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G.H.에 따른 수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배수아 옮김, ⟪G.H.에 따른 수난⟫, 봄날의 책, 2020

 

 '장편은 서사, 단편은 인물'을 무의식중에 공식처럼 생각하며 지냈던 것 같다. 손보미 소설가의 단편이 서사와 서스펜스로 넘쳐나고, 오정희 소설가의 (하나뿐이었던) 장편이 인물을 중심으로 돌아간 것을 어쩌면 의도적으로 망각한 채로. 그런데 ⟪G.H.에 따른 수난⟫은 저 공식을 파괴하는 것을 넘어 처음부터 없었던 것마냥 무화시킨다. ⟪G.H.에 따른 수난⟫에는 서사랄 것이 없다. 가정부가 자신 몰래 치운, 자기 집에 속한 방에서 바퀴벌레와 마주하는 것, 그 바퀴벌레를 죽이는 것, 그리고 벌레의 사체에서 배어나온 하얀 체액을 섭취하는 것이 240쪽 남짓 되는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전부다. 그렇다고 해서 인물의 성격이나 매력이 뚜렷한 것도 아니다. 독자는 주인공이자 화자인 G.H.에 대해 그녀가 한때 고매한 예술적 취향을 가졌으며, 아마추어 조각가라는 사실,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아파트 상층에 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소설 전체를 굽어보았을 때 그와 같은 디테일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녀가 예술에 무지하고 손재주라고는 조금도 없으며, 같은 도시의 빈민가에 살고 있다고 해도, 심지어는 이름이 G.H.가 아니라 시몬느라든지 민영이 같은 것이어도 전혀 상관이 없다. 독자는 서사를 기대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G.H.라는 인물이 궁금해서, 인물에 매료돼서, 인물을 따라서 이 책을 완독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를 '인물'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 소설이 그리고 있는 수난(Passion), G.H.가 고백하고 있는 인간 G.H.의 수난은 바로 탈인간화의 수난이기 때문이다. 결론을 미리 누설하자면 그녀의 수난은 신이자 세계 자체가 내리는 은총과 동일하다. 수난이 곧 은총이라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이는 모순, 적어도 역설이 아닌가? 그래서인지 G.H.는 소설의 초반부부터 자신이 겪은 일--자신이 어린시절부터 공포심을 느껴왔던 벌레의 체액을 자발적으로 먹고 삼킨 경험--을 이해할 수 없다고, 따라서 인간의 언어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어쩌면 내게 일어난 그 일은, 이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일이] 사실이 되기 위해서 나는 계속해서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머물러야 하고, 계속해서 이해하면 안 되는 입장이어야만 한다."(18)

 

 이것은 마치 인간의 관점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를 설명할 수 없고, 신의 무한한 자비와 무자비한 정의를 조화시킬 수 없고, 신의 무한한 크기를 인간의 사유로써 규정하면서도 규정할 수 없는 것과 같다. G.H.가 구사하는 언어는 철저히 종교적인 언어인 것이다. 이제 종교적 언어로 증언되어있는 그녀의 탈인간화의 경험이 어떤 의미에서 수난이고, 어떤 의미에서 은총인지 따져보기 위해 우선 '인간됨'을 정의하고자 한다. ⟪G.H.에 따른 수난⟫과 직접적으로 유관한 사유만을 추출한다면 인간이란 첫째, 대상 또는 사물에 특정한 성질(큼, 작음, 예쁨, 추함 등)을 부여하는 존재고, 둘째, 이름(의미로 서로 얽혀있는 글자들로 빼곡한, 펼치면 부채 같이 생긴 물체는 '책')을 부여하는 존재고, 셋째, 가치, 특히 선악을 판단하는 존재다. 다시 말해 인간의 삶은 사태를 최대한 일의적으로 규정하는 작업이 무한히 반복되는 과정이다. 각각의 규정에 대해 차례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인간은 대상에 성질을 부여한다. G.H.에게 특히 중요한, 자주 언급되는 성질은 바로 '짬' 또는 '소금기 있음'이다. G.H.는 이전에 자신이 사랑한 남자의 눈에 입을 맞춘 적이 있다. 그녀는 그의 눈물로부터 소금의 맛을 느낀다. "당신의 눈물 속 소금은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이었다."(120) 그러나 이 짠 맛은 G.H.라는 개인의 관점에서만 느껴지는 주관적인 성질일 뿐이다. G.H.라는 개인의 관점과 무관한 남자의 본질, 즉 객체 또는 말하자면 일종의 단순 사물로서의 그의 존재 자체에는 아무런 소금기가 없다. "하지만 사랑의 공포에 떨던 그 순간, 다른 무엇보다도 나를 가장 불타오르게 만든 건, 소금의 가장 심오한 심연 속에서 소금기 없이 결백하고도 천진난만하던 당신의 본질이었다. [...] 그것[입맞춤]은 한 남자를 만들어내고 있는 여자였다. 당신이 나를 만들어냈듯이, 그것은 삶의 중립적인 기술이었다."(120, 강조는 필자) 여기서 나는 중립이 성질의 규정되지 않음, 즉 성질의 무규정 상태를 뜻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벌써부터 예상할 수 있듯이 성질뿐만 아니라 이름이 상징하는 정체성과 도덕을 포함한 모든 가치의 무규정성, 즉 절대적 중립의 서사가 앞으로 펼쳐질 것이다. 이 절대적 중립을 무관심으로 해석하면 수난이 되고, 사랑이라고 해석하면 은총이 된다.

 둘째, 인간은 대상에 이름을 부여한다. 이름을 부여하는 작업은 그것에 고유한 정체성을 규정하고, 다른 정체성을 가진 대상들과 차별화시킨다. 예를 들어 G.H.는 자신과 바퀴벌레에게 각각 다른 이름을, 다른 정체성을 지정함으로써 자신과 바퀴벌레를 차별화해왔다. 자신은 인간이고, 바퀴벌레는 벌레다. 자신은 익숙한 자아 그 자체고, 바퀴벌레는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공포스러운 괴생명체이다. 그러나 이 책의 클라이맥스에서 G.H.는 결국 자발적으로, 어떤 계시에 홀린 듯이, 그러나 동시에 매우 또렷한 정신을 유지하는 것처럼도 보이면서 바퀴벌레의 체액을 섭취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나 자신의 맛"을 느낀다(230). 이 충격적인 사건으로부터 우리는 두 개의 상호보완적인 해석적 테제로 뻗어나갈 수 있다.

 (i) 먼저 G.H.는 자신과 가장 반대되는 존재, 적어도 자신이 자신과 가장 반대된다고 여겼던 존재와의 합일을 경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이 여전히 G.H.로 남는다는 것을 깨닫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안도하면서도 동시에] 애통해한다. 그러나 이 머무름보다 중요한 것은, 바퀴벌레와 합일한 이후의 G.H.는 이전에 인간의 관점에 매몰되어있던 G.H.와는 전혀 다른 존재, 헤겔 식으로 말하면 자신의 부정과의 모순을 지양한 보다 고양된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철저히 자신이 아닌 것, 즉 '비아'와의 만남을 통해 진정한 자아로, 추후 상술하겠지만 세계 일체와 합일된 존재로까지 거듭난다.

 "내가 아니었으므로, 나였다. 내가 아니었던 것의 끝까지, 나는 갔다. 내가 아닌 그것이, 바로 나이다. 내가 더 이상 있지 않으면, 모든 것이 내 안에 있게 된다."(247)

 "나, 나는 생각했다. 내가 나 자신으로 변환하는 최고의 증명은 바퀴벌레의 흰 덩어리를 입에 넣는 일이라고. 그 방법을 통해서 나는 그것으로 가까이 다가갈 것이다...... 그것, 신성에게로? 그것, 현실에게로? 나에게 신성이란 바로 현실이다."(231) 

 

 그런데 여기서 어째서 신성이 곧 현실인가? 이에 대한 답은 두 번째 해석적 테제와 유관하다.

 (ii) 바퀴벌레의 체액을 소화, 즉 자신의 육체 안으로 들임으로써 G.H.는 바퀴벌레와 자신 사이의, 곧 정체성과 정체성, 궁극적으로 이름과 이름 사이의 차이가 소멸되었음을 체험한 셈이다. "[...]나는 사물에게 이름 주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 이름은 부속물이며, 사물과의 접촉을 방해한다. 사물의 이름은 사물과의 거리이다."(194) 정체성과 이름의 규정을 포기하고 나면 자아와 사물뿐 아니라 사물과 사물 사이의 차이 역시 소멸한다. "[...]지구는 태양이다. 지구가 태양이라는 것을 전에는 왜 인식하지 못했을까?"(155) 그리하여 앞서 언급한 절대적 중립은 지금의 맥락에서는 '무규정에 따른 무차별'의 의미를 띠게 된다. 그러므로 G.H.가 새로이 맞닥뜨리게 된 세계는 마치 스피노자의 우주처럼 일원론적으로 통일되어있다. 그 덕분에 G.H.는 종으로서의 바퀴벌레 일반과 동일시되어, 인간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산 바퀴벌레의 눈으로 바퀴벌레가 누렸던 드넓은 시공간, 유구한 역사, 생성소멸한 문명에 대해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벌레를 응시하면서, 나는 엘셸레 인근의 광대한 리비아 사막을 보았다. 나보다 수백만 년을 앞서 그곳에 있었던 바퀴벌레는 공룡보다도 더 앞섰다. 바퀴벌레를 보는 나는 이미 저 멀리 가장 오래된 도시 다마스쿠스까지도 볼 수 있었다."(154) 요컨대 G.H.와 바퀴벌레는 모두 생명이라는 것, 물질일 뿐이라는 사실에서 통한다. 인간은 벌레보다 딱히 중요하거나 지적이거나 아름답지 않다. 이렇게 존재자들 사이의 가공할 만한 중립이 성립한다. "중립. 나는 사물을 연결하는 근본적 요소를 말하는 것이다."(136) 이와 같이 급진적인 물질적 평등주의는 초월--물질적 세계를 떠남으로써 무엇이라도, 어떤 긍정적인 것을 획득할 수 있다는 희망 또는 그 획득 자체--의 허위를 고발하는 더더욱 급진적인 결론으로 내달린다. 초월은 허위이므로, 신성은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다. 신성은 현실과 구별되어있지 않다. 세계 그 자체가 신이며 세계 그 자체가 성스럽다. 

 "불현듯, 이제는 초월할 수 없다고 단순히 이해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초월할 수 없는 시점이 도래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구원은 사물 자체에 내재해야만 한다. 사물 자체에 내재하는 구원은 바퀴벌레의 흰 덩어리를 입안에 넣는 일일 것이다."(226)

 "완전하게 무관심하고 완전하게 비인격적일 만큼 위대한 사랑을 통해--내가 사람이 아니어야만 가능한 그런 사랑을 통해. 그는[신은] 내가 그와 더불어 세계가 되기를 원했다. 그는 내 인간의 신성을 원했다. 그러려면 일단 인간으로 구성된 나를 먼저 벗어던져야만 한다."(175)

 

 달리 말하면 "사랑은 변함없이 늘 [저기가 아닌 여기에] 있어왔다."(236) 이 세계에는 결핍이 없으며, 이곳은 니체의 대지처럼 풍요롭기 그지없다. 이로부터 인간됨의 마지막 속성에 대한 G.H.의 진단을 어렵지 않게 도출할 수 있다. 인간의 마지막 속성은 바로 가치, 특히 선악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물과 사물 사이에 아무 차별이 없음을, 고로 사태와 사태 사이에도 아무 차별이 없을 것임을 신비적으로 체험한 지금, G.H.에게 도덕이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것인가? G.H.가 자신의 수난을 통해 만난, 무관심한 동시에 사랑으로 충만한 신은 "[...]대체로 선했는데, 왜냐하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176) 그런 신은 모든 생명을 이미, 그것이 태어나기도 전에, 사는 중에, 죽은 이후에까지, 강조하건대 벌써 용서한 상태다. 마치 니체가 피안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생성소멸하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절대적으로, 영원히 회귀해도 좋을 것으로서 긍정한 것처럼. 

 "은혜의 상태가 영구적이므로, 우리 모두는 항상 구원받는다. 세계 전체는 은혜의 상태에 있다. [...] 이제 나는 안다. 지옥불의 위험은 없다. 은혜의 상태는 천부적이다."(202)

 "용서는 살아있는 물질의 속성이다."(90)

 

 이렇게 G.H.의 "생성의 플라스마"에 대한 육체적 관조이자 "금단의 열매를 먹"는 신비체험(202), 그러나 "절정[은] 없는 엑스터시"(221)에 대해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기술해보았다. G.H.에게 이 수난-은총은 쾌락을 주는 동시에 고통을 안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쾌락인 동시에 고통이다. "신에게 나는 내 지옥을 바쳤다. 첫 번째 흐느낌이 터지고, 내 끔찍한 쾌락으로부터, 내 축제로부터 새로운 고통이 탄생했다. 지금 내 사막에 핀 꽃처럼 가냘프고 무력한 고통. 이제 흐르는 눈물은 사랑의 눈물과도 같았다."(183) 이제 내가 이 글의 초반부에 미리 내놓았던 결론을 자신있게, 근거를 가진 채로 반복할 수 있게 됐다. "필요한 것은 은총의 일격뿐이다. 그것은 수난이라고 불린다."(236, 강조는 필자) 

 아주 장황한 독후감을 써버렸는데,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내 장황함이 어쩔 수 없는 성격의 것임을 이해해줄 것이다.


 ⟪G.H.에 따른 수난⟫을 읽기로 결심한 유일한 이유는 역자가 소설가 배수아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소설들은 서울 한복판에서 날 다른 세계로 데려다주곤 했고, 문학이 시공간의 논리를 아주 아름답고 깔끔하게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즉물적이고 투박한 문체로 증명해주었으니까. 평소에 어떻게 이런 신비소설의 대가가 한국 문단의, 내가 생각하기에는 사실주의와 최근 들어서는 정치적 올바름의 구체적 실현, 그리고 소수자의 삶에 대한 왜곡 없는 재현을 최고의 소설적 미덕들로 중시하는 문학적 풍조 가운데서 탄생할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는데 ⟪G.H.에 따른 수난⟫에서 그 답을 찾은 것 같다. ⟪G.H.에 따른 수난⟫을 읽으면서 나는 소설가 배수아의 최근작인 단편집 ⟪뱀과 물⟫, 장편소설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적인 선후관계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소설가 배수아는 자신의 확고한 취향을 신뢰하고, 그에 따라 자신이 사랑하게 된 책들을 열정적으로 수집하여 원하는 영향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흡수해낸 듯하다. 나 역시 나만의 취향, 나만의 '이미지', 그리하여 나만의 오리지널리티를 구축할 필요성을 느끼며, 이 구축을 도와줄 선배이자 스승 격의 작가들을 찾아나서야 한다고 결심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