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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체리에 대한 사변(2021.3)

 영채의 부모님은 자신의 열 살배기 딸이 ‘체리는 왜 맛있는가’를 며칠씩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녀가 이 사회에 완벽히 무해하고 무용한 사람으로 자라나리라고 예감했다. 그 예감은 결국 들어맞았는데, 두 사람은 그에 안도해야 할지 아니면 안타까워해야 할지에 대해 끝내 합의하지 못했다. 영채의 엄마는 딸이 자신의 주변에 미치는 미미하기 짝이 없는 영향력을 슬픔의 이유로 받아들였다. 한편 영채의 아빠는 같은 것을 평온에 대한 약속, 일종의 보험 같은 것으로 삼고자 노력했다. 그런가 하면 각자의 입장 자체가 약화돼서, 영채의 아빠가 먼저 우리 딸, 이러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살다 죽는 거 아니냐고 안절부절 못해 하기도 했고, 그에 따라 미스 노바디도 나쁘지 않아요 여보, 라고 영채의 엄마가 그를 위로하기도 했다. 요컨대 영채의 부모님이 딸이 사는 삶의 의의에 대해 합의하지 못한 핵심적 이유는 간헐적인 갈등에 있지 않았고, 애초에 각자 자신의 입장을 확실히 굳히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정작 딸 영채는 자기 삶의 의의에 대해서라면 확신을 갖고 자시고 하기 이전에 조금의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는데 말이다. 나는 살고 있을 뿐이고. 그 전반적으로 지루하면서도 이따금 모험을 강제하는 프로세스에 의의라는 것이 반드시 덧붙을 필요는 없다고, 그녀는 냉소했다. 의의는 삶의 개념에 분석적으로 포함되어있지 않으며. 종종 운 좋은 사람들 또는 자의식이 과잉된 사람들이 자기 삶 속으로 의의를 종합시키는 데 성공할 뿐이라고.

 스물일곱 살이 된 영채는 체리의 맛은 그것이 충격적이면서도--과육보다는 오히려 꽃잎을 뭉쳐 만든 버블검과 같다는 느낌--부드럽다는 점에서 온다는 진실을 깨달았다. 다시 말해 체리는 우아한 과일이라는 결론을 내놓았다. 그러니까 영채의 부모님이 생각한 것과 달리 그녀는 단지 ‘며칠씩’만 체리에 대해 사변한 것이 아니었다. 17년 공을 들여 내린 이 결론에 대해 영채는 만족스러워했고, 그 만족감 이상은 원하지 않았다. 체리에 대한 사변은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서 존재의 의의까지 갖춰야 할 필요는 없었으므로.