 된다. 그러다 어느 검투경기장에서 재회하는데, 이 재회 이후로 아야는 자신이 사실 과거에 죽음을 관장하는 신인 이슬라였음을 기억하게 된다. 아야의 되돌아온 기억에 따르면 "세련된 기계(126)"처럼 제때에 곧잘 죽음을 잉태하고 출산하던 이슬라는, 새끼 뱀들의 죽음 때문에 그녀에게 원한을 가지게 된 어미 뱀의 증오심에 지나치게 공감해버린 뒤 신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기를 중단한다. 그리고는 어미 뱀이 자신의 새끼들을 위해 그토록 갈구한 "생이라는 게 무엇인지(127)" 궁금해져 자신의 기억을 제거한 채 인간 소녀 아야로서의 삶을 체험한다. 아야는 '나'와 우정 어린 사랑을 주고받고 자유롭게 방랑하며 생의 경험을 다채롭게 축적하지만, 인간에게 죽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나'의 이야기에 감화돼 이전의 힘을 되살리고, 죽음을 소환했으며, 시간을 재가동시킨다.

 나는 ⟪이슬라⟫가 '죽음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소설적 성찰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인간에게 유한성을 부여함으로써 의미를 추구할 추동력을 주고, 건강과 활력을 소중하게 여기게 하며, 도덕을 지키게 만든다. 또한 문자 그대로 살 만큼 살아 자신의 생을 마감하고자 의욕하는 이에게는--예컨대 '나'의 할아버지--선물과도 같은 사건이다. 그러나 반대로 죽음은 저주의 대상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제 아무리 어찌할 도리가 없는 운명이라 할지라도, 그 운명을 움직이는 것이 신적인 존재라 할지라도 그것들 모두에 강력한 원한을 품게 만든다. 또한 생은 '나'의 아버지가 종종 열어주던 단지 안의 사탕들처럼 달콤한 것이기도 하다. 생에는 학습, 사랑, 여행, 유희, 우정이 있다. 만일 ⟪이슬라⟫가 죽음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소설적 성찰이라면, 동시에 그것은 생의 슬픔과 기쁨에 대한 성찰이기도 한 것이다. 예컨대 노동은 가혹하고, 가족은 소중하다. 광기는 무력감을 선사하나, 열정은 생명력에 불을 붙인다.

 나는 여느 심약한 낭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살 충동을 강하게 느껴본 적이 있다. 그런 나에게 (상상된) 죽음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현실적인) 생의 슬픔과 기쁨은 무엇일까? 죽음의 신 이슬라가, 그리고 ⟪이슬라⟫가 내게 던진 질문은 이것이었다. 한심하게도, 질문을 활자로 옮긴 뒤에야 답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내게 죽음의 기쁨은 고등학생이 된 이래로 날 끊임없이 괴롭혀온 우울과 강박적인 불안의 종말이다. 죽음의 슬픔은 사랑과 글쓰기의 부재이다. 생의 슬픔은 나의 이런저런, 덕스럽지 못했던 순간들--이런 순간들이 누구에게나 있겠지? 싶다가도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여전히, 너무나 완벽해 보인다--과 내가 아직 화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생의 기쁨은 내 이런저런 덕스럽지 못했던 순간들을 상황의 산물로, 작은 실수로, 어쩔 때는 생의 부조리 그 자체로 이해해주고 내 인격과 연결짓지 않아주는 사람들과 나누는 사랑, 그리고 심지어는 내가 덕을 가졌는지 여부에 전혀 무관심한 대다수의 사람들과의 사소한 소통들이다. 카페에서 커피를 시킬 때 아르바이트생과 미소를 주고받는 따위의 상호작용 말이다.

 그렇다면 내게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생의 진정한 기쁨, 죽음의 진정한 슬픔은 완벽주의의 소멸, 어느 진지하고 찬란한 자유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