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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zehn

에스프레소 콘파냐를 마시는 3가지 방법(2020.5)

- 내가 본 몇 편 안 되는 홍콩 영화들에 대한 동경을 담은 소설.

2018년 10월 홍콩에서

 

집앞 에스프레소 바의 에스프레소 콘파냐

 

 내가 사랑했던 남자들은 나와 빠르게 헤어졌다는 점 외에도 하나의 공통점을 더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작은 방에서 혼자 살아온 지가 오래인 사람들이었다. 그 안에서는 이상하게도 두 극단으로 나뉘었다. 한 쪽은 매일 두 끼 이상을 무조건 집에서 요리를 해먹어 지나치게 성실하다는 느낌마저 들었고, 다른 쪽은 가스레인지를 켜본 적도 없을 정도로 전혀 요리를 하지 않았다. 한 쪽은 또 집을 알뜰살뜰 꾸몄으며 스스로 고른 가구를 들여 그 그림자까지 청소했다. 소품점의 유리창 너머로 예쁜 램프가 보이면 만 원 정도는 지불할 용의가 있는 이들이었다는 뜻이다(그렇게 나는 선인장 모양, 빵 모양, 달 모양 램프 아래서 책을 읽다 낮잠을 자곤 했다). 반면 다른 쪽의 애인들에게 집은 여행자용 숙소에 불과했다. 그들은 모든 볼일을 밖에서 해결했고, 오직 잠을 청하기 위해 침대에 몸을 던졌다가 해가 뜨면 마치 트램폴린을 뛰는 것처럼 잽싸게 집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아침식사는 주위의 편의점에서 그냥저냥 아침을 해결했으며, 청소는 할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집을 잘 어질러놓지를 않았으니까.

 이 차이는 사소하면서도 커다랗고 역시나 사소했다. 내게 문제가 된 것은 이런 것이었다. 사랑을 나누기 위해 애인들의 집으로 들어갈 때의 내게 그 공간들은 상당히 임시적인 거처였다. 애인의 집이라곤 해도 내가 사는 공간은 아니었고, 비굴하지만 20대 후반이 되어서도 부모님 계신 본가에 신세를 지고 있는 반(半)어른 처지였으므로 적어도 새벽에는 그곳을 빠져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집에서 요리를 전혀 하지 않은 이들의 경우 문턱을 넘어서면서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여기는 모텔이고, 트램폴린이고, 말하자면 텐트다. 그러나 집에서 요리를 해 먹은 애인들은 자신이 꾸미고, 치우고 채우고, 비운 집안으로 나를 기꺼이 들이면서, 대체 무슨 기분이었을까.

 나는 이 질문을 물을 기회를 잃어버렸다. 지금 사귀고 있는 제이는 어디서든 요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만드는 음식은 라면조차 맛이 없다.

 제이와 사귀기 직전에 헤어졌던 사람은 얼마 전 내 생일날에 연락을 해왔지만 답장을 주지 않았다. 헤어지기 며칠 전, 그의 가방에서 수신자가 적히지 않은 연애편지를 발견했는데 겉면의 정갈한 글씨체를 보자마자 나는 그가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적어도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간 내게 써준 편지에는 사랑한다는 말조차 삐뚤빼뚤했기 때문이다. 그는 절대 아니라고, 미래에 찾아올 내 생일을 위해 편지를 미리 쓰고 있었던 것이라고, 정말 좋은 문구가 떠올라서 사랑한다는 말을 더 화려하고 내게 더 깊이 아로새겨지도록 써놓고 싶어 영감이 사라지기 전에 적어놓았던 것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내 생일은 그날로부터 5달 정도 뒤였으므로 그를 믿기가 어려웠다. 나는 그 즈음 단골 카페에서 눈인사를 주고받게 된 아르바이트생 제이에게 다가가 관계를 시작했다. 요즘도 만약 내 생일이 그때 5달이 아니라 5일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더라면 그를 당연히 믿었으리라 생각하고는 우스워지곤 한다.

 제이와 만난 지 한두 달쯤 되었을 땐 내게도 나만의 집이 생겼다. 일을 그만두자마자, 그러니까 수입원이 끊겼는데 오히려 독립이 이루어졌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4년제 대학을 7년째에 졸업한 뒤 나는 한동안 논술학원에서 강사 일을 했다. 대형 학원가 한복판에 왠지 왜소하게 끼인 듯한 작은 학원이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잠시 설레는 마음을 가졌던 시간을 기억한다. 전부터 글을 읽고 쓰는 시간이 줄어들지 않을 수 있는 일자리를 원해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일과 일상이 분리되지 않는 삶을 동경했다. 물론 일이 일상 쪽으로 흘러넘치는 워커홀릭보다는, 일상이 일터에서도 이어지는 배부른 소크라테스가 되기를 꿈꿨다. 그러나 현실은 내 기대를 배반했다. 똑같은 책을 읽어도 내 영혼을 고양시키기 위해 읽는 것과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 읽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나는 내용을 단순화시키는 일에 매달렸고, 그렇게 해도 학생들의 눈이 멍하거나 찡그려져있을 때면 그들에게서 느닷없이 퇴원 통지를 받을까 봐 불안했다. 그 뒤로는 만회할 만한 강의를 했다고 생각될 때까지 집에 돌아가서도 움츠러들었다. 수강생들끼리 내 수업시간에 몰래 스마트폰으로 모두의 마블을 플레이하는 악몽을 꾼 적도 있었다.

 마음만 곪은 것은 아니었다. CEO의 결재서류마냥 쌓여있는 학생들의 답안을 채점하다 오른쪽 손목과 엄지엔 염증으로 물이 찼고, 2년째엔 성대 결절이 왔다. 나는 동네의 정형외과와 이비인후과, 한의원을 순회하며 얼마 되지도 않는 휴식시간들을 흘려보냈다.

 그러다 지금으로부터 멀지 않은 때, 나라에 바이러스가 돌기 시작했다. 한두 달 뒤에는 전 세계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을 말리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학생 수가 급감하자 막내부터 잘라야 한다는 데 막내를 제외한 모두가 동의했고, 나는 억울해 하면서도 지나치게 쉽게 체념한 채로 학원의 문을 나섰다. 처음 들어왔을 땐 직접 밀어야 했던 문이 자동문으로 바뀐 것은 몇 달 전의 일이었다. 그 사실이 유달리 내 주의를 끌었는데, 손을 대지 않아도 공간이 알아서 나를 밀어내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간 모아온 돈 일부를 보증금 삼아 원룸을 얻었다. 모두가 나를 위로하기 바빴으므로 오히려 혼자 있고 싶었다. 부모님의 위로가 가장 불순했다. 위로의 이면에는 딸이 마치 레토르트 식품을 장바구니에 넣듯 곧바로 새 일을 구하리라는 기대가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벌써 노동에 진절머리가 나버렸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잘렸을 땐 진심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지만, 오랜만의 특강 없는 주말을 맞고 나니 그제야 내 마음속이 선명히 들여다보였다.

 고작 3년 노동한 것을 가지고 이렇게 말하는 일이 철없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철이 없는 만큼 체력도, 정신력도 부족했다. 팔자 좋은 소리라 비난당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당장 내가 지쳐있었으니까. 비좁고 아늑한 새 집으로 짐을 옮기고 나니 겨우 낙천적으로 생각할 용기가 생겼다. 안 그래도 밖에서 데이트를 하기가 힘들어졌는데, 그냥 한곳에 함께 붙박이면 되니 기쁘다고. 제이는 나를 위로하지 않았고, 제이의 위로하지 않음이 내겐 가장 순수한 위로였다.

 제이를 우리 집에 들였다고 해서 위에서 던진 물음에 나 스스로 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 역시 집에서 전혀 요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만든 요리 또한 시리얼조차 어딘가 밍밍했다. 야식 조리는 죄다 근처 통닭집들의 몫이었다. 

 제이의 가장 큰 매력은 자기애도 없고 자기혐오도 없다는 점이었다. 만사를 나의 욕망이나 윤리의 문제로 환원시켜온 나와 달리 그는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하는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았다. 화려한 운동화를 신고도 자기 발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고, 낭패가 될 만한 일이 생기면 21세기 인간 주제에 하늘을 탓했다. 그래도 내 일이니 책임은 져야지, 라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반대로 나는 우울한 일이 생기면 스스로를, 그것도 그 일과 관련이 없는 내 작은 역사 전부를 탓하는 게 취미였는데 그런 내게도 그는 똑같은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나는 뻔뻔스럽게도 그의 하늘 탓을 사랑했다.

 제이는 눈썹의 두 끝이 올라가 사나워 보였지만 입술만은 늘 웃는 상이었다. 연애 초창기에 나는 그의 해맑은 얼굴을 쳐다보면서 속으론 그도 어쩔 수 없이 어떤 비밀스런 자만심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비밀스러운 자만심이라도 없으면 삶은 배설과 예술, 수면과 꿈의 굴레에 불과해질 텐데,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게 내 편견이었다. 그는 예컨대 3시간 공을 들여 간만에 일기를 쓰면 그것을 완성하기 무섭게 쑥스럽다며 내게도 자랑하지 않고 라이터로 태워버리는 류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에겐 숨겨진 긍지가 없었다. 겉으로 티가 나는 긍지가 없었듯이 말이다.

 제이의 취미는 50쪽을 넘기지 않되 철학적인 글을 읽는 것이었다. 언젠가 왜 그런 취미를 들었냐고 물었을 때 그는 50쪽이 넘어가는 철학 책은 읽기가 괴로운 반면, 짧은 글을 읽으면 별다른 괴로움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손쉽게 지혜를 소유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했다. 그런 제이가 가장 아낀 글은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이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가면을 쓰고 용기가 뭐냐, 절제가 뭐냐, 경건은 또 뭐냐 등 좋은 삶—이란 게 있기나 하다면—을 살기 위해 꼭 답해야 할 물음들을 던졌다. 문제는 그 현명하다는 소크라테스마저 제이에게나 나에게나 딱히 만족스러운 대답을 못 내놨다는 것이었다. 결말에 이르면 옆에서 텍스트를 곁눈질하고 있던 내가 화를 내기 직전이 되었던 것과 달리, 제이는 소크라테스가 적어도 대화 상대들의 무지를 폭로하는 데 성공했음을 즐거워했다. 그는 처음엔 오만했던 상대들이 소크라테스의 문답에 끝내 “사실 그렇습니다”, “물론 그래야겠죠”, “그럽니다”, “그건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참된 말씀입니다”라고 새침하게 시인할 때 그들이 내비칠 표정을 상상하는 일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가끔은 소크라테스의 논증을 이해하는 일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가 한낱 익살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데 매번 놀랐다.

 딱 떨어지는 대답이 없는 게 넌 짜증나지도 않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되는 대로 잘 살고 있던 사람에게, 대답하지 못하면 더 이상은 잘 못 살 것 같은 그런 질문을 던져놓고 끝장을 안 보여주는 게 잘하는 일이냐고, 얼마간 경멸하는 투로, 여하튼 그런 의미들을 샅샅이 담아,

 “무너뜨리기만 해서 어쩌겠다구”라고 묻자 그는,

 “세우기 위해 세우는 것보다는 나아”라고 답했다. 그러면 나는 그날 밤, 아테네의 성인이 떠먹여주는 정답 없이도 잘만 자는 제이 옆에서 뜬눈으로 나 자신의 오만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단숨에 독서를 마치면 그는 꼭 담배를 피워야 했는데, 하루는 내 방 안에서 피우면 안 되겠냐고 묻기에 엉덩이를 때려줬다. 그는 그 길로 침대에서 일어나 팬티바람으로 몸을 비비 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영화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이 혼자 맘보춤을 추는 것 같았다. 이 이야기를 해줬더니 제이가 몹시 좋아했다. 장국영 완전 치명적이잖아, 신난다, 하고 중얼거리면서. 하지만 사실 나는 결말에 잠시 등장한 양조위를 더 좋아했다. 그는 러닝타임 내내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주연들의 이야기가 마무리 지어질 때쯤 갑자기 튀어나와 2분 정도 말없이 외출을 준비하는 역을 맡았다. 그러니까 <아비정전>은 92분 동안의, 포스터 말마따나 고작 “1분의 추억”만을 남긴 장국영의 허탈한 연애사와 2분 동안의, 양조위의 외출 준비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렇게 죄다 허탈하게 끝나버려도 누군가는 새 아침을 시작한다, 이런 얘기 아니겠어? 영원이 없어도 내일은 있는 거야, 라고 내가 환희에 차서 말하자 제이는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집 밖으로 나가 마트에서 비엔나소시지와 와인을 사왔다. 그는 마스크를 벗지도 않고 턱 쪽으로 내리기만 한 채 나와 소시지를 생으로 뜯어먹고 와인을 마시다, 문득 진지하고 심지어는 미안하다는 듯한 얼굴로, 그 장면은 사실 속편을 위한 티저 같은 것이었는데, 흥행에 실패하는 바람에 양조위 주연의 속편이 못 나온 거라고 마치 자기가 감독이었던 것처럼 내게 고백했다. 처음부터 교훈 따위는 없었다는 거였다. 나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당분간은 영화를 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영화라는 매체가 야속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영화에 대해 대화했다. 나는 늘 제이가 씨네필이라고 생각했다. 제이는 내 생각을 이중의 의미에서 거부했다. 첫째, 자기 같은 불성실한 감상자가 씨네필이라면 진짜 씨네필들이 억울하다고, 둘째, 설령 자기가 씨네필인 적이 있었다 해도 지금 씨네필인 것은 아니라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영화는 내 부족한 감성을 충전해주는 도구였어. 나한테는 일어나지 않을 희극과 비극을 누리는 인물들한테 이입하면서 내 재미없는 인생을 위로한 거야. 오랫동안 혼자 살아왔고, 되는 일도 없이 지루하기만 했으니까. 그러다 널 만났고, 진부한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눈앞의 일들만으로도 필요한 감성이 모두 채워졌어. 말을 마친 뒤엔 뜸을 들이더니 제이답게 이렇게 덧붙였다. 감동 받지는 말아줘, 너랑 싸우면서 느끼는 고통도 감성에 포함되는 거니까. 그건 사랑하면서 느끼는 즐거움만큼이나 끔찍하고.

 나를 만나기 전에도 제이는 낮에 카페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때는 밤에 틈틈이 시나리오를 썼던 게 지금과 달라졌을 뿐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시나리오가 영화화되리란 희망을 품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는 게 이유였다. 나는 웬만하면 그의 쿨함을 독실하게 믿어주는 편이었지만, 이 주장만큼은 아직도 긴가민가하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초인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 긴가민가하는 것과 같은 종의 머뭇거림이었다. 아무튼 어느 날 저녁 그는 맥주 캔을 사이에 두고 내게 그 시나리오의 줄거리를 말해줬다. 플롯이 단편영화치고 복잡했던 데다, 내가 슬슬 취해가고 있었으므로 줄거리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나는 그저 자기가 쓴, 어찌 보면 실패한 시나리오에 대해 가뿐히 이야기하는 한 인간에게 빠져 들었다. 자신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뜻깊었을 수도 있는 시간이 단지 무(無)에 투입되는 데 동의할 수 있는 인간에게 말이다. 우리는 그날 처음 잤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랜 시간 멍하니 누워있었던 것을 기억하면 나는 정신도 없고 꽤나 행복했던 것 같다. 그가 역시나 처음으로, 방 안에서 담배를 피우겠다기에 중고서점에서 사두었던 성경으로 응징하기도 했다. 우리는 이 날 있었던 일들을 마치 둘만의 의례처럼 여러 번 반복했다. 제이가 자신의 시나리오와 욕심 없음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는 그의 ‘영화화 따위는 원하지 않았다’ 정신에 매료돼 키스를 퍼부었으며, 적당히 섹스를 즐기다 방 안에서 담배를 피우겠다는 그를 내가 중고서점에서 산 성경으로 응징했다.

 그 의례가 5번짼가, 6번째로 되풀이된 어느 날이 기억에 남는다. 성경으로 응징을 당한 제이는 담뱃갑이 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잠시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내가 모르는 외국 힙합을 몇 곡 틀었다. 항불안제를 의인화해서 귀여운 애칭으로 부르고 자살 충동을 고백하는 일이 그쪽 동네의 최신 유행인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이 느끼는 불안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동시에, 어떤 언어를 써서든 사는 게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의 진정성이나 의심하는 나 자신을 반성했고, 궁극적으로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슬퍼졌다. 반면 제이는 옆에서 멜로디를 따라 연신 Xanny! Xanny!를 외치며 고개를 흔들어댔다. 그는 내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이유로 행복해 하고 있었고, 그 순간 나는 우리가 같이 살고 있는 사이가 맞는지 의아스러워질 정도의 낯섦을 느꼈다.

 ‘Xanny!’ 사건으로 나는 내가 제이와 사귀는 것을 넘어서 친밀하다는 확신을 잃어버렸다. 이 상실은 몇 달 뒤, 카페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어느 빌라 2층의 창문에서 제이가 다른 여자와 함께 담배를 피우는 것을 봄으로써 단순한 느낌이 아닌 현실이 되었다. 두 사람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이, 잔뜩 벌게진 얼굴로 틈틈이 키스를 나눴다. 얼마 뒤엔 제이도 창문 아래서 증오의 우주선을 쏘아올릴 듯 이성의 나사를 풀고 있는 날 발견했다. 안타깝게도 그 즈음엔 우연히 눈인사를 주고받는 남자가 없었으므로, 당분간은 혼자서 지냈다. 나는 독서를 하거나 자위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혼자 사는 사람이 보람을 느낄 만한 일은 그 둘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찔함이 가시고 나면 거의 반사적으로 왜 제이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고민했다. 나는 양조위를, 그는 장국영을 좋아해서? 아니면 내가 실내에서 담배를 못 피우게 해서? 이건 피우겠다고 고집 피우는 쪽이 미친 거 아닌가? 나는 별의별 일들을 전부 되새김질하다 우리의 이별에 역시 나의 다른 이별들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중요한 이유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어쩌면 제이에게는 달랐는지도 모르겠다. 헤어지기 며칠 전, 철학에 대한 제이의 태도를 두고 내가 한마디 쏘아붙인 적이 있었다. 우리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손상시킬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에겐 내밀한 뭔가가 건드려지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발단은 무화과 타르트를 굽는 원데이 베이킹 클래스에 가보자는 내 제안을 제이가 거절한 데 있었다. 거절 자체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거절의 이유가 아주 웃겼다. 타르트 따위를 구울 시간에 니체를 한 줄 더 읽겠다고—당시에 그는 아직 읽지 않은 플라톤의 대화편이 몇 백 쪽짜리거나 난해하기로 소문난 녀석들뿐임을 깨닫고, 대신 짤막한 아포리즘으로 구성된 니체를 읽는 일로 지혜 수집을 이어가고 있었다—제이가 빈정거린 것이다. 하지만 나는 철학이 무화과 타르트를 굽는 일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철학자의 삶도, 어디에 빗대야 할까, 이를테면 미래에 인간처럼 배설하는 인공지능이 나왔는데 아직 자기 똥을 치우는 능력은 탑재되지 못해서 그 똥을 치우기 위해 누군가를 마땅히 고용해야 한다고 가정했을 때, 그 직업인의 삶보다 딱히 고귀하지 않다고 믿었다. 똥 치우는 것도 어떤 필요고, 지식에 대한 욕망이나 실존적 의문에 응하려는 일도 또 다른 필요일 뿐이 아닌가? 활동에는 아무런 귀천이 없는 거라고, 초인 후보인 제이도 당연히 동의하리라 짐작하면서 함께 책을 읽어왔는데, 막상 그는 내내 어떤 허영심을 가진 채 철학을 대해왔다고 생각하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철학이 무슨 네 패션이야?”
 “아아, 그림자는 나의 패-션 스타일.”

 그때 제이는 제대로 대답하기는커녕 래퍼 씨잼의 ‘포커페이스’를 흥얼거리고 말았다. 자신이 꽤나 진지하게 조롱당했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내 말을 가볍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가 내 물음을 마음에 묻어뒀을 리 없다고 생각한 이유였다.

 아무튼 제이와 헤어지고 한 달쯤 됐을 때 내가 살던 빌라의 1층에 작은 카페가 들어섰다. 장사가 될 만한 골목이 아니어서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손님이 늘더니 나중에는 줄 서서 먹는 집이 됐다. 사실 카페라고 부르기엔 앉을 곳이 없었고, 아메리카노도 팔지 않았다. 에스프레소 바라고 부르는 편이 나았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밖에서 기다렸을 때와 같은 포즈로 가슴 높이의 바 앞에 늘어섰다. 그리고는 여러 종의 에스프레소 베이스 음료를 호두과자만한 잔에 마시고 떠났다. 나 역시 캡모자를 눌러쓰고 어기적거리며 계단을 내려와 어느 샌가 주민이 아닌 척, 다른 사람들처럼 멀리서 찾아온 척 슬그머니 줄에 가 섰다. 내 차례가 돼서 들어가면 커피를 마시기보다 주인이 커피를 만들고 주인 뒤에 있는 또 다른 주인이 설거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꽤 오랫동안, 누군가에겐 하염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길게 눈길을 던졌다. 안 그래도 북적이는 바의 회전율을 늦추고 단골이자 민폐가 되는 데서 쓸쓸히 내 존재감을 찾았던 것이다.

 그렇게 한두 달이 지나갔다. 누가 뭐라 한 적이 없었음에도 슬슬, 사람이 바글거리는데 가만히 서있기만 하는 일이 쑥스러워졌다. 나는 손님이 없는 오픈 시간에만 바를 찾아가 다른 일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바로 에스프레소 콘파냐를 마시는 다양한 방법을 연구하는 일이었다. 에스프레소 콘파냐, 줄여서 콘파냐는 에스프레소 위에 생크림을 얹은 음료로, 흑과 백이 서로간의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하는 음료라고 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뭐랄까—좀 더 되는 대로 지껄이자면—미학적으로 연구 가치가 있다는 뜻이었다. 스스로에게 꿈꾸듯이 물었다. 직업이 콘파냐를 마시는 다양한 방법을 연구하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우구스티누스 연구나 르네상스 회화 연구 등과 나란히. 아니, 삶의 의미 자체가 콘파냐를 잘 마시는 데서만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콘파냐를 마시지 않는 평소에 겪는 낭패는 어이없을 정도로 무의미해져서 더 이상 낭패도 아니게 될 텐데 말이다. ‘무의미는 자연스레 비존재로 흘러버린다.’ 나는 내가 어느 새벽 제이의 곁에서 비몽사몽간에 중얼거린 이 명제를 기억하고 있었다. 반대로 부재하는 것도 의미를 가지는 한에는 나를 괴롭혀댔다. 콘파냐를 이런저런 식으로 마셔보며, 나는 이따금씩 내 삶의 의미 있는 부재자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1주일 정도 진행된 연구의 결과를 나는 예전에 시립미술관에서 사온 수첩에 정리해뒀다. 첫 문장은 “콘파냐를 음미하는 데는 세 가지 정도의 방법이 있다”였다.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나서 적어도 서른 번은 다시 읽었으므로, 나는 전문을 거의 외우다시피 하고 있었다.

 첫째, 스푼을 삽처럼 잔에 꽂은 뒤, 제일 아래층에 깔린 에스프레소를 스푼에 담고 끌어올려 크림과 함께 떠먹는 방식. 스푼의 노동이 무용하게 느껴질 정도로 커피보다는 크림 맛이 진하게 난다. 단점은 에스프레소를 담은 스푼이 지나오는 크림층이 더럽혀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크림을 더럽히지 않고서는 콘파냐를 마실 수 없다. 콘파냐를 마시려는 자는 크림을 더럽혀야만 한다. 또 다른 단점은 크림이 에스프레소에 비해 빨리 동이 난다는 것이다. 마지막에 가서는 순수 에스프레소만을 홀짝대야 한다. 그래도 도구를 가장 적극적으로 쓰기에 고상해 보이고, 깨끗하게 먹을 수 있으며 에스프레소가 크림에 묻어 생기는 우연한 무늬를 감상할 수 있다.

 둘째, 스푼을 이용하지 않은 채 잔을 그냥 들이키면 크림은 무거워서 입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에스프레소만 마실 수 있는데, 그렇게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삼킨 뒤 입 안에 남는 씁쓸함을 크림으로 달래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에스프레소의 맛은 에스프레소대로, 크림의 맛은 크림대로 온전하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에스프레소는 에스프레소대로 너무 쓰고, 크림은 크림대로 너무 달기 때문에 극단적인 맛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이 방식을 추천하고 싶지 않다. 물론 콘파냐를 시키는 사람이 극단적인 맛을 싫어할 가능성은 낮을 것이다. 심심한 맛이 좋은 사람은 카푸치노를 시킬 테니까.

 조금 숙련이 되면 에스프레소를 입안에 머금은 상태에서 스푼으로 크림을 떠먹는, 즉 입 안에서 비로소 두 순수를 섞어먹는 기술을 구사할 수 있다. 그러나 크림을 입 안으로 넣기 위해 입술을 여는 순간, 머금고 있던 에스프레소가 주르륵 흘러나올 수 있으므로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미관상 좋지 않을 일이 생길 수 있다. (나 역시 한 번 시도했다가 실패해서 옆자리의 힙스터들에게 따가운 눈총을 받은 적이 있다. 다행히 카페의 주인 분들은 고개를 돌리고 계셨다. 힙스터들은 베레모를 쓰고 있었으므로 예술가가 아닐 확률이 높았는데, 그들은 내 얘기를 쏙 빼놓고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완벽한 카페의 영상을 업로드했을 것이었다. 이런 근거 없는 경멸이 그들의 정당한 눈총에 대한 내 반격이다.) 아무튼 이 방법은 에스프레소가 흐르지 않도록 턱과 입술 주위 근육을 미세하게 조절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추천한다.

 셋째, 가장 무식하고 직관적인 방법인데, 스푼으로 잔을 휘저어 에스프레소와 크림을 완전히 섞어버린 뒤 마시는 것이다. 콘파냐의 색깔은 카페라떼와 같은 색이 된다. 이렇게 하면 에스프레소와 크림이 그런대로 적절한 비율로 섞여 입 안에 들어온다. 물론 무거운 크림 일부는 덩어리진 채 잔 속에 남게 되니 틈틈이 스푼으로 떠먹도록 하자. 이 방식은 먹기에 가장 편하지만, 콘파냐 특유의 색채대비를 소멸시킨다. (나는 딱 한 번만 이 방식을 택했다.)

 연구 내용을 블로그 같은 곳에 올린 것도 아니고, 혼자 보는 수첩에 적었을 뿐이었는데도 그날은 뿌듯해서 몸이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았다. 나는 그저 내 힘으로, 내 두 손으로 뭔가를 알아내고 향유하는 데서 내 존재의 가치를 찾고 싶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문제는 내 힘과 감각이 참 알량해서 그것들로 알아낸 것들에 대해선 아무 수요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불현듯 다시 경제활동 같은 것을 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힘들이지 않고 일할 수는 없나. 직업병 없는 직업은 없는 건가. 요즘 몸은 편한데 자꾸 늘어진단 말이야, 내일은 경제활동을 해봐야지, 경제활동을…… 그러다 잠들어서 다음날 오후 3시에 일어났다.

 오후 3시 15분 경 나는 머리를 감는 대신 후드티의 모자를 뒤집어쓴 채 에스프레소 바로 내려갔다. 여느 때처럼 콘파냐를 시키고 코를 한 번 긁적인 다음, 주인에게 혹시 일자리가 없냐고 물어봤다. 주인은 곧바로 난처해하면서 저희 카페가 커피 만드는 곳은 이렇게 작아서 사람이 두 명 이상 들어오면 움직이지조차 못한다고 말했다. 한 평도 안 될 것 같은 그 공간이 즉시 그의 말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숙련된 턱과 입술을 사용해 두 번째 방법의 난이도 높은 버전으로 콘파냐를 마신 뒤 총알처럼 바 앞을 빠져나왔을 뿐이다. 그 뒤로는 한 번도 그곳에 가지 않았다.

 제대로 지원해보기도 전에 해고당한 오후, 집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며 그래도 언젠가는 커피 만드는 법을 배워서 내 카페를 차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오늘날의 젊은이가 건물주 다음으로 자주 꿀 법한 꿈이었다. 나는 카페의 이름을 ‘die Philosophin’으로 짓고 철학책을 잔뜩 사서 책꽂이만으로 벽을 채우고 싶었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마다 철학자들의 말이 담긴 쪽지를 뽑게 해줄 계획도 세웠다. 갑자기 왜 철학이냐고 묻는다면, 내가 철학을 싫어하지 않는 것도 맞지만 제이가 책을 뒤적이던 모습이 순간 생각났기 때문이 더 컸다. 나는 내 삶이 연속성을 갖기를 원했다. 솔직히 말하면 사랑보다는 연속성이 좀 더 소중했는데, 이건 변명이나 거짓말이 아니다. 아마, 아마도 그랬다.

 나만의 카페를 차린다는 아이디어에 경도돼서 다음 날엔 레시피를 개발한답시고 마트에서 서로 다른 종류의 커피믹스를 구매해 방바닥에 늘어놓았다. 총 다섯 종류였던 것 같은데 나는 그것들을 정확히 정량의 5분의 1씩 머그컵에 담아서 그 위로 끓인 물을 부었다. 서로 다른 회사의 믹스들을 썼기 때문에 어떤 손님도 브랜드를 특정하지 못할 것이고, 조금 안일해진다면 공산품으로 만든 커피라고도 상상하지 못할 것 같았다. 게다가 믹스 커피는 원래 맛있기 때문에 내가 차린 카페도 빌라 1층의 카페처럼 인기가 좋겠지 싶었다. 나는 잠시 벼락부자가 되면 무엇부터 살지를 고민하다가 커피가 식기 전에 한입 마셔 보았다. 맛은 최악이었다. 나는 벼락부자가 되는 계획을 취소했다. 대신 얼마 전에 배송 온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포장지를 뜯었다. 당연히 여러 권으로 분권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배송 온 책은 벽돌처럼 두껍고 펼치기조차 힘들었다. 산책이라도 할 겸 카페들을 전전하며 읽을 생각이었지만 절대 바깥으로 들고 나갈 무게가 아니었으므로 나는 나흘 정도 나 자신과 내밀한 시간을 보냈다.

 나는 마침 백건우가 녹음한 베토벤 소나타의 CD를 손에 넣은 상태였다. 한껏 고상한 척을 하며 CD를 라디오 속에 넣고—CD를 위해 라디오를 산 멍청이가 나다—피아노 선율 곁에서 소설을 읽었다. 그렇게 발트슈타인 1악장의 가뿐하지만 위태로운 발걸음 속에서 신의 질서를 거부하는 이반의 두 볼이 달아올랐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베토벤과 백건우 사이에서 나는 황홀해졌고 황홀한 만큼 비참해졌다. 그들은 도스토예프스키거나 베토벤이거나 백건우였지만 나는 그냥 나였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최고의 보물은 나흘 정도 스스로와 내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자유였는데, 그것은 단순히 내게 직업이 없다는, 나는 노동하지 않는다는 간명한 사실로부터 기인했다. 자유라는 결과는 모두가 선망하지만 그 원인에 대해서는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바로 그런 종의 인과관계만이 내 하나뿐인 자랑거리였던 것이다. 그런 생각이나 하며 1500페이지 남짓을 나의 아무 재주 없는 손으로 넘겼다.

 그러다 며칠 뒤 제이가 오스트리아로 영영 떠날 거라며 연락을 해왔다. 그와 나는 시내의 조용한 커피 로스터리에서 만났다. 그 역시 한때 ‘die Philosophin’을 차리려 했던 나처럼 카페 쪽의 커리어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제이에게, 너도 나처럼 음식을 못 만드니까 분명히 망할 거라고 했지만 그는 자기는 바리스타가 아닌 웨이터가 되고 싶으니 괜찮다고 받아쳐냈다. 내가 너 독일어 한 마디도 못 하잖아, 라고 다시 쏘아붙이자 제이는 오스트리아에 아시아 관광객이 정말 많다면서 자신은 그곳에 꼭 필요한 인재라고 강조했다. 꿈이 없다면 필요를 쫓아야 한다고, 갑자기 웬 자기계발서 같은 말을 지껄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중국어와 일본어로 간단한 의사소통 정도는 할 줄 알았고, 약간의 몽골어도 숙지하고 있었다. 갓 성인이 됐을 무렵, 자르갈란트라고 하는 농촌마을에서 봉사를 했는데 옆집의 비닐하우스에서 종종 모습을 보이던 몽골인 아이와 친해져 몽골어를 배웠다는 것이다. 사실 언어를 배웠다기보다는 단어를 배웠다는 쪽이 맞았다. 아이와 그는 초원을 산책하면서 숨바꼭질 놀이를 했고—사방이 초원뿐이라 숨을 곳은 바람 뒤밖에 없었단다—중간 중간 아이는 사물들의 이름을 몽골어로 가르쳐주었다. 그가 배운 말은 구름, 풀, 친구, 밥, 물, 바깥, 불, 걸음이었는데 내가 그걸로 오스트리아에서 몽골인 관광객을 맞을 수 있겠냐고 비꼬자 자신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며, 그 몽골인 아이는 살면서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단어를 다 말해 줬다고 외려 나를 꾸짖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진 채로, 멋쩍게 그게 자르갈란트 소년한테나 통하지, 울란바타르인과 너는 무엇에 대해서도 소통할 수 없을 거라고 못 박았다. 이어 내가 그 여자는, 하고 묻자 제이는 헤어진 지 오래라고, 자기 동생이랑 바람이 났다고 역시나 멋쩍게 대답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그 여자는 자신보다 남동생과 훨씬 더 잘 어울린다는 사족까지 붙였다. 제이는 여자와 진지한 논쟁을 벌일 때면 공격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상해서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지 못했는데, 남동생은 여자의 똑같은 말투를 오히려 상냥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결국 그 여자와 논쟁이 아닌 토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남동생과 여자는 얼마 안 되어 깊이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만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곧 결혼을 할지도 몰라, 라고 그가 낭패감이 짙은 얼굴로—그에게서 이런 얼굴을 볼 줄이야—웅얼거렸다. 제이 자신이 둘을 서로 만나게 해줬다는 게 아이러니였다. 나는 그가 오스트리아로 떠나는 것이 동생과 그 여자의 결혼식을 피하기 위함임을, 그의 표정으로부터 알아차렸다.

 우리는 커피 잔을 비운 뒤 서로 약속하지조차 않았는데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근처의 또 다른 카페 안으로 들어가 한 잔씩 커피를 더 마셨다. 나는 카페인에 강했지만, 제이는 금방 손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얼마 뒤에는 토할 것 같다면서 집에 가봐야겠다고 내게 말했다. 우리는 두 번째 카페 앞에서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이별을 말할 때처럼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손을 떼고 돌아서려는데, 제이가 갑자기 어떻게 웨이터가 되겠다는 자기 말을 그렇게 쉽게 믿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거짓말이지, 나 사실 이모가 비엔나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셔. 오케스트라에서 세컨 바이올린 맡고 계시거든, 이모 만나러 잠시 떠나는 게 다야.”

 그러나 잠시 머물면서 영원히 머물 구석을 찾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그러므로 일단은 절대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떠나는 것이라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나를 보러 온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다시 한 번, 어떻게 자기 말을 그렇게 쉽게 믿었냐고 되물었다.

 “네가 어떻게 되든 뭐, 이제 달라지는 것도 없잖아? 나한텐.”

 나는 우리가 당장 남이기 때문에 그의 거취와 내 미래 사이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마치 무슨 매니페스토라도 읊는 것처럼 외쳤다. 그렇게 말하면서 살짝 눈물이 나올 뻔했는데, 내 진심이 그렇게 별 게 아닌 줄 몰랐어서 눈물이 나왔는지, 아니면 그 외침이 내 진심이 아니었어서 눈물이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날로부터 며칠 전만 해도 이선희의 ‘J에게’를 틀고 샤워를 했던 것이다. 아무튼 그와 헤어지는 것이 무척 찝찝했다는 느낌은 지워지지 않는다. 슬픔도 슬픔이지만, 난 데 없는 찝찝함이 더 심했다.

 제이와 영원히 헤어진 뒤, 내가 당장 가진 것이라곤 책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예전보다 훨씬 열심히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책꽂이를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싶어졌다. 문학은 문학끼리, 비문학은 비문학끼리, 기타 등등은 기타 등등끼리 모아 다시 꽂았다. 기타 등등 가운데서 내가 고등학교 때 썼던 일기장을 발견했다. 대체 이런 걸 왜 이사하면서 들고 왔는지 바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아마 전에 살던 집에서는 부모님과 함께 지내고 있었으니, 부모님께서 이 일기를 읽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정독했다. 인상 깊었던 것은 “나는 500년 뒤에 아이슬란드의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지식인이 될 것이다”라는 문장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랄하네, 라는 말을 육성으로 뱉었다. 아무리 내 욕망에 솔직하게 쓴 일기라 해도 19살 때 나는 어딘가가 돌아있었던 게 분명했다. 아이슬란드는 또 뭐지? 당시 생각으로 한국과 가장 먼 나라? 나는 컴퓨터 사인펜을 들고 와 그 문장 위를 새까맣게 그었다. 미친년. 500년은커녕, 500일 뒤에도 내가 누군가에게 기억될 수 있다면 성공한 게 아닐까 싶었다. 대체 500년 뒤의 일을 내가 어떻게 알고 통제한단 말인가? 나는 500이란 숫자를 갖는 시간의 단위들을 차례대로 헤아려보았다. 500년, 500달, 500일, 500시간. 그렇다면 500시간 뒤의 일은 내가 알 수 있을까? 그 정도 시간 뒤에 내가 뭘 하고 있을까를 예상해보다—공시 준비? 파트타이머? 내 희망으로는 여행이나 코인노래방 행?—500이란 숫자의 무게 때문에 그것이 마치 영원한 시간처럼 느껴져 포기했다.

 그렇다면 500분은? 500분 역시 영원 같았다. 나 같은 게 500분 동안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생각만으로도 지루하거나 답답해서 정신을 잃을 게 뻔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500초라는 단위를 생각해냈다. 500초마저 아득했다. 가끔씩 신문에서 광고되는, 소문만 무성한 웬 건강식품 이름 같았으니까. 이를테면 ‘지리산 오백초로 당신의 정력을 아흔까지 지켜드립니다!’ 남자들의 정력은 아흔 살까지도 지켜져야 한단 말인가? 이왕 지킬 거라면 백 세 시대에 굳이 ‘아흔’으로 운을 뗀 이유는? 그런데 어, 500초가 몇 분이지, 300초가 5분이니까…….

 500초는 8분에서 9분쯤 될 것 같았다. 이 계산을 하기 위해서만 나는 꽤 오랫동안 멍을 때렸다. 아이슬란드의 지식인은 무슨, 구몬을 다시 푼대도 어렸을 때만큼이나 오래 고전할 것 같았다. 아무튼 8분에서 9분이라 생각하니 정신이 확 들었다. 내가 500초 뒤에 뭘 할지 정도는 알고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당장만 해도 나는 내가 500초 뒤에 일기장을 다시 책꽂이에 도로 꽂아 넣으리란 것을 예측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내 미래의 500초만큼은 통제하고 있다는 관념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초콜릿을 과다복용한 것처럼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거울 앞으로 가 막춤을 췄다. 몸이 흐느적거리기만 하는 게 춤에는 소질이 없었다. 근육들이 금방 피로해졌다. 침대에 누워 쉬었다. 다음으로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손목시계를 장롱에서 꺼내 찼다. 나는 그 초침들이 가는 것을 단순하고, 단순한 만큼 괴로운 확신을 가진 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날 밤 바로 제이의 꿈을 꿨다.

 깨어있을 땐 나름 잘 잊고 지낸다고 믿었지만, 믿음이 오만이 되어 망각이 완료됐다고 확신하는 날이면 바로 밤에 제이를 만나버리곤 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잠들기 직전만 해도 자신만만했기 때문이다. 나는 매 순간 다음 500초를 손 안에 쥐고 있었고, 그 500초들을 놓지 않은 채 쭈우욱 병렬시키면 영원마저 장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번 500초, 다음 500초, 그 다음의 500초, 그렇게 하나씩 넘기면 돼, 괴롭지만 단순하게……. 이런 위안을 수면제 삼아 겨우 잠에 들었던 것이다. (나는 영원을 장악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부터만 위안을 얻어냈다. 그 외의 생각들은 또 다른 불안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악력(握力)은 하루의 삼분지일을 차지하는 잠의 세계로 들어가면 제로가 됐다. 나처럼 꿈에 약한 타입은 현실로 돌아와도 몇 시간은 꿈결의 인상들을 떨쳐내는 데 할애해야 했다.

 꿈속에서 제이는 내 목을 핥았었다. 꿈에서 깬 나는 손톱으로 목 주변을 할퀴었다. 새빨간 자국이 마치 붉은 실로 하는 실뜨기 놀이의 한 장면처럼 살에 남았다. 문득 시계를 올려다보니 새벽 4시였다. 다시 잠에 드는 일은 경험상 불가능했다. 정확히 말해서 불가능하지야 않겠지만, 최근의 취침 데이터들은 하나같이 그냥 일어나서 마음 가는 일을 하라고 제언하고 있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영화 ‘열혈남아’를 볼지 성경을 읽을지 고민했다. ‘열혈남아’는 왕가위 감독의 데뷔작으로, 내가 유일하게 보지 않은 그의 작품이었다. 성경은 먼 옛날 주인 인심이 좋아 보이는—입구에 ‘길 모르시는 분 물어보세요’라고 쓰여있었다—어느 중고서점에서 샀다. 소비의 동기는 뻔했다. 기분의 오르내림과 상관없이, 또 애인의 유무와 상관없이 좀 더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행복해지고 싶었다. 예전부터 몇 페이지씩 들춰봤었지만,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행복해지는 데는 실패했다. 신을 찾는 동기가 아무래도 너무 이기적이었다. 내가 신이어도 내게는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고심 끝에 ‘열혈남아’를 보기로 했다. 영화를 보지 않기로 했던 금기는 제이와 헤어졌으니까 이미 깨진 거라고 합리화했다. 나는 남자들이 한심할 정도로 치고 박고 싸우는 모습을 간장 속의 장아찌마냥 피로에 절은 채 지켜봤다. 그 와중에 아, 내가 신비체험 같은 거라도 해봤다면 좋았을 텐데, 언젠가 내 눈과 귀로 영원과 만날 수 있다면, 같은 장아찌처럼 달콤한 생각이 스쳤다. 장만옥이 의사인 애인을 버리고 건달 유덕화를 선택하는 장면에서였다. 그러나 나는 방황하는 애새끼로서 신비가 아닌 시청각체험을 선택했다. 애초에 신비는 선택되는 게 아니라 운 좋은 누군가에게만 문득 덮쳐오는 성격의 것으로 여겨졌다.

 마지막에 유덕화가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고, 아직 해는 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